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의 고난
오 선장, 나의 선장이여(Oh, Captain, my captain).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월트 휘트먼의 시에서)
아빠는 한국에 돌아와서 한강 유람선의 선장님이 되었다.
그래서 남들은 돈을 내고 타는 유람선을 나는 때때로 놀러 가면 탈 수 있었고 아빠가 있는 조타실의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좀 더 감탄하고 “와~! 우와~!”하고 감동해주었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부끄러워서 조타실도 보는 둥 마는 둥 나오기 일쑤였다. 아빠 배의 친절한 언니들은 나랑 이야기해 주려고 하고 맛있는 것들을 가져다주려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손사래 치기 일수였다. 왜 그랬는지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기서 리액션만 잘했어도 아빠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더 많이 다녔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의 요령부족으로 그러지를 못했다.
우리는 새해를 유람선 위에서 맞는 것이 관례였다. 새해가 되는 날 자정에는 늘 유람선 위에서 불꽃을 볼 수 있었다. 아빠는 선장님이었으니 그 자리를 지키셔야 했고 우리는 가족이니 새해를 함께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돈을 주고 보는 것을 공짜로 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만이 많았다. 그런 곳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싫어했고(지금은 또 다르다. 성격은 변하는 것일까), 대학생이 되어서는 친구들 혹은 남자 친구와 보낼 수도 있는 시간을 뺏겼기 때문이다. 정말 그때의 나는 주어진 상황에 감사할 줄 몰랐다.
그런데 이 선장이라는 직업이 좋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늘 날씨에 신경을 써야 했다.
아빠에게 힘든 일이 일어났던 것은 비가 미친 듯이 내리던 날이었다.
"비가 와서 물이 많이 불었어. 가서 배를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그 길로 아빠는 출근을 하셨고 우리는 집에서 날씨 속보가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때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장마란 매 해 있었고 여태껏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해는 달랐다. 집에 걸려온 전화 한 통화에 엄마는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신애야, 너 막내 이모네 집에 잠시 가 있을래?”
얼굴은 하얗게 질렸음에도 엄마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에게 막내 이모네 집은 부모님이 일이 있으면 늘 가서 노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
“물이 많이 불어서 배가 떠내려갔대. 아빠가 병원에 계시다는구나. 엄마가 가서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아빠도 보고 올게. 너는 이모네 집에서 놀고 있어.”
그때만 해도 나는 일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인지 몰랐다. 엄마는 나에게 감정을 들키지 않고 정말 잘 숨겼다. 한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우리 엄마의 대단함을 새삼 느낀다.
나를 이모네 집에 데려다주고 엄마는 총총 사라졌고, 정말 한참 동안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빠는 병원에 있었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유람선을 묶고 있던 부분이 분리되어 배가 떠내려 갔고, 배가 물에 잠겼다.
그리고 그때 아빠와 같은 배 안에 있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빠가 살아난 것은 기적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큰 이모는 종종 “하나님이 목숨을 하나 더 주셨다고 생각하게.”라고 말씀하셨었다.
유람선의 유리는 두껍고 잘 깨지지 않았지만 그날은 그 유리가 깨졌고 아빠는 그 사이로 마지막 순간에 헤엄쳐 나왔다고 했다.
아빠는 목숨을 건졌지만 유리의 깨진 부분에 온 몸이 찢어졌고 다리를 특히 많이 다쳤다.
아빠는 다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 대신에 그때 돌아가신 다른 분들의 장례식장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때 엄청 무서웠어. 가족들이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겠니."
그 일이 있은 후 한참 후에야 엄마는 그때 일을 이야기하셨다. 자신들의 가족은 죽었지만 선장이 살아났다는 말에 모두 분노했던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아빠 대신 야단을 맞으며 장례식장들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당시의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당시의 나는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의 삶을 살아내기에만 바빴다. 아빠와 엄마는 나에게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면 된다고 했고, 나는 정말로 그렇게 살았다.
그때 아빠가 얼마나 위험했었는지 정말 그때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살아남았었다는 것을 나는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죽음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내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아빠는 그때의 일들로 예민해져 있었고 정신만이 아니라 몸도 아프기 시작했다. 사고가 나던 날 다친 엄지발가락의 상처는 곪아가고 있었다. 상처가 곪자 열이 펄펄 끓고 몸이 아파왔고, 엄마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를 모시고 큰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엄지발가락을 잘라야겠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는 병에 관련해서는 의사인 친척 오빠에게 의논하는데, 엄마는 곧바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전화를 받고 오빠가 달려왔으며 아빠의 발가락을 자르지 않아도 되게끔 조치를 취해주었다.
나는 그때 알지 못했는데, 엄지발가락을 자르면 그냥 발가락만 없어져서 보기에 흉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엄지발가락이 없으면 걸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아빠는 남은 날들을 걷지 못하고 지낼 수도 있었는데도 나는 그 당시의 그렇게 큰 일들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빠의 인생이 암흑 같았을 때 나는 그 어떤 것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의지가 되어주지도 못했다.
(아빠와의 화해)
아빠, 정말 죄송해요. 사실 아빠는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저는 알고 싶지도 않아했어요. 더 많이 알면 더 무섭다는 핑계로 피하고 현실을 보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어려도 자식인 제가 아빠의 위로가 되어 드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비록 위로가 되지는 못했어도 그 일로 아빠를 이해하려고 하려고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냥 기도만 해드렸어도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는 아빠가 저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아빠가 저에게 모진 말만 한다고 속상해하고 원망했는데, 정작 딸인 저도 아빠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어요.
아빠, 죄송해요. 너무 늦게 알아서. 정말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