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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래 Jun 10. 2022

내 이름은 천사 엄마

에피소드 2-나는 엄마였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 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 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 이해인 <10월의 기도> 중     



 ‘잔소리는 곡선으로 애정 표현은 직선으로’

이 말은 상담전문가 오은영 박사가 한 말이다. 너무나 좋은 말이다.     


 우리 집에서는 나는 천사 엄마, 아빠는 무서운 아빠로 통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인천으로 이사하고 첫해였던 것 같다. 둘째 아들이 죽은 쥐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여서 동물을 좋아했다. 어느 날 둘째가 아파트 앞에서 햄스터를 사 왔다. 아빠가 알면 혼날 것 같아 우리 세 명이 비밀로 하고 작은아들 방 베란다에서 키우기로 하였다. 햄스터가 먹을 수 있도록 물통도 넣어주고 오이 등 채소도 사다가 조금씩 넣어주었다. 1주일 정도 별 탈 없이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빠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유가 베란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살피다가 햄스터를 발견한 거였다. 우리 세 명은 거실로 불려 나가서 무척 혼났다. 아빠만 쏙 빼고 비밀로 했다는 이유였다. 그 일 이후에 햄스터는 다시 햄스터 파는 분에게 돌려드렸다. 아이들이 무척 서운해하였지만 애완동물 키우기는 거기서 마무리하게 되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큰아들이 중학교 때 예고를 가기 위해 목동에 있는 화실로 매일 다니고 있었던 때다. 겨울마다 한 번씩 스키캠프에 갔었는데 인천으로 이사 오면서 아이들이 스키를 타러 가지 못해 모처럼 서울 문래동 YMCA에 예약하고 스키캠프에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큰아들이 아침에 방에서 나오다가 발을 문지방에 부딪히면서 발톱이 찢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날따라 눈도 오고 너무 좋았는데 스키캠프 가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발이 아프니까 당연히 집에서 쉬는 줄 알았는데 미술학원을 가겠다고 하였다. 난 참 기특하다고 생각하고 '이제 철이 들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눈까지 내렸는데 큰아들은 아픈 발로 학원에 갔다. 그런데 얼마 후 학원에 학원비를 내러 갔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그날 큰아들이 학원에 오지 않았다는 거다. 

 ‘어찌 된 일일까?’ 집에 와서 물어보니 목동에 있는 PC방에 갔다고 했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야단을 쳤는데 

 “엄마,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게요. 제발 아빠한테는 이야기하지 말아 주세요.”

 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이미 지난 일이고 이제 이야기해서 혼나게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라고 생각되어 이번만 용서해 줄 테니 앞으로 절대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약속을 하고 비밀을 지켜 주었다. 이 일은 큰아들이 장가간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한바탕 웃게 되었다.   

  

 세 번째 학교에 근무할 때 그 해에 4명이 임신을 하였었는데 큰아이가 모두 아들이었던 것도 신기했지만 둘째 모두 아들을 낳았다. 우린 ‘둘 두리’라고 모임 이름을 짓고 아이들을 데리고 소극장으로, 문화센터로, 공원으로 다니며 추억을 많이 쌓았다. 특히 혜화동에 있는 ‘바탕골소극장’에 연회원으로 가입하여 분기별로 연극도 보러 갔었다. 우린 돌아가며 생일 등 행사 때는 모여서 즐겁게 지냈다. 이 모임은 아이들 초등학교 때까지 계속되다가 학교를 옮기고 이사도 하면서 흩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소식은 전하지만 만나지는 못하고 있다.      


 어렸을 때 연극, 인형극 등을 관람해서인지 남자아이들인데도 뮤지컬 등을 좋아했다. 나는 가끔 아이들과 세종문화회관에서 ‘미녀와 야수’를, 오페라극장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하였다. 물론 이때도 아빤 함께 보지 않았다. 아빠는 주변에 있는 사우나 같은 데를 갔다가 끝나는 시간이 되면 데리러 왔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를 케어해 주는 것만으로 너무 고마웠다.     


 아들들을 키우려면 집에 무서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우리 집에서는 그 역할을 남편이 했기 때문에 그 덕분에 나는 아이들에게는 천사 엄마가 되었다. 내 성격상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소리를 지른다거나 싸운다거나 그러지 못하였는데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아이들은 무슨 말이든 나에게는 다했다. 내가 위험한 일이 아니면 대부분 다 들어주는 편이었기에 그렇게 한 것 같다. 지금은 남편이 아이들과 남자여서 잘 통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조금 걱정되는 일이나 아버지한테 야단 들을 것 같은 이야기는 나한테 먼저 하는데 지금은 나도

 “아버지께도 말씀드리고 의논하렴.”

 하고 아버지를 높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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