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롱다리 잔디라면 저런 높이의 의자쯤은 점프로 가볍게 올랐을 것이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잔디의 근육은 점점 빠지기 시작했고, 튼튼했던 뒷다리는 눈에 띄게 얇아졌다. 집에서 잔디는 침대 옆에 강아지 계단은 귀찮다는 듯 이용하지 않고 나의 잔소리에도 점프로 침대를 올랐던 아이인데, 점점 점프에 실패하게 되면서 포기하고 침대 옆 계단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잔디는 더 이상 점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잔디에게 병원은 가볍게 매달 먹는 구충제 약을 받아오며 친구들도 보고, 병원 선생님과 오랜만에 인사도 하는 그런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희귀 질환을 치료받으러 가는 곳이 되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병원을 살피지도 않고, 친구들과 인사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 품에 안겨서 힘없이 잔디 차례를 기다렸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이미 한 달 동안 치료를 해왔지만 처음부터 다시 검사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아침에 병원에 도착해서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를 가서 친구랑 이야기를 하고 다시 저녁 먹을 시간이 될 때까지도 잔디는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검사가 끝났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가보니 노란 액체가 가득 찬 엄청나게 큰 주사기 세 개를 보여줬다. 잔디의 배와 가슴에서 나온 것이란다. 잔디는 단백질 흡수를 못해서 체액이 복강과 흉강으로 빠져나왔고, 지금 그 물을 제거한 것이라고 한다. 여전히 잔디의 진단명은 IBD였고, 이제는 확정이었다. 여전히 명확한 치료법은 없었고, 스테로이드와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며 적당한 사료를 찾는 것을 치료 목표로 삼았다.
복수와 흉수까지 뺀 오늘의 잔디는 5kg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나 작아진 잔디는 나를 보고 힘없이 반겨줬다. 비틀비틀 한 발자국씩 옮기며 겨우겨우 꼬리를 흔들며 나에게 다가오는 잔디. 하지만 탈수 증상이 심해서 병원에서 수액을 맞아야 했고, 나는 다음날 잔디를 데리러 와야 했다. 오늘 잔디는 하루 종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보고 싶었을 텐데, 집에 가서 마음 편히 쉬고 싶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잔디에게 내일 데리러 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뒤돌아 섰는데, 하루 종일 검사에 시달렸던 잔디가 온 힘을 다해 희미하게 낑낑거린다.
그 소리에 심장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가서 당장 안아주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서 뒤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병원을 나왔다. 혼자 집으로 향했고, 거의 1년 만에 잔디 없이 혼자 보내는 밤이었다.
허전하다.
이런 기분이겠구나. 잔디가 없는 세상은.
1년 내내 잔디랑 같이 걷던 길을 혼자 걸으며 잔디가 있었으면 이랬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나갔다. 잔디가 늘 낮잠을 자던 방석에 밴 잔디의 향기, 잔디가 갖고 놀던 장난감, 잔디가 먹다 남긴 밥. 사방에 잔디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잔디가 너무 보고 싶어서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잠들기 전까지 밖에 있다가 겨우 집에 들어와서 잠만 잤다.
다음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선생님이 잔디를 데리고 나오셨고, 잔디는 나에게 달려오고 싶었지만 힘이 없어 보였다.
잔디야, 잘 잤어? 병원에 잘 있었어? 이제 집에 가자. 힘들었지? 집에 가서 푹 쉬자.
한 시간 넘게 걸려서 집에 도착했고, 가는 길에 잔디가 좋아하는 길에서 산책하려고 했다. 그렇게 안고 있던 잔디를 내려줬는데, 잔디의 발걸음은 훨씬 느려졌고, 잔디는 산책길의 냄새도 맡지 않았다.
잔디가 나를 올려다본다. 마치 그냥 집으로 가자는 듯이.
잔디는 더 이상 산책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런 잔디가 내가 자고 있을 때 말없이 떠날까 봐 자다가 일어나서 괜히 잔디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자는 잔디를 흔들며 깨우는 날이 많아졌다.
잔디야, 너에게선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향이 났었는데 이젠 약 냄새가 나.
잔디의 꼬수운 발 냄새가 그리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