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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져서 미안해

by 말랭자매

잔디의 생일은 7월 7일,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다. 잔디는 5월 23일부터 아팠고, 금방 나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잔디의 생일이 다가올때까지도 잔디는 낫지 않았고, 잔디가 다 나으면 축하할 겸 그 때 생일 파티도 같이 하려고 우리의 일주년을 미뤄뒀다. 캥거루 고기 간식을 만들어주신 간식 가게 사장님도 잔디의 생일을 기억해주셔서 다음엔 잔디 생일 케이크를 주문하러 오겠다고 기약했었다.

하지만 잔디의 생일은 신경도 못쓸만큼 나의 일상은 매우 달라져 있었다. 일상에서 산책은 사라졌고, 아침 저녁으로 잔디 사료를 불리고 믹서로 가는 일이 추가되었다. 잔디가 밥을 먹어야 약도 먹고 힘도 날텐데, 입맛이 없는지 밥에 전혀 입을 대지 않아서 믹서로 간 사료를 큰 주사기에 넣어 잔디를 먹였다. 그마저도 잘 먹지 않았다. 물도 스스로 먹지 않아서 음수량도 체크하면서 주사기로 줘야 했다.

이렇게 겨우겨우 먹여놔도 잔디의 장은 단백질을 흡수하지 못해서 물이 빠져나와 배가 빵빵해졌고, 매주 흉수와 복수를 빼러 병원에 가야했다. 잔디는 주삿바늘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가슴이나 배에 꽂는 바늘도 끔찍한데, 탈수 증상때문에 다리의 혈관이 안보인다며 잔디 목의 털을 다 밀어놓고 혈액 검사를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소리지를 뻔 했다.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잔디는 꼭 나을 거니까. 이 병원을 다니면서 잔디는 꼭 나을 거니까, 얼굴 붉히는 일을 만들면 안돼 라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병원에 다녀온 날은 잔디가 더 작아졌을까봐 두려웠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은 잔디의 병이 멈춘 듯한 시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 날은 사료를 스스로 먹기도 해서 드디어 잔디에게 맞는 사료를 찾았나 싶으면 다음날 보란듯이 병은 악화되었고 또다시 강급을 시작해야만 했다.


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잔디는 새벽에 깨서 무른 변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 나는 잠에서 깨서 잔디 변을 치우고, 항문 주위를 닦아주고, 다시 잠들었다. 매일 반복되다 보니 솔직히 피곤했다. 잔디가 아픈 뒤로 나는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 하지만 대학병원에 갔을 때 그동안 잔디가 심한 고통을 참았을 것이라는 말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 아파서 그랬던 것임을 깨닫고는 미안함에 하루하루를 만회하고 싶었다.


두 달 정도를 이렇게 보내다보니 처음보다는 잔디가 아픈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상태가 좋아지면 다행이라고 여기고, 나빠지면 다음날은 또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 날도 주사기로 잔디 밥을 먹이고,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잔디가 갖고 놀던 공이 발에 채여서 "잔디야, 네가 갖고 놀던거야" 하고 보여줬는데 잔디는 일어서기 힘들었지만 반갑다는 듯 그 공을 입에 물었다. 그 모습에 마음 한 켠이 아렸다.

잔디야, 익숙해져서 미안해. 여전히 너는 공을 좋아하는 아기였는데. 여전히 방정방정 깨방정 잔디인데 몸이 안따라주는 거잖아, 그렇지? 얼른 건강해져서 예전처럼 동네 산책도 하면서 친구들한테 인사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그러자. 산책할 때 팔랑팔랑 흔들리던 너의 귀가 그립다. 사랑해, 정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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