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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11시간전

발인(發靷)

왜 우리의 말은 늘 한 발 느린 것일까? 사람들은 하얀 종이가 씌워진 식탁에 앉아, 일회용 접시에 담긴 반찬을 먹고 있다. 역시 일회용 소주잔에 담긴 술을 들이키며, 예상보다 짧았던 누군가의 삶을 아쉬워하고 한탄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뜻하지 않은 부고 소식을 듣고는, 왜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힘들면 말을 하지, 밥이라도 한 끼 사 먹이는 건데, 그런 말들을 쓴 술 한 모금과 함께 집어삼키는 것이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으니까.


동창들은 이따금 장례식장 밖에 있는 구석진 자리에 모여, 추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담배를 태운다. 모두 오랜만에 본 얼굴들이다. 연기를 내뿜지만 그들은 쉽사리 말을 밖으로 뿜어내지 못한다. 한숨과 겨우 끄집어내는 몇 마디 말. 우리는 그저 누군가 툭툭 건네는, 퍼즐 같은 그의 근황들을 하나 둘 모아, 그의 생전 모습을 조립해 보는 것이다. 그가 느낀 절망과 고독이 대관절 얼마나 컸기에, 그는 지금 해맑게 웃는 사진 한 장으로 우리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질문을 던지며.


우연히 듣게 된 그의 부고 소식에 나는 부랴부랴 이곳으로 왔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여섯 달, 아니 아마 일곱 달 정도 전이었을 것이다.


보통 같으면 문 앞에 놓고 벨을 누르고 갔을 텐데, 그날 하필이면 가게에서 메뉴 하나를 빼놓고 보낸 것이었다. 벨소리가 나고 배달 기사가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벨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현관 밖을 보니 그곳에는 오토바이 헬멧을 쓴 남자가 있었다. 중학교 동창. 정은수. 3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내 기억으로는 내 자리에서 대각선 자리에 앉았던 친구.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쉬는 시간에는 교과서나 공책에 늘 만화 같은 걸 그리곤 했다. 나중에 만화가가 될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아니라고, 이건 그냥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거라고, 자기는 먹여 살릴 동생들이 많다고, 집안 형편이 만화 같은 거 그릴 정도가 안 된다고, 그런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런 질문을 했던 건, 분야는 다르지만 나도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글 읽는 것을 좋아한 나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글을 썼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글이겠지만, 나름 진지하게 임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의 ‘창작욕’에 관심이 갔던 것 같다.


가게의 실수였는데 은수는 내게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일회용기 안에 든 파스타를 건넸다. 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 것을 보건대, 그도 아마 나를 보며 ‘혹시’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 역시 그랬다. 다른 라이더처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면 몰랐겠지만, 사과를 하기 위해서인지 은수는 헬멧만 쓰고 있었고 나는 하얗고 눈이 축 처진 얼굴, 그리고 그의 두꺼운 입술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중학생 때보다는 몸집이 두 배는 커진 듯해서 많이 달라 보이기는 했지만, 뭐랄까, 포토샵으로 늘린 듯 그는 몸집만 커지고 전체적인 인상은 그대로였다. 그가 나를 확실히 알아보지는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한쪽 콧구멍에 피어싱을 하고 있는 나를, 검은색 단발머리를 한 착실한 여중생의 이미지와 겹쳐 보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아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졸업 후에도 우리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동창회 때 몇 번, 그리고 아는 친구를 통해서 건너 건너 만난 술자리 같은 곳에서, 가끔씩 만나 술을 마신 적이 있다.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잔을 기울일 때는 꽤 즐겁게 시간을 보냈는데, 이상하게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의 기억은 희미하게 남아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색이 바랜 사진 같다. 아니, 처음부터 초점이 안 맞아 알아볼 수 없는 사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영역 속에 살아가는 타인이었다.


“계속 여기저기 지원은 했던 모양이야.”


나는 잘 모르는 얼굴의 남자가 손가락 한마디도 안 될 정도로 남은 담배를 마지막까지 쥐어짜 태우고는, 담배연기처럼 툭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사고가 난 후부터는 반년 넘게 집에서 쉬었대.”


“산재는 받았대?”


“못 받았겠지. 배달 라이더인데, 그런 게 가능했겠어?”


그들은 잘 맞춰지지 않는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먼저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빈소 입구에는 디지털 화면 위에 고인의 사진과 인적 사항이 표시되어 있었다. 정은수. 32세.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 사진에는 그가 지난 반년 동안 겪었을 시간의 굴곡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누구도 열어보지 못한 그의 집처럼, 그가 생의 마지막에 견뎌내야 했을 시간들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채, 그의 몸과 함께 관 안에 고요하게 담겨 있다.


나는 빈소 한편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방금 자리가 비었는지 식탁 위에는 소주잔 몇 개와 편육, 명태조림, 해파리냉채 같은 반찬이 담긴 접시, 먹다 만 육개장 그릇 따위가 놓여 있었다. 나는 식탁 한쪽에 포개어져 탑처럼 쌓여있는 일회용 소주잔을 꺼내, 잔에 소주를 따르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렇게까지 괴로웠을 줄은 몰랐다. 때 이른 죽음을 앞에 두고 모두가 똑같이 하는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살지 그랬느냐. 나한테 말을 했다면 내가 뭐라도 도와줬을 텐데. 고인의 영정 사진을 마주했을 때야 우리는 그런 말들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영화처럼, 각본에 쓰인 순서대로,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대사를 읊는 것처럼.


미리 알았다면, 지금 이 순간을 미리 살아볼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필름처럼 되감기를 할 수 있었다면, 영화의 내용은 달라졌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은수는 상자 속 고양이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그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어느 날 상자를 열어보니 그는 죽어 있었다. 그의 죽음은 코펜하겐적인 것이었다. 세상은 확률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자를 열어보았을 때 비로소 은수의 죽음은 확정되었다. 그의 사인은 밝혀졌으나,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진짜 사인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소주를 한 잔 더 마시고 장례식장을 떠났다. 이 이상의 슬픔은 내가 표현할 수 없고, 표현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있어 거의 모르는 사람, 이방인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에 대해서, 내가 져야 할 최대한의 슬픔을 표시하고,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사실 나는 그를 한 번 더 보았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장례식장을 떠나고, 어둠이 깔린 내리막길을 천천히 걸었다. 전날 온 눈은 해가 들 때 잠시 녹았다가, 저녁에 되자 다시 얼어붙었다. 길은 미끄러웠다. 내리막길을 벗어나 한참을 더 걸은 후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밤에도 그러했고, 해가 나기 시작한 아침에도 그랬다. 썰렁한 집, 내 방 침대에 누워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할 일이 없었고,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아니, 가보고 싶은 곳은 있었으나 지금 그곳에 갈 수는 없었다.


멀리, 남해 바다로 가고 싶었다.


몇 해 전 가 보았던 강진, 어느 항구의 바다. 이제 그 항구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영감을 얻고 싶어 혼자서 떠난 여행이었다. 여행 첫날에는 비가 무진장하게 내렸는데, 둘째 날은 맑게 개었다. 그 지방의 누런 색 버스가 위태롭게 절벽 위 해안가 길을 굽이굽이 돌 때, 나는 홀로 좌석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멈추곤 했는데, 그 지역의 노인들은 모두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도 없는 시선으로, 버스 안의 빈 공간을 바라보며. 그리고 도착한 항구, 배도 별로 없고 사람도 거의 없는, 가끔 지나다니는 털 빠진 개가 전부인 곳에서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셔플된 음악들. 그러니 확률론적으로 재생되는 음악들. 제이슨 므라즈의 음악이 있었고, 크렌베리스의 음악도 있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다프트 펑크의 느슨한 음악을 들을 때는, 이번 여행도 제법 괜찮았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잔잔하고 심심해서, 누구에게도 말할만한 것 하나 없는 여행이었다. 작가 지망생인 나는 여행기를 쓰지도 않았다.


차가운 방, 침대에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워있으니, 그곳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은 갈 수 없겠지.


보일러도 틀어져 있지 않은 모양이다. 잠이라도 자고 싶었으나, 10시간 넘게 잠을 자서 그런가,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옷장에서 패딩 점퍼를 꺼내 입고는, 방 안의 책상으로 가 앉았다. 발밑에 스미는 찬 공기. 차가운 냉혈의 뱀이 복사뼈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이다.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열어본다. 화면이 밝게 켜지고, 패스워드를 입력하자 가지런히 정리된 바탕화면이 보인다. 파일 탐색기를 열어 안에 담긴 문서들을 찾아본다. 2년 동안 써놓은 단편 소설 파일 몇 개가 보이고, 쓰다 만 장편 소설 폴더도 보인다. 문서 폴더 안에는 회사 업무와 관련된 파일도 있었다.


나는 ‘소설’이란 이름의 폴더에서 가장 최근에 쓴 소설 파일을 더블 클릭했다. A4 12매 정도 분량의 단편 소설이다. 신춘문예에 보냈다가 최종심에도 들지 못하고 떨어진 작품. 다시 꺼내 읽기도 싫은 글이었다. 시작하자마자 어떤 여인이 죽고, 형사들이 그녀의 방을 살핀다. 여자의 마지막 흔적은 어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 멈춘다. 인공지능이 들어가 있는 앱.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말을 그 앱에 남겼다. 형사는 의아한 얼굴로 사건 현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또 연이어 발생한 살인사건. 형사의 수사. 앱을 만드는 한 남자. 그의 수상한 행보……. 공모전을 위해 허겁지겁 썼던 글이었다. 도대체 나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중학교 시절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토록 문학을 갈망했으나, 뮤즈는 내 목소리에 단 한번 호응을 해준 적 없다. 공모전이 끝난 후면, 나는 내게 쓴 모든 것들,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모든 문장이 쓰레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괴로웠고, 결국 언젠가는 이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 한 사람이 있어, 포기하지 말라고, 네가 하는 일은 나름의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멈추지 않고 네 이야기를 계속 만들고,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으라고,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스스로를 위로하기에도 벅찬 세상이니까.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1월의 어느 날, 동네 뒷산에 올라 새벽 공기를 마시던 순간, 멀리 구름 사이로 가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나는 어떤 희망보다는, 앞으로 내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분명한 예감이 들었고, 그래서 미어지는 가슴을 틀어막으며 허겁지겁 산을 타고 내려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내가 지금껏 썼던 것들, 부끄러운 내 삶의 흔적들을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비웃었을, 그리고 공모전의 심사위원들도 보고 혀를 끌끌 찼을, 제대로 나열되지 못한 문장의 집합체들, 눈과 코가 뒤바뀌어 있는, 팔과 다리가 거꾸로 달린 괴생명체, 반드시 인멸하고 도주해야만 하는 내 삶의 증거들,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나는 울고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울고 있었다면 나는 재기를 꿈꿨을 것이다. 웃고 있는 것인지, 숨을 헐떡이는 것인지,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는 산을 내려왔고 그러기에 나는 더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불이 꺼진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방에는 노트북 화면의 불빛이 전부였고, 커튼에 가려진 창으로는 빛이 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어둠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조금 더 일찍, 며칠만 일찍 그를 만났다면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결국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들은 모두 언제나 때늦은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가서, 몇 년 전, 또는 십 년 전에 말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늘 때늦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껏 해봐야 상투적인, 아무런 힘도 되지 않을, 자기 위안의 말들을 응원이랍시고 떠들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욕실에서 천천히, 따뜻한 물에 몸을 적시며 샤워를 한다. 천천히 몸 구석구석을 씻은 다음, 아직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거실을 지나쳐 방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물기를 닦고 머리를 말린 후, 옷장 안에서 검은색 정장을 꺼내 입었다. 거울 속 나는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저 다시, 원래의 머리 색깔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머리를 빗고, 너무 티 나지 않도록 옅게 화장한 얼굴로 나는 집을 나선다.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가,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한다. 그러나 택시가 잡히지 않아 한참을 차가운 길거리에서 발을 동동거린다. 어쩔 수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 5분 정도 더 기다린 뒤에 시내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갔다.


빈소 입구에는 침울한 얼굴로 조문객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옆으로 요즘 추세인 디지털 화면 위에 고인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머리, 단정하게 입은 검은색 정장, 어색하지만 최대한 조신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얼굴. 그것은 이력서에 넣기 위해 찍은 사진이었다.


빈소에 이르면 똑같은 영정 사진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쪽에 앉아있는, 조금은 지쳐 보이는 상주. 고인의 아버지와 남동생. 그 모습을 보니, 그 축 처진 중년 남자의 어깨를 보니, 나는 어제의 선택에 잠시 후회가 들었다.


식장 안은 한산했다. 고인의 생전 친구들 모습이 보였고, 그들은 모두 조용히 눈물을 삼키며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아, 여기에 와 있었구나. 안 그래도 한 번 만나고 싶어 그곳에 갔었는데. 여기에 와 있는다고 못 봤던 것이었구나.


은수는 빈소 안에 마련된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도 나처럼, 누군가 남겨놓은 접시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저 소주잔에 술을 따라 목을 축이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글쎄, 어쩌면 미끄러지듯 날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 앉았다. 그는 내게 말했다.


어제 우연히 네 부고를 받았어. 그래서 마지막으로 너를 보려고 여기에 왔는데 네가 없더라. 오늘 혹시나 하고 여기에 와본 건데, 이렇게 여기서 만나는구나.


그는 해맑은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말했다.


나도 네 부고 듣고 네 빈소로 찾아갔었어. 여기에 있는 줄도 모르고. 혹시나 마주칠까 싶어서 갔었는데, 네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어.


그는 내 말에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이렇게 보니까 좋네.


우리는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를 만나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딱히 무슨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보며 무척 환한 얼굴을 지어 보였고, 우리는 그저 술을 나눠 먹으며 잠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는 술을 한 잔 더 마시고는 내게 말했다.


이젠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안 그래도 이제 가보려고 했거든.


나는 그가 따라준 술을 마시며 대답했다.


그래. 너도 이제 다른 사람들과 작별을 해야 할 때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악수를 건넸다. 그 역시 나처럼 검은색의 정장 차림이었다.


이만 가볼게.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그 말을 하고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가 아니라, 그는 닫혀있는 창문 틈새를, 겨울의 차가운 공기처럼 통과하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이제 더 이상 버스나 택시를 탈 필요 없이, 바람처럼 부드럽게 흘러가며, 추위도 느끼지 않고 그가 마지막으로 있어야 할 곳까지 날아갈 것이다. 나는 그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다른 가능성은 없었던 것일까?


관 속에 누워 있는 나는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깨끗하게 닦인 몸은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다행이네, 삼베는 좀 촌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동생이 가족들을 설득한 것일까? 택배 기사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그랬는데. 정작 동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다. 난 또 이렇게 때늦은 말을 그에게 건네며, 내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잘 지내고 있지? 힘들지는 않니? 힘들면 나한테 전화해. 내가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게.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작은 입자들의 움직임은 확정이 되어 있지 않고, 수많은 가능성들이 공간 안에 중첩되어 나타난다고. 그래서 우리가 거실에 앉아 있을 때면, 수많은 내가 중첩되어,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상자를 열어보았더니 은수가 죽어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상자 안에는 살아있는 은수가 있고, 결혼을 한 은수도 있고, 멀리 화성까지 날아가 화성을 개척하는 은수도 있고, 지금처럼 죽어있는 은수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많은 과학자들이 그 이론을 믿는다고 한다. 우리는 그중 한 가지 가능성만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라디오 주파수 같다고 한다. 우리와 결이 맞는 가능성만을 우리는 보게 된다고. 우리에게도 주파수 같은 것이 있었다면, 나는 다른 모습의 은수를 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 또한 다른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적어도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일까?


물론 이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알기로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이 이야기를 극히 혐오했을 것이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야박한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그의 이야기는 무시하고,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상자 속에 있는 나와 은수.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 만화를 그리고 있는 은수. 어쩌면 웹툰 작가로 성공했을지도 몰라. 아니, 성공은 아니어도 웃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모르지. 지금처럼 배달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집에 가서는 죽은 듯 잠을 자다가, 잠에서 깨면 물을 한 잔 마시고, 스트레칭도 한 다음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예전 중학생 때처럼. 아마 우리는 어느 한적한, 따뜻한 분위기의 카페에 앉아 있을 거다. 은수 옆에서 나는 무슨 의미인지 모를 문장들을 토해내며 뭔가를 쓰고 있다. 그러다 피곤할 즈음 은수가 그린 그림을 보며 내가 말을 건넨다. 야, 네가 그린 그 캐릭터, 정말 못생겼다. 사람이야 고양이야? 아니 무슨 곰 같기도 하네? 내 말에 은수는 짜증을 내며, 이건 늑대 수인이야,라고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피식 웃음을 웃으며, 다시 무슨 말인지 모를 말들을 종이 위에 쏟아내겠지.


왜 우리 눈에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아주 잠깐이라도, 어쩌면 꿈속에라도, 그 주파수가 맞춰져 있었다면, 그래서 우리가 스쳐 지나가듯 잠깐이라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세상은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원리로 굴러가는지도 알지 못하니까.


관이 닫히고,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이제 세상은 남겨진 자들의 몫. 나는 내 몫을 모두 살았다. 내게 주어진 확률을 모두 실현했다.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남겨져 있지 않을지, 나의 가능성은 정말 이곳에서 끝이 나는 것일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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