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가진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by 임 윤

관개와 치수 기술로 앞서 나갔던 4대 문명


약 260만 년 전 초기 인류는 동물의 골수나 뇌를 먹기 위해 동물의 뼈를 으깰 수 있는 돌로 된 도구를 만들어 냈다. 돌로 다른 돌의 한쪽 끝을 내리쳐 날카로운 단면을 가진 석기를 제작했던 것인데, 이러한 석기의 형태는 100만 년 이상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1]. 석기의 개발로 초기 인류는 지방과 단백질이 풍부한 육류 섭취가 쉬워져 칼로리를 많이 소모하는 뇌가 더욱 발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좀 더 다듬어지고 개선된 석기들이 등장했지만 대체로 구석기시대 석기 제작 기술은 수만 년에서 수십만 년에 걸쳐 매우 느리게 진보했다.


(그림 1.2.1) 한쪽은 날카롭게 다른 한쪽은 쥐기 쉽게 만든 ‘올도안 찍개[2]'


현생 인류는 30만~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해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약 13만~11만 년 전 기후 변화로 가뭄과 추위가 닥치자 도전적인 무리들이 아프리카 탈출을 감행해 유럽과 아시아는 물론 미 대륙과 호주까지 퍼져나갔다.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지구상에서 유전적 동질성을 유지한 채 열대에서 온대, 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식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종은 인간밖에 없다. 더운 아프리카를 떠난 인류는 불과 도구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불을 피우고 동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음으로써 추운 지방에서도 적응해 살 수 있었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인류가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생물종임을 입증한 것이다.

대략 1만 년 전쯤 현생 인류는 북극, 남극, 태평양의 일부 섬을 제외한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른 집단들이 없는 무주공산의 수렵채집지를 찾기 어려워졌고, 기존 수렵채집지도 혼잡해지면서 집단 간 충돌이 생겨났다. 수렵채집지를 찾아 이동하는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인류의 일부 집단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했다. 그들이 찾아낸 해법은 야생에서 자라던 식용 식물을 재배하고 야생의 동물들을 잡아 사육하는 것이었다. 수렵채집 경제에서 생산 경제로의 전환을 이뤄낸 신석기 농업혁명의 시작이었다.

특히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인더스강, 황허 유역에 정착한 집단들의 성취가 탁월했다. 그들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물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을 관리하고 다스리기 위해 그들은 농사지을 땅에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를 만들고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을 쌓고 가뭄에 대비한 저수지도 건설했다. 또한 그들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물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퍼 올리는 샤두프(shaduf)라는 도구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단순한 형태이지만 인류 최초의 펌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개와 치수 기술 때문에 이들 지역의 농업 생산력은 다른 지역들보다 높아 많은 잉여 식량이 생산됐다[3]. 잉여 식량이 생산되면서 생산 활동이 아닌 정치, 종교, 군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로써 인류 문명이 이들 지역에서 처음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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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2) 샤두프를 이용해 나일강의 물을 퍼 올리는 모습[4]


하지만 인류 발전의 다음 전기가 될 청동기, 철기 혁신은 이들 문명의 경계 밖에서 일어났다. 이들 문명도 청동과 철을 사용했지만, 지배층의 소장품이나 장식품에 쓰는 수준이었고 농기구 등 실용적 도구로 활용하려는 니즈는 크지 않았다. 진화생물학자 요세프 라이히홀프는 “진화는 결핍에서 온다. 이것이 중심 원리다. 풍족함은 개선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무언가가 부족할 때 비로소 대안이 제시되고 이전보다 더 효율적인 것을 선택하게 된다[5]"고 했다. 이들 지역은 상대적으로 풍족해서 다른 지역을 약탈하기 위한 무기 제작 기술을 혁신할 필요가 없었고 토질 역시 비옥하고 부드러워 금속제 농기구를 쓰지 않아도 됐다. 더구나 비옥한 강 유역은 농업에 적합하지만, 금속제 도구를 만들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강 유역은 철광석과 같은 광물이 희귀하고 용광로의 연료로 쓸 나무가 많지 않았다. 따라서 금속제 도구가 이들 문명의 경계 밖인 숲이나 산악 지역에서 처음 출현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철기 기술로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


기원전 3500~30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와 인접한 아나톨리아 등지에서 청동기가 처음 제작됐다. 청동은 녹는점이 950℃로 1500℃인 철보다 낮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다루기 쉬웠다. 하지만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은 주석 광석이 희귀해 대량 생산이 어려웠다. 반면 철은 철광석이 흔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철의 녹는점까지 용광로의 온도를 올릴 수 없었다. 마침내 기원전 2000년께 철기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철기의 품질이 청동기보다 나빴지만, 용광로에 공기를 불어넣어 온도를 올릴 수 있는 풀무[6]가 개발되고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서는 청동기의 품질을 능가하게 되었다. 더구나 대량 생산으로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나무와 석기를 사용하던 일반 농부들도 철제 농기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석기시대를 끝낸 것은 청동기가 아니라 철기였다.

철기 기술은 아나톨리아에서 유럽,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지로 확산되었고, 로마에서 철기 문명으로 꽃피워졌다. 원래 로마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중부는 철광석이 풍부한 지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마는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하면서 매장량이 풍부한 철광석 광산과 선진 철기 기술을 손에 넣었다. 특히 품질 좋은 강철 생산지로 유명한 이베리아 반도 중앙의 톨레도를 차지하면서 톨레도산 강철 양날검은 로마 군단병의 주력 무기인 글라디우스[7]의 원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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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3) 로마 군단병의 주력 무기인 글라디우스[8]


당시 로마가 가진 철기 기술은 유럽 최고 수준이었다. 담금질 등을 통해 만들어진 글라디우스는 칼날의 강도가 세고 예리해, 무게가 1㎏ 정도인 글라디우스로 찌르거나 내리쳤을 때 적의 병사가 받는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로마는 철을 대량으로 생산해 군단병을 무장시켰다. 4,500~5,000명 규모의 군단을 투구, 갑옷, 창, 검 등 철제 무기로 무장하는데 35톤 정도의 철이 필요했는데, 로마 군단은 철제 무기를 만들고 관리하는 예하 부대를 별도로 운영했으며, 무기 제작 및 수리 등을 위해 민간의 대장장이들과 계약을 맺기도 했다[9].

로마는 우수한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정복 전쟁을 벌여 북으로는 브리타니아, 남으로는 이집트, 동으로는 시리아, 서로는 히스파니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군대를 유지하고 정복 전쟁을 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됐지만,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 및 많은 전리품과 노예는 로마에 그보다 더한 경제적 이익과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제국이 팽창하고 경계가 넓어질수록 이민족 침입이 잦아지고 반란도 빈번해져 정복 전쟁을 끝없이 지속할 수는 없었다. 제국의 성공 방정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정복 전쟁의 중단으로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며 로마 경제에 필수불가결했던 노예의 공급이 부족해졌고, 점령지 영토 및 전리품 등으로 충당했던 군비가 제국의 재정을 압박했다.

결국 로마는 자신의 강점이었던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해 몰락했다. 정복 전쟁의 중단으로 전리품 등을 통한 군비 조달이 불가능해지자 로마의 군사력은 반란과 외침에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었다. 로마의 경제력이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로마 경제는 노예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했다. 대농장을 경작하고 도로 등 인프라를 건설하는 것은 노예의 몫이었고 귀족 등 상류층은 생산성 개선, 기술 혁신 등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정복 전쟁의 중단으로 노예 공급이 줄어들자 로마 경제의 근간이 흔들린 것은 당연했다. 이는 군사력 약화와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서기 410년 제국은 동∙서로마로 분열되었고,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은 기술 발전의 암흑기인 중세에 돌입하였다. 중세는 아메리카의 발견 등으로 과학적 세계관이 싹트기 전까지 대략 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원양 항해술로 대항해 시대를 개척했던 포르투갈


15세기까지 유럽인들은 원양 항해를 시도하지 못했다. 배의 형태와 규모가 원양 항해에 적합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원양 항해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망망대해인 원양에서는 배의 위치와 방위를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북동 무역풍이 먼바다 쪽으로 불었기 때문에 더더욱 먼바다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자칫 먼바다로 나갔다가는 바람을 거슬러 되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13세기 후반 나침반이 유럽에 확산되면서 망망대해에서도 방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대서양 먼바다로 나가도 되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아냈다. 북반구의 저위도에서는 무역풍이 대서양 먼바다 쪽으로 불지만, 고위도에서는 편서풍이 유럽 대륙 쪽으로 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원양 항해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없어지면서 배는 자연스럽게 원양 항해에 적합한 범선으로 변화해 갔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올 때는 갔던 항로가 아닌 대서양 먼바다로 나가서 편서풍을 타고 되돌아오는 ‘보우타 두 마르(Volta do Mar)[10]’라는 원양 항해술을 개발했다. 먼바다를 돌아서 오느라 항로는 길어졌지만, 당시는 바람의 힘으로 항해하던 범선의 시대였으므로 항해 시간은 오히려 단축됐다. 하지만 당시의 시각에서 본다면 두려움의 대상인 먼바다로, 그것도 목적지 포르투갈 방향이 아닌 대서양 한가운데로 항해해 가는 것은 기존 사고의 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굉장한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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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4) 대서양 먼바다를 돌아가는 보우타 두 마르 항해술[11]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에 있는 유럽의 변방으로, 당시 인구가 100만 명 정도에 불과한[12] 소국이었다. 이웃 스페인에 막혀 대륙 진출이 어려웠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인도와의 후추 무역에 관심이 많았다. 남인도 서해안이 원산지인 후추는 인도에서 아랍을 거쳐 베네치아로 운송된 후 유럽 각지로 팔려 나갔는데, 인도에서 유럽으로 오는 과정에서 후추 가격은 100~150배 가까이 뛰었다. 이처럼 엄청난 수익성에 주목한 포르투갈은 인도에서 후추를 직수입하겠다는 담대한 목표를 세우고 인도 항로 개척에 나섰다. 마침내 1499년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유럽 최초로 아프리카 남쪽 끝을 돌아가는 인도 항로 개척에 성공했다. 새로운 항로 개척으로 포르투갈은 나중에 네덜란드가 해상 무역에 참여하기 전까지 100여 년 동안 아시아 향신료 무역을 주도하며 많은 수익을 올렸다.

포르투갈은 유럽 각국이 위험과 두려움 때문에 원양 항해를 주저하는 사이, 아시아 해상 무역에 과감히 뛰어든 이른바 ‘첫 번째 펭귄[13]’이었다. 비록 인구 100만이 조금 넘는 소국이라는 한계 때문에 후에 네덜란드, 영국 등 후발 국가들에게 밀려났지만, 포르투갈은 원양 항해술을 개발해 대항해 시대를 개막하고 육상에서 해상으로 세계 무역의 판도를 바꾼 유럽 최초의 해양 제국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보다 앞섰던 정화의 인도∙아프리카 원정


명나라의 아랍계 제독인 정화(鄭和)는 1405~1433년 7차에 걸쳐 인도∙아프리카 원정을 했다. 1차 원정의 출발 연도 기준으로 바스쿠 다 가마보다 90여 년 앞섰고, 원정단의 규모와 함정의 크기도 훨씬 컸다. 정화가 바스쿠 다 가마에 앞서 인도의 캘리컷, 아프리카의 모잠비크, 말린디 등을 먼저 방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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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정화의 선박 수, 기함 크기는 기록을 토대로 현대 전문가들이 추정한 것임.

자료: 나무위키, 위키백과 등

(표 1.2.1) 원정대 규모 비교: 정화 vs. 바스쿠 다 가마


정화의 원정은 조공국을 늘리고 동남아와 인도양 주변국에 명나라의 위세를 알려 영향력을 높이려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6차 원정 이후 원정을 명령하고 후원했던 영락제가 죽고, 7차 원정 도중 정화도 병사하자 원정의 열기는 식었다. 결국 명나라는 원정을 중단하고 해군마저 해산시켰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양 진출보다 북방 국경 방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업혁명을 선도하며 산업강국으로 부상한 영국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발생한 산업혁명은 19세기 중∙후반까지 서유럽, 미국 등으로 확산되며 인류 문명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촉발하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할 제반 여건들이 무르익고 있었다.

첫째, 산업과 사회 전반에 기술 혁신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해양 패권 유지를 위한 선박 건조가 급증하면서 목재가 부족해지자 나무를 대신해 연료로 쓸 석탄의 채굴을 늘려야 했지만, 광산 갱도에 고인 지하수를 퍼내는 게 골칫거리였다. 또한 가볍고 따뜻한 면직물의 인기가 치솟았지만, 면사를 만드는 작업은 노동집약적이어서 면사 공급은 늘 부족했다.

둘째,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명가와 사업가들이 등장했다. 제임스 와트처럼 개인 공작소를 차려 새로운 기구를 제작하는 발명가들이 생겨 났으며, 매튜 볼턴처럼 수공업 생산 단계를 넘어선 사업가들도 있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같이 노력했다는 점이다. 1765~1813년 영국 버밍햄에 있었던 사교 모임 ‘루나 소사이어티(Lunar Society)에는 매튜 볼턴(철물 생산업자), 에라스무스 다윈(박물학자), 제임스 와트(과학기구 제작자), 조사이어 웨지우드(도자기 생산업자), 조셉 프리스틀리(화학자) 등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멤버로 참여했다.

셋째, 발명가의 권리를 보호할 특허 제도가 정립되고, 농민, 수공업자도 담보를 제공하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금융시장이 형성되는 등 혁신을 위한 인프라가 정비되었다. 누구나 아이디어와 기술을 갖고 있으면 발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이는 영국인들에게 기업가정신을 고취시켰다.

문제와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었고, 문제를 해결했을 때 배타적 특허권이라는 인센티브가 주어졌기 때문에 기술 혁신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면섬유에서 면사를 뽑아내는 방적기가 발명되면서 영국의 면직물 생산이 급증했다. 처음에는 수력 방적기여서 강가에 공장을 세웠으나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어디에나 공장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풍력, 수력을 대신해 증기기관이 함선이나 기계를 움직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증기기관은 석탄 광산 갱도의 지하수를 효율적으로 퍼 올려 석탄 생산량을 증가시켰고, 석탄으로 만든 코크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공법이 개발되면서 품질 좋은 철 생산도 급증했다. 영국의 철 생산량은 1720년 2.5만 톤에서 1860년에는 400만 톤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전 세계 철 생산량의 절반을 상회하는 것이었다[14]. 철 생산이 급증하면서 철도, 철교 등 철로 된 인프라가 구축되어 교통과 물류 혁신을 일으켰고, 이는 다시 산업화를 가속화시켰다.

산업혁명으로 영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화된 국가가 되었으며, 당시 영국의 섬유, 조선, 기계, 철강 등의 산업 경쟁력은 세계 최고였다. 1851년 영국은 전 세계 원양 선박과 철도 총연장의 절반을 갖고 있었고, 전 세계 면직물, 석탄, 철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15].

하지만 영국 산업의 경쟁 우위가 지속된 기간은 1세기 남짓이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전기가 새로운 동력원으로 부상하고 석유가 석탄의 자리를 대신하는 2차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은 미국, 독일에 뒤쳐졌다. 무엇보다 산업혁명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혁신 문화와 기업가정신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의 중심도시인 맨체스터의 부르주아들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후에는 정치 등 다른 분야에 관심이 더 많았으며,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젊은이들 역시 기술이나 사업보다는 여유롭고 안락한 삶을 원했다[16]. 아이러니하게도 산업혁명이 가져온 풍족함이 산업혁명을 촉발시켰던 혁신 역량과 기업가정신을 약화시킨 것이었다.



2, 3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며 기술 패권을 차지한 미국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유럽 대륙의 프랑스, 독일 등과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들 국가는 기술자를 파견하고 영국 기술자의 이민을 추진하는 등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국가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새로운 발견과 혁신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고 사업가들은 영국 사업가들의 벤치마킹을 통해 자신들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후발국 중에서 처음으로 미국이 경제 규모에서 영국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은 새로운 분야의 기술 혁신을 통해 2차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그것은 증기와 석탄이 아닌 전기와 석유를 동력원으로 한 혁신이었다.

1895년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대규모 근대식 수력발전을 시작하면서 미국은 본격적인 전기 문명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생산된 전기는 뉴욕시를 밝히고 지하철을 움직였다. 전기가 각 가정에 보급되자 TV, 세탁기, 냉장고 등 세상에 없던 전자 제품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또한 1901년 텍사스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고, 1913년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 생산 방식을 도입해 ‘모델 T’를 대량 생산하면서 자동차는 미국에서 필수품이 되었다. 2차 산업혁명은 미국이 전기,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분야의 기술 혁신과 혁신적 생산 방식의 도입을 통해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를 열었던 것을 말한다.

미국은 2차 산업혁명에 이어 정보화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3차 산업혁명도 주도하였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기간에 탄도 계산 등을 위해 초보적 수준의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43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이 개발한 에니악(ENIAC)이었는데, 진공관 1만 7000개 이상이 사용됐으며 무게가 30톤이었다. 이 시기 컴퓨터는 주로 군사용으로 쓰였으며, 민간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비싸고 복잡했다. 드디어 1964년 IBM이 ‘시스템 360’을 출시하면서 기업들의 컴퓨터 도입이 본격화되었다. IBM은 시스템 360 개발에 사운을 걸었는데, 총 50억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되었다. 시스템 360은 다수 사용자가 동시에 접속해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대형 컴퓨터로 은행, 항공사 등 기업은 물론 조사∙통계 관련 정부기관에서도 많이 도입하였다. 개인용 컴퓨터는 1977년 ‘애플Ⅱ’, 1981년 ‘IBM PC’가 출시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전 세계 컴퓨터를 연결하는 인터넷은 1969년 미국의 4개 대학의 컴퓨터를 연결했던 아파넷(ARPANET)에서 진화, 발전한 것이다. 미국은 3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후발국의 추격으로 컴퓨터, 통신기기 등 하드웨어 경쟁력은 많이 약화됐으나, 핵심 반도체 및 소프트웨어, 서비스 분야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 우위를 갖고 있다.

이처럼 4대 문명에서 로마제국, 포르투갈, 영국, 미국 등에 이르기까지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추격하고 세계 경제의 새로운 주도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동력은 기술 혁신이었다. 그들은 남들과 같은 분야에서 더 열심히 하기보다는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혁신을 이룩함으로써 새로운 주도국으로 부상했다. 반면 한 국가가 혁신 역량을 상실할 때 그 국가는 정체의 늪에 빠졌다.




< 참고 자료 >


[1] 260만~140만 년 전 초기 인류가 사용했던 ‘올도안(Oldowan) 석기’를 말한다. ‘올도안’이란 이름은 석기가 처음 발견된 탄자니아 올두바이 계곡에서 따왔다.

[2] Wikipedia. Oldowan(https://en.wikipedia.org/wiki/Oldowan).

[3] 정착 생활과 잉여 식량 증가는 인구 급증으로 이어졌다. 또한 계급 사회가 형성되면서 잉여 생산량은 상류 계급의 차지가 되었다. 즉 농업혁명으로 식량 생산은 증가했지만, 인구 급증과 상류 계급의 착취로 보통 농부들의 생활 여건은 그 이전 수렵채집인 시절보다 더 열악해졌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라고 말했다.

[4] Wikimedia commons. File:Shaduf2.jpeg(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haduf2.jpeg).

[5] 마티아스 호르크스. <테크놀로지의 종말>. 배명자 역. (서울: 21세기북스, 2009). p. 103.

[6] 아궁이에 장작이 잘 타게 하려면 부채질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용광로의 화력을 높이려면 풀무로 공기를 집어넣어 연소가 잘 되도록 해야 한다. 풀무가 개발되지 않았던 철기 시대 초기 아나톨리아에서는 풀무 대신 푄 현상으로 발생하는 강풍을 이용했다는 설이 있다.

[7] 원래 글라디우스는 ‘검’을 뜻하는 라틴어 일반 명사이다. 처음에는 톨레도산 강철로 만들어져서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Gladius Hispaniensis), 즉 ‘스페인산 검’으로 불렸다.

[8] Wikipedia. Gladius(https://en.wikipedia.org/wiki/Gladius).

[9] 홍완식. <소재, 인류와 만나다>. (서울: 삼성경제연구소, 2021). p. 226.

[10] 우리말로는 ‘바다로부터 귀환’ 혹은 ‘바다로부터 복귀’라는 의미이다.

[11] Wikipedia. Volta do mar(https://en.wikipedia.org/wiki/Volta_do_mar).

[12] 2022년 기준 포르투갈 인구는 1,041만 명이다.

[13] 펭귄 무리는 바다표범과 같은 천적 때문에 바다에 뛰어들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그중 한 마리가 뛰어들면 나머지 펭귄들도 잇따라 바다로 뛰어든다. ‘첫 번째 펭귄’은 위험을 무릅쓰고 맨 처음 도전함으로써 나머지의 참여를 촉발하는 선구자를 의미한다.

[14] 다니엘 R. 헤드릭. <테크놀로지>. 김영태 역. (서울: 다른세상, 2016). p. 165.

[15] 맥스 부트. <전쟁이 만든 신세계>. 송대범, 한대영 역. (서울: 플래닛미디어, 2007). p. 238.

[16] 마티아스 호르크스. <테크놀로지의 종말>. 배명자 역. (서울: 21세기북스, 2009). p.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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