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미안. 좋아하는 누나가 생겼어

by 말랭자매

혼자 무언가를 하는데 거리낌은 없지만 원체 집순이인 내가 낯선 동네에서 하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카페에 가는 정도였다. 그것도 집에 있으면 거의 누워만 있어서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러 카페로 나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잔디가 내 삶에 나타났고, 잔디는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루 세 번 밖으로 꼬박꼬박 나가다 보니 과일가게, 커피가게 등 가게 사장님들이 나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작은 동네다 보니 어느새 나는 동네에서 개 산책시키는 여자로 유명해졌다.

잔디가 붙임성이 좋아서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했기 때문에 가게 사장님들께서 "안녕? 너 또 산책 나왔구나. 이름이 뭐니?"라고 하면 그다지 붙임성이 좋지 못한 나는 잔디 대신에 "네. 안녕하세요. 잔디에요."라고 수줍게 대답했다.

"너 정말 귀엽다. 다리도 길고. 몇 살이니?"라고 물으면 나는 "감사합니다. 이제 8개월 정도 됐어요."라고 쭈뼛쭈뼛 대답했다. 잔디의 대변인 노릇을 하다 보니 동네에서 인사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산책하다 가끔 목이 말라서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면 사장님께서 서비스로 바나나까지 주시니 이전의 삶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망고와 놀고있는 잔디

잔디의 핵인싸력은 강아지들 사이에서는 절정이었다. 잔디는 심지어 정도를 조절할 줄 아는 핵인싸였다. 활발한 친구들에겐 같이 뛰며 그 활발함에 맞춰주고, 소심한 친구들에겐 자신의 똥꼬를 내어주며 "맡아봐. 나 괜찮지? 우리 같이 놀자.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줄게."라는 듯이 친구가 잔디를 파악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누군가는 이런 잔디를 아기 천사라고 불러주었다. 덕분에 나는 이 동네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거의 다 알 정도였다.

잔디의 첫 친구는 앞집에 사는 복순이였다. 복순이랑 처음 놀게 된 계기도 우리 집 위층에 사는 분이 잔디랑 복순이를 예뻐해서 위층에서 같이 놀아도 된다고(?) 집으로 우리를 초대해 주셨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웃집에 초대가 되다니. 그것도 강아지들 놀라고! 게다가 밥도 얻어먹었다.



누나 날 가져


망고, 까롱이, 사랑이 등 잔디에겐 친구가 많은데 그중에 잔디가 정말 좋아하는 누나는 귀여운 시베리안 허스키인 '하루'다. 일이 생겼을 때 지인에게 잔디를 가끔 맡겼는데 지인이 키우는 강아지인 하루는 순한 얼굴로 잔디의 넘치는 에너지를 다 받아주었다. 잔디는 그런 하루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겼다. 하루랑 놀고 온 날은 집에 오자마자 꿈나라로 직행이었다.



잔디가 친구들이랑 인사할 때 상대 견주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강아지 종이 뭐예요?"였다. 믹스견이라고 답하면 왠지 모르게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서 잔디와 닮아 보이는 견종을 찾아서 "잭 러셀 테리어예요"라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곧 사람들이 잔디를 어떻게 생각해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잔디는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잔디'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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