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테크 R&D에서 정부 역할 강화

by 임 윤

혁신 역량 높이기 위해서는 과감한 R&D 투자 필요


한 나라의 과학 기술 역량은 국가 경제와 안보는 물론 국가의 대외적인 위상까지 좌우한다. 따라서 미국, 중국 등 세계 주요국들은 과학 기술 역량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필요할 경우, 첨단 기술 R&D에 국가 예산을 과감히 투입해 왔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957년 10월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자 미국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당시 위성 성능으로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소련이 자신들 앞마당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러한 ‘스푸트니크 쇼크(Sputnik Shock)’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항공우주국(NASA) 설립 등 우주 항공 분야의 R&D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연방 정부 예산에서 R&D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9~12%까지 치솟았다. 2022년 R&D 예산 비율이 3%임을 고려하면 유례없이 많은 국가 재정을 R&D에 쏟아부은 것이다. 당시 미국 정부의 R&D 투자액은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전체 R&D 투자액보다 많았다. 이처럼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R&D 예산 투입은 ‘스푸트니크 쇼크’ 극복은 물론 미국의 기술 패권을 공고히 하고 스타트업 생태계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중국이 서방 견제에도 기술 자립도를 높이고 기술 선진국을 따라잡는 ‘기술굴기(技術崛起)’에서 성과를 내는 것도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R&D 투자 때문이다. 최근 중국이 D램(DRAM), 낸드플래시(NAND Flash) 메모리는 물론 HBM(High 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 생산에 성공한 것은 중국 정부가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이른바 ‘대기금(大基金, Big Fund)’을 조성해 반도체 R&D에 대대적으로 투자한 결과이다. 대기금은 중국 정부가 주도하고 국유은행, 국유기업이 참여하는 펀드로 2014년 1기 1,387억 위안(약 26.7조 원), 2019년 2기 2,041억 위안(약 38조 원)에 이어 2024년에는 3기가 3,440억 위안(약 64.6조 원) 규모로 조성되었다. 1~3차 대기금을 합해 약 129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반도체 기술 개발에 투입하는 것이다. 대기금 운영 과정에서 부실 투자, 사적 이익 추구 등 문제점들이 많이 드러났지만, 대기금 투자 때문에 중국이 ‘반도체 굴기’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금 투입의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효과성은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의 기술 역량을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R&D 자금 투입이 필요하다. 이는 아무리 큰 대기업일지라도 일개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R&D 예산 투입이 필요하다. 앞에서 살펴본 ‘EU 경쟁력의 미래(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보고서도 EU가 미국, 중국에 비해 뒤떨어진 혁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 및 탈탄소 전환 등에 매년 EU GDP의 4.4~4.7% 수준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이는 전후 마샬 플랜(Marshall Plan, 유럽부흥계획) 하에 서유럽 및 북유럽 국가에 투입된 자금 규모가 각국 GDP의 1~2%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유례없이 큰 규모이다.



국가 R&D에서 정부의 역할 강화


산업화 초기 한국에서도 정부의 과감한 R&D 투자가 국가의 혁신 역량 구축을 주도했다. 대표적 사례가 ‘1 가구 1 전화 시대’의 도래를 앞당긴 ‘전전자교환기(TDX, Time Division Exchange)’ 국산화였다. 한국은 1982년부터 5년간 연인원 1,300여 명과 약 240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1986년 세계에서 열 번째로 디지털 전자교환기를 독자 개발했다. 당시 개발의 핵심 주체였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연간 예산이 30억 원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240억 원이 투입된 TDX 개발은 ‘단군 이래 최대 R&D 프로젝트’로 불렸다[1]. 그때 선진국만 보유하고 있던 TDX를 한국이 독자 개발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세계 통신 시장의 변방이었던 한국은 과감한 R&D 투자로 TDX 국산화에 성공함으로써 통신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처럼 획기적 혁신과 도약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어려운 과제에 과감히 도전해야만 창출될 수 있다.

TDX 개발이 추진되었던 1980년대 초반까지 정부 및 공공 부문은 한국의 전체 R&D 투자의 50~65%를 담당했다. 국가적으로 혁신 역량이 미흡했던 산업화 초기에는 정부 및 공공 부문이 혁신 역량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기업 등 민간 부문이 전체 R&D 투자의 75% 이상을 담당하는 핵심 주체가 되었다. 하지만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맞아 국가 전체 R&D에서 정부의 역할 강화가 다시 요구되고 있다. 기술 패러다임 전환기에는 선제적이고 과감한 R&D 투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림 5.9.1.png

자료: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

(그림 5.9.1) 한국의 R&D 투자 규모(GDP 대비 비율) 추이


차세대 기술 및 미래 산업의 주도권 확보 경쟁은 개별 기업 차원을 뛰어넘은 국가적 차원의 생존 경쟁이다. 더구나 세계화(Globalization) 기조가 후퇴하고 전 세계적으로 보호주의가 득세하고 있어 정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한국이 차세대 기술 패러다임인 딥테크에서도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첫째, 인공지능, 로봇, 양자컴퓨터, 우주항공, 바이오 등 딥테크 분야의 정부 R&D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이 되는 딥테크는 미래 성장동력으로서 잠재력이 클 뿐만 아니라 고령화, 생산연령인구 감소 등 사회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딥테크는 R&D 성공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민간의 투자 확대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정부가 기초 영역의 R&D 투자를 강화해 불확실성을 경감시킴으로써 민간의 R&D 투자 확대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둘째, 딥테크 분야의 시장 형성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가 초기 수요자 및 구매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양자컴퓨터, 우주항공 등의 분야는 민간 수요가 아직 크지 않으므로 정부가 복지, 재난, 안보 등 공공 목적의 수요를 발굴함으로써 초기 시장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셋째, 국가 전체 R&D 투자의 75% 이상을 담당하는 민간이 R&D 투자를 확대할 수 있도록 세제 혜택 등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 세계 각국은 자국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보조금 지급 등 다양한 정책적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첨단 기술의 주도권 확보라는 국가 전략 차원에서 기업의 R&D 활동을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기술 패더다임의 대전환기이다. 정보기술(IT)에 의한 3차 산업혁명에 이어 인공지능, 로봇 등 이른바 딥테크가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향후 한국경제의 명운은 기술 패러다임 전환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국가적 혁신 역량을 결집함으로써 딥테크 분야의 주도권을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할 것이다.





< 참고 자료 >

[1] 한국전자통신연구원(2019). 한국의 현재가 세상의 미래가 되게 하라. ETRI Webzine, vol.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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