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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Nov 14. 2024

챕터 69 - 장면들

중국 지린(吉林) 동쪽의 둔화(敦化)시


반군의 베이스캠프. 장민(張珉)은 그의 낡은 소총을 손질하고 있다. 다른 이들과 시시덕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고 여유롭게 총을 닦는다. 사실 요즘은 총을 쏘는 일보다 그저 걷는 일이 더 많다. 중국군은 자중지란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개된 MoBH의 설계도로 인해, 언제 등뒤의 클론이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 안에 만연했다. 어떤 부대장이 휘하의 부하 클론들을 한꺼번에 ‘폐기’하려다가 되려 클론들의 공격을 받고 죽은 일도 있었다. 중국 수뇌부는 그 부대장처럼 클론들을 집단적으로 폐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회의를 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온 일로 인해 그들은 공포에 잠식당했다. 클론들이 감정을 갖게 되면 반드시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 것이라는 공포. 중국 정부를 무너뜨린 것은 그 공포였다. 미국이 MoBH 화학탄을 전방에 배치했다는 사실을 중국 지도부는 알고 있었으나, 그 화학탄의 실체를 보기도 전에 정부는 무너졌고, 소수의 고위층 인사들은 베이징 지하 도시를 빠져나와, 과거 공산당 지도부가 했던 것처럼 대장정에 나섰다. 물론 어떤 전략적 목적도 없이 꼴사납게 살던 곳을 떠난 것이었지만…….


클론 기술 위에 세워진 중국 국가는 무너지고, 반란군이 조만간 베이징을 점령할 것이란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지상과 지하 곳곳에 이미 MoBH가 나돌고 있었고, 원본(原本)임을 자랑스럽게 떠들던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성분’을 감추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들은 클론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장민은 여유롭게 베이스캠프의 더러운 숙소에 앉아, 다른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편하게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은 상하이가 되겠지. 어쩌면 홍콩이 될 수도 있고. 하루에 도시를 스무 개씩 점령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면, 그다음에는 나도 장가를 갈 수 있을까?” 사십도 안 되었는데 벌써 머리가 벗어진 병사 하나가 손으로 자신의 불룩한 배를 두드리며 농지거리를 했다. 그의 농담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도시 점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장가를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웃음을 터뜨린 것이리라.


자신들을 지켜줄 군대가 없는 원본들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순식간에 흩어지고 있다. 캠프에 있는 이들은 모두 먼지가 내려앉은 만두 따위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서걱거리는 저녁 식사도 그저 즐거운 만찬이었다.



한반도 북부. 함경도 납골리라 불리는 마을


어둑한 지하에서 의사이자 군인인 최민성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는 환호를 지른다. “역시 내가 생각한 게 맞았어.” 그는 이것만 있으면, 한반도에 주둔한 중국군들을 몰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포심을 갖게 된 중국 클론들은 싸우기는커녕,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기 바쁠 것이다. 학대만을 받아온 그들이 자신들의 상관을 위해 싸우려 할 리 없다.


오래도록 이 마을에 머물면서, 최민성은 한 가지 조각이 맞춰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클론들의 뇌를 연구하면서, 단백질 합성의 실마리를 찾아낸 기분이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매번 실패했다. 그리고 며칠 전 세상에 공개된 MoBH 설계도를 입수한 최민성은 드디어 그 답답한 기분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는 어떤 학술적 명예를 얻기 위해 연구를 해온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클론들의 감정 억제를 제거할 수 있는 호르몬 합성에만 성공한다면, 중국군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그는 다시 한민족의 손으로 국가를 세워, 스스로를 통치하는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반란군에 합세해 싸우는 한국인들도 많았으나, 최민성이 보기에는 소득 없는 전투였다. 한방에 중국군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최민성은 이 호르몬이 세상에 공개되면 중국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우리 한국인들도 서둘러 반격의 준비를 해야 한다. 최민성은 어서 빨리 동료들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화학탄에 실어서 중국군 부대를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실제로 미군 부대에 그러한 무기가 보급되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외투 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설계도를 돌돌 말아 그의 왕진 가방 안에 넣었다. 이제 의사 흉내도 이만하면 되었다.


조직의 은거지로 향하기 전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그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던 아이가 있다. 십 대 후반의 소년. 허약한 여동생을 먹여 살리느라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는 그 아이와 여동생을 함께 데려갈 생각이었다. 꽤 똘똘한 녀석이었으므로, 잘 가르치면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최민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하실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조심스럽게 입구의 나무 덮개를 밀어 밖을 살핀 후 그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빠져나왔다.


더 이상 이곳에 올 일도 없겠구나. 그는 2년 가까이 이곳에서 의사 생활을 하며 지냈다. 마을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도 의미는 있었으나, 실제 목적은 인근 중국 부대에서 내놓는 클론 시체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새로 태어날 한국 정부는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며, 유쾌한 기분으로 산을 내려갔다.



기타큐슈시(北九州市), 시 청사( 廳舍) 앞.


관선(官選) 시장인 모리모토 시게노부(森本重信)는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리가 동부 지역 순방의 첫 목적지를 이곳 기타큐슈로 잡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기는 맑았다. 모리모토는 평소에도 마스크를 잘 쓰지는 않지만, 오늘은 더욱 그럴 수 없었다. 총리가 이곳을 찾는데 꼴사납게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그를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후, 총리가 탄 차량의 행렬이 모리모토의 시야에 닿았다. 경찰들의 모터바이크가 가장 앞에 나타났고, 그 뒤에 차량 몇 대가 연이어 나타났다. 총리는 가장 안쪽, 행렬 가운데의 차에 타고 있을 것이다.


청사 앞 모리모토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 총리의 차가 멈춰 섰다. 경호원들이 차문을 열자, 뒷좌석에서 마쓰다이라(松平)가 내렸다. 차량 옆에는 그를 보필하는 안드로이드 루미코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으로 니시노 코키의 모습도 보였다.


“수고가 많네.”


총리 마쓰다이라 노리야스(松平徳康)는 모리모토에게 악수를 건넸다. 모리모토가 허리를 굽히며 악수를 받았다. 의외로 총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를 수행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쾌청하고 공기도 맑습니다.”


모리모토의 말에 총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 안으로 들어가지.”


시장실 안으로 들어간 총리와 시장은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도시의 재건 계획과 정부의 지상 복귀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5개월 전 총리직에 취임한 마쓰다이라는 지상 재건과 복귀 계획을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지하가 독점하던 자원의 상당 부분을 지상으로 돌리고, 지상의 환경을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여전히 반대가 많았지만 의회의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마쓰다이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시바가 세상을 뜨고, 한동안은 하시바 가문이 일본 정계를 움직였으나 한참 모자란 하시바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남겨준 ‘고삐’마저 제대로 활용할 줄 몰랐다. 권력은 천천히 마쓰다이라에게 넘어왔다. 그리고 권력의 이동을 재빨리 눈치챈 정치인들은 마쓰다이라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 친구가 니시노 코키일세. 환경 관련된 프로젝트 상당수를 이 친구가 이끌고 있지.”


마쓰다이라의 말에 코키는 평소와 다르게 점잔을 빼며 모리모토에게 예의를 차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모리모토의 말에 코키가 머리를 숙이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쓰다이라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쿠미코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갔다. 잠시 후, 총리와 시장, 그리고 환경성 국장인 니시노 코키는 쿠미코가 내린 차를 마시며 환담을 이어갔다. 방 안에는 차향이 그윽하게 흐르고 있었고, 모리모토의 마음속에는 미래에 대한 상상이 물속에 풀어지는 찻잎처럼 그 향을 더해가고 있었다.



미국 지하 워싱턴. 의사당. 상원 본회의


전국의 지하 도시에서 온 의원들이 본회의를 앞두고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리노이 지역에서 온 마틴 테일러(Martin Taylor) 의원은 지루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또 공화당 의원들이 클론 시민법에 대한 반대 의견을 주야장천 떠들어대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하품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주당 소속 마틴 의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무엇이 다른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전에는 그토록 격렬하게 경쟁하고, 내전을 걱정할 만큼 치열하게 다퉜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둘 다 빨강과 파랑을 섞은 보라색 정당처럼 보였다.


하지만 최근 클론 시민법을 두고 두 당은 완전히 입장이 달라져 있었다. 공화당은 결사반대. 민주당은 절대적으로 찬성.


사십 대 후반의 나이로 젊은 의원들을 이끌고 있는 마틴은 가장 열렬한 시민법 찬성론자였다. 그의 집에만 해도 열 명의 클론이 있었다. 향수 사업으로 성공한 그의 집안은 오래전부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해 왔는데, 그래서 집안의 클론에게도 온정적이었다.


그날, 페머트 대통령이 갑자기 돌변해서 MoBH 계획을 진행한 이후, 마틴은 어차피 사태를 되돌릴 수 없고, 클론들을 포용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여겼다. 굳이 루시의 계획이 아니었다고 해도, 세상이 망해가고 있다는 것은 식자(識者)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히 퍼져있는 생각이었다. 마틴은 차리라 뭐라도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클론 시민법이 빠른 시일 안에 가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직 찬성론보다는 반대 여론이 더 높은 상황이었다.


상원 의장인 부통령 마이크 챈들러가 회의장으로 들어오자, 회의장 안에 먼저 와있던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의를 갖췄다. 챈들러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의장석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칠십 대의 나이였으나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었다. 한때는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며 페머트 대통령과 각을 세운 그였지만, 하루도 안 가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정부 지지로 돌아섰다. 뒤로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으나, 누군가는 모처럼 쥐어짠 용기가 식어버리고 다시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간 부통령을 안타깝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부통령은 심정적으로는 클론 시민법에 반대하고 있었으나, 민주당 내에 찬성론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처럼 두리뭉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MoBH가 시행된 그날, 페머트 대통령이 죽고 클론이 대역을 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한 날, 아마도 그날이 부통령의 인생에서 가장 용감한 하루였을 것이다.


“테일러 의원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한 젊은 의원이 마틴의 자리로 와서 인사를 건넸다. 캘리포니아 지역의 초선 의원이었다. 나이가 이십 대 후반인 아주 젊은 의원이었다. 그는 혼혈인 흑인 의원으로 아버지가 흑인, 어머니가 백인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선거에 당선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신인이었다. 존이란 이름의 의원은 클론 시민법의 열광적인 지지자였다.


“얼굴이 아주 몰라보게 훤해졌군.”


마틴의 말에 존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원님께서 이번에 출간한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안 그래도 그는 품에 한 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여기에 사인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마틴이 한 달 전에 낸 책이었다. 클론 시민법을 비롯하여 현재의 정국에 관한 그의 의견을 담은 책이었다. 정치인들이 선거철이면 늘 내는 것이 책이기에 누가 읽어나 볼까 싶었는데, 젊은 의원이 자신의 책을 들고 와서 사인을 청하니, 마틴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이지. 졸필이지만, 나름 열심히 연구해서 쓴 책이라네. 재미는 없겠지만…….”


마틴은 존이 건넨 만년필로 책 첫 페이지에 멋지게 사인을 하고 존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청년은 책을 되돌려 받으며 다시 책의 내용에 대해 칭찬을 했다. 그는 앞으로도 많은 지도를 바란다며 자리를 떠났다.


선거가 보름 앞으로 다가온 날. 9월에 계획된 공세는 당연히 보류되었고,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건대 다시 계획이 입안될 리도 없었다. 전쟁은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공화당의 한 의원이 의장석 앞에 설치된 연단에 섰다. 그는 마틴이 예상한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클론 시민법은 우리 미국 헌법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며, 반 헌법적인 발상입니다. 저는 이 법안을 제안한 페머트 대통령을 탄핵해야 하고, 이 법안을 제출한 루시와 다른 두 인공지능을 완전히 수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헌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공지능들에게 우리 미래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마틴은 크게 하품을 했다. 그만이 아니었다. 민주당의 많은 상원 의원들이 똑같이 하품을 했다. 본회의장의 지루한 공기가 곳곳으로 전염되는 듯했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겠지. 마틴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루함을 참아내고 공화당 의원의 연설을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때로는 세상이 단 하루 만에 바뀌는 때도 있지. 그날이 그러했다. 도대체 페머트 대통령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그처럼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을까? 마틴은 대통령 사망설이란 음모론이 떠도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 여겼다. 하긴, 죽다가 살아나면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고 하지. 마틴은 피습을 당한 대통령이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고는 완전히 다른 사고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날까. 지루함을 못 견디던 마틴은 누군가 전해준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다.


“반군과 정부가 협정을 맺었답니다.”


주변에 있는 의원들도 모두 소식을 들었는지 얼굴이 환해졌다. 연단에 있던 공화당 의원도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넥타이를 고쳐매고 물을 마셨다. 그토록 미국을 괴롭히던 반군이 이렇게 빨리 꼬리를 내린다고? 바라던 일이었으나 공화당 의원은 뭔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미 대륙 중부와 남부의 반군들은 반군 연합의 지도자인 크리스 신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반군 활동 중지, 지상 복귀 계획 참여를 결의했다. 오직 강경파인 미하일만이 협정에 불만을 나타내며, 브라질 남부로 가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쳤고, 본회의장 의원들은 정당을 가리지 않고 부통령을 따라 박수를 쳤다. 누군가 소리쳤다. God bles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다른 의원들이 한 목소리로 그 말을 따라 했다. 박수는 한참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피닉스(Phoenix). 지상 교도소 안 면회실


클로이(Chloe)가 면회실에서 5분 정도를 기다린 후, 투명한 가림막 뒤에 있는 문이 열리며 아서가 나타났다.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으나 여전히 죄책감에 짓눌린 분위기였다. 키가 큰 편이었으나 어깨가 굽어 초라한 행색이었다.


“잘 지냈어?”


클로이의 물음에 아서는 작은 목소리로 “그냥 그렇지 뭐”라 대답할 뿐이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다. 흉악범이자 전 국민의 지탄을 받는 패륜아, 아서 스미스에게는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권 단체를 통해 결국 면회를 허락받게 되었고, 클로이는 그 후 매주 그를 찾아왔다.


“소식 들었어? 반군 활동이 중지된 거?”


“어. 간수가 알려줘서…….”


클로이는 언제나 주눅이 든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물론 그의 죄는 되돌릴 수 없이 큰 것이었으나, 결국 그는 미하일의 조종을 받은 존재였을 뿐이다. 왜 그가 그 모든 죄를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뭐 좀 먹고 있는 거야? 볼이 아주 핼쑥해졌네. 피부도 푸석하고…….”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있지. 요샌 입맛도 없고 그래.”


아서는 클로이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토록 보고 싶은 그녀였지만 막상 그녀를 눈앞에 두니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볼 때면, 자신이 죽인 에블린이 생각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잘 챙겨 먹어야지. 그러다가 탈 나겠어.”


“뭐……. 그렇게라도 속죄를 할 수 있다면…….”


클로이는 결국 화를 냈다.


“그런 표정……. 그래. 나도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거 알아. 그리고 네가 얼마나 큰 짐을 지고 있는지도 알고…….”


그녀의 성난 목소리에 아서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클로이는 바다처럼 깊고 푸른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모든 걸 다 네가 짊어지려고 하냔 말이야. 네가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닌데…….”


클로이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에 아서는 머뭇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 그랬다면 그 모든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 하지만 또 어떨 때는 모든 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생각도 들어. 그러다가도 또 그 일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할 방법은 없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클로이는 손으로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분명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가 있을 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그리고 나는 너랑 만난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도 이렇게 네 얼굴을 보고 싶다는 사실도 감추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너를 욕하고 비난해도,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그녀의 말에 아서는 소매로 얼른 눈가를 닦았다.


“다음 달부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안에서 만날 수 있게 해 준대. 잠은 못 자도, 몇 시간 정도는 안에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어디서?”


“어디긴. 네 방에서……. 그것도 인권 단체가 힘써준 결과야.”


클로이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그날 기다리면서 조금만 힘을 내봐. 죽어야 할 이유만 찾지 말고, 살아야 할 이유도 찾아보란 말이야. 나를 위해서라도…….”


그때 아서의 뒤에 있던 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했다. 아서는 이제 클로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기다릴게. 아,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읽을만한 책 좀 몇 권 가져다줘.”


“무슨 책?”


“그냥 아무거나. 뭐, 소설 같은 거?”


“그래. 알았어. 다음에 올 때 가져다줄게. 잘 좀 챙겨 먹어. 지금 모습은 보기 안쓰러우니까.”


“그래. 알았어.”


클로이가 면회실을 떠나고, 아서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 간수 하나가 아서의 방으로 다가와 문을 사이에 두고 말했다.


“그 소식 들었어? 3975? 미하일이라고. 두랑고에서 너랑 공모해서 그 짓을 벌였던 놈 말이야. 그 자식은 이번 협정에서 빠지고, 저 멀리 브라질까지 내려가 계속 그 짓거리를 이어갈 것이라 했다더군. 너도 너지만, 그 인간은 정말 구제불능의 악마로군.”


간수는 코웃음을 치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흥얼거리는 멜로디가 공명을 일으키며 감옥 안으로 울려 퍼졌다.


아서는 독방에 앉아 그 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 악마의 얼굴. 그래, 아직도 반군 활동을 이어가겠다고? 언제가 될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만일 내가 이 감옥에서 나가는 날이 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녀석의 두 눈을 파내어 씹어먹어 주리라. 아서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짐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래, 그 자식을 죽이는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그 자식을 죽여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을 이 지옥으로 끌어들인 악마의 얼굴이 바로 이렇게 생겼다고……. 아서는 자리에 앉아, 히죽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그의 광기는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고 독방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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