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혁신 역량

by 임 윤

포르투갈의 원양 탐험으로 시작된 대항해 시대는 지리적 발견의 시대였고, 이는 곧 식민지 쟁탈의 시대였다. 당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은 대포로 무장한 함선으로 새로운 식민지를 찾아 세계의 대양을 누볐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도 앞다투어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식민지의 자원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한 제품을 판매할 시장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세계는 제국주의 국가와 그들의 식민지로 양분되었다.

구한말 근대화에 뒤쳐졌던 대한제국은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독립국으로서의 생존을 모색했으나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당시 러일전쟁을 묘사한 서양 언론의 삽화는 약소국 대한제국이 처했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프랑스 화보신문 ‘르 프티 파리지엥(Le Petit Parisien)’의 삽화는 한반도 지도에 한 발을 걸친 일본이 러시아와 맞서는 상황을[1], 영국 잡지 ‘펀치(Punch)’의 삽화는 러시아와 일본에 의해 밧줄로 조임을 당하는 힘없는 조선의 노인을 그리고 있다.

이제 식민지 시장과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혁신적 제품과 서비스로 세계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시대이다. 군대와 전함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기술력은 제품∙서비스의 글로벌 경쟁력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경제력, 군사력, 외교력 등 모든 국가 역량의 바탕이 된다.


그림 1.5.1.png

(그림 1.5.1) 르 프티 파리지엥(좌)과 펀치(우)의 러일전쟁 관련 삽화


구한말 대한제국의 국력[2]은 미약하기 그지없었으나, 지금 대한민국의 국력은 세계 경제 선도국 그룹인 G7의 지위에 상응할 정도로 신장되었다[3]. 그 바탕에는 기술력과 혁신 역량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GDP 대비 R&D 투자 비율은 2000년 2.1%에서 2021년에는 G7 평균(2.6%)의 2배 가까이 되는 4.9%(세계 2위

[4])로 꾸준히 증가했다. 하지만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다. 주력 산업에서 중국과의 격차가 갈수록 축소되고, 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는 각국의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더구나 미∙중 패권 경쟁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고, 보호무역주의 파고도 높아지고 있다.

이 모든 난관을 돌파할 무기는 역시 기술력과 혁신 역량이다.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은 한번 뒤쳐지면 추격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기술력과 혁신 역량을 꾸준히 강화해야 한다. 현실 안주는 정체와 퇴보를 의미한다. 지속적인 기술 혁신을 통해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을 장악하는 것만이 한국경제의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는 대만을 지켜줄 것인가?


대만에는 2023년 4분기 기준 세계 파운드리 1위, 3위 기업인 TSMC, UMC가 있어 세계 시스템반도체의 67%를 생산한다. 따라서 대만의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발생할 경우, 시스템반도체를 사용하는 IT, 전자, 자동차, 항공우주, 국방 등 연관 산업에 연쇄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이런 대만 반도체 산업의 위상이 중국의 대만 침공을 억제하고, 침공을 받을 경우에는 미국 등 서방이 적극 개입할 것이라는 의미로 ‘실리콘 방패’라는 용어가 최근 많이 사용된다.

‘실리콘 방패’는 호주 출신 저널리스트인 크레이그 애디슨(Craig Addison)이 2001년 처음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 ‘실리콘 방패’가 의미한 것은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아니라 IT 제조업이었다. 1990년대 말 대만은 IT 제품 위탁 생산의 글로벌 허브였기 때문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국 IT 산업에 심대한 타격이 불가피했다. 1996년 대만 해협에 긴장이 고조됐을 때 미국은 베트남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해군력을 집결시켜 대만 방어 의지를 보여줬다. 크레이그 애디슨은 미국의 이런 무력시위가 실리콘밸리 중심의 자국 IT 산업을 보호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대만이 갖고 있는 ‘실리콘 방패’는 과거에는 IT 제조업***이었다가 지금은 반도체 산업인 셈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무엇이 될 것인가가 문제이다. 중국이 반도체 자립을 추진하면서 중국 파운드리 기업인 SMIC의 경쟁력이 상승하고 있고****, 미국, 독일, 일본 등도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어서 대만이 반도체 산업에서 현재와 같은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Craig Addison(2001). Silicon Shield: Taiwan’s protection against Chinese attack. Fusion Press.

** 애플 아이폰의 위탁 생산 업체로 유명한 폭스콘은 1974년 대만에서 설립됐다.

*** IT 제조업의 중심은 대만에서 중국으로 옮겨 갔다가 이제 다시 베트남, 인도로 옮겨 가는 추세에 있다.

**** SMIC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대만 UMC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다.





< 참고 자료 >


[1] 유럽이 보기에 러일전쟁은 거인과 소인의 대결이었다. 청나라는 경기장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 서양의 시각으로 본 당시의 동북아 정세가 압축적으로 그려져 있다.

[2]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국력은 면적, 인구, 자원 등 지리적 요소 외에 군사력, 외교력, 산업 생산량, 통상 규모 등이 종합되어 나타난다.

[3]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2024년 6월 보고서에서 G7을 한국, 호주를 포함해 G9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CSIS는 특히 한국이 “첨단 기술 공급망을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4] 이스라엘 5.6%, 한국 4.9%, 미국 3.5%, 스웨덴 3.3%, 일본 3.3% 순.

keyword
이전 04화전 세계가 사활을 건 4차 산업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