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포도나무(7일 차)

(2022.3.31. 목)

by 옥이와 일이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 로그로뇨(29.4Km 7시 30분 출발 17시 도착)

<상세 일정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0.0km) → 산솔(Sanol 7.0km) → 또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 8.5km) → 비르헨 델 뽀요(Virgen de Poyo 10.5km) → 비아나(Viana 19.0km) → 비르헨 데 라스 꾸에바스(Virgen de las Cuevas 22.9km) → 로그로뇨(Logrono 29.4km)>


< by 개미(옥이)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의 낡았지만 첨탑이 멋진 성당은 ‘아르코스’라는 말이 어울리듯 아치형 돌탑이 담장으로 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리비 표시가 바로 출입문 쪽에 있어 그 문을 빠져나오니 다리가 나옵니다. 오늘은 거의 29Km를 걸어야 합니다. 바짝 긴장해서 걷기 시작합니다.

2.jpg < 로스 아르코스 성당 >

도시를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사방이 밀밭입니다. 피레네 산맥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양 떼들을 볼 수 없고, 오로지 보이는 것은 밀밭과 포도밭입니다. 구불구불 이어진 밀밭 길을 10km 걸으니 산솔(Sansol), 이어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 마을이 나옵니다.


간이 슈퍼 같은 잡화점이 목 좋은데 있습니다.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들어가 화장실을 해결하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습니다.

이곳은 순례객들의 사랑방인 듯 우리보다 늦었던 더그와 스티브, 며칠 전 한 숙소에서 같이 묵었던 영국 형제, 에스테야 가는 길에 만났던 게리와 카렌 부부 모두 모여 쉽니다. 마침 까미노의 기적을 선물해준 아르헨티나 대모와 소녀가 옵니다. 어제 가리비와 십자가로 된 기념품을 준비했는데 바로 만난 것입니다. 선물을 받고 기뻐하며 다음날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갈 거라고 합니다. 하마터면 못 만날 뻔했는데 기적이 또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은 간절한 사람에게만 일어난다는데, 산티아고 가는 길은 간절함이 통하고 기적이 일어나기에 적당한 공간인 듯합니다.

오늘 걷는 길에 만난 포도밭에는 수십만 그루의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고 밭의 규모가 엄청납니다. 포도나무는 땅에서 아주 낮게 전지가 되어 있는데, 과연 포도가 저기서 열릴까 싶습니다. 농부는 머지않아 이 시커먼 나무 둥치에 싹이 트고,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포도가 열리고. 잘 익은 포도를 수확하여 와인으로 가공할 꿈을 꾸며 기다리겠지요..

문득 자유로운 영혼으로 제멋대로 중학교 생활을 하던 작은 딸과 갈등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농부가 싹을 틔우기 위해 전지해 주고 나뭇가지를 지탱하기 위한 울타리를 미리 준비해 두듯이 왜 그저 지켜보며 기다려 주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걷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합니다.


이렇듯 까미노 길은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성과보다는 미흡했고 실수했던 것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겸손을 배우게 되는 길입니다.


오늘 걷는 길은 생각보다 수월하나, 비도 오고 바람도 세차게 붑니다. 못 견디게 추위를 느낄만하면 가끔은 반짝 햇살이 비쳐주기도 합니다. 로그로뇨(Logrono) 표지판이 보이고 통행량이 제법 많은 고가도로 밑을 지납니다. 갑자기 파란색 바탕에 가리비 표시가 없어졌습니다. 그저 보이는 것은 노란색 화살표... 길을 잃었다 싶을 때 다시 가리비 문양이 나타나고 타파스의 고장 로그로뇨(Logrono)에 도착합니다.

로그로뇨(Logrono)는 이제까지 봤던 시골 마을과는 달리 팜플로나(Pamplona) 다음으로 굉장히 크고 번화한 도시입니다. 리오하 와인으로 유명한 스페인 북부 라 리오하 지방의 주도입니다.

오늘은 마침 ‘타파스 데이’랍니다. 또 어떤 기적을 만날지 기대하며 타파스 거리로 향합니다.

KakaoTalk_20220331_211843452.jpg

그런데 날이 워낙 차고 코로나 여파 때문인지 거리가 생각만큼 활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행사 분위기도 엿보이질 않고요. 골목을 돌다가 두 군데에서 타파스 몇 개 맛보고 발길을 돌립니다. 길가의 바에 붙여진 ‘존 웨인’의 큰 사진을 보고 호기심이 순간 발동하였는데, 아쉽지만 자제하고 다음을 기약합니다. 오늘 감기라도 드는 날에는 앞으로 남은 일정에 차질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날씨는 3월 말인데도 아직 겨울입니다. 아마 4월까지도 두꺼운 외투가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 by 베짱이(일이) >


3월 17일에 시작한 여정이 2주를 넘어간다. 3월의 끝을 서울이 아닌 이곳 스페인 북부 피레네 남쪽 고원지대의 산티아고 길 위에서 맞는 감회가 새롭다. 퇴직 후 한 달이다. 작년 이맘때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시간을 살고 있는 내 모습이 생경하다. 은퇴 생활의 시작을 이 길 위에서 시작한 것인데, 아직은 이른 상상이긴 하지만 이 길이 끝난 후 돌아가 다시 익숙한 곳에서 새로운 일상을 이어가야 한다. 은퇴자로서.......


긴 여정이다 보니 이 또한 일상이 되어 간다. 반농 반도의 생활... 농촌 생활의 준비 기간은 매우 길었지만 주체적인 농촌살이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인데 너무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시간의 관성 때문에 한동안은 관계가 헛돌 수 있다. 관계의 서먹함과 거리감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을 것이고 너무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나의 인간관계론이 그렇다.


로그로뇨는 인구 20만의 팜플로나보다는 작은 도시이지만 제법 큰 도시이다. 타파스 거리에서 타파스를 시식해 본다. 첫째 집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인데 7.5유로짜리 게살 요리와 하몽 조각이 얹힌 파스타를 화이트 와인과 먹었다. 둘째 집은 저렴한 로컬 카페로 하몽이 얹힌 토마토 케첩이 발린 식빵과 계란 비율이 높게 요리된 오믈렛, 느타리버섯 파스타를 먹는다. 관광객이 아니라 이 지역의 단골손님들이 계속 들어오는데 ‘꼬레안’이냐며 반가워한다.

KakaoTalk_20220707_185412440.jpg
KakaoTalk_20220707_185325786.jpg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겨울 날씨다. 그래서인지 거리가 생각보다 한산하다. 감기 걸리겠다며 아내가 자꾸 재촉을 해서 팜플로나 이후 두 번째 도시에서의 저녁을 즐겨 보려던 나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중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미니 슈퍼를 찾아 필요한 것들을 산다. 중국사람이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다 하니 이번에는 순례자냐 하여 그렇다 하니, ‘우리는 산티아고까지 갈 수 없다. 가더라도 고통스러운 길이 될 것이다.’라며 잘 다녀오라고 미소 짓는다. 5년 전 바르셀로나에서도 숙소 앞 중국인 슈퍼에서 당도가 높은 납작 복숭아를 매일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존 웨인의 포스터가 걸린 오래된 바를 지나는데 들어가고픈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런데 아내의 눈치를 보니 말을 꺼내기가 난망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재촉한다.

G와 T 부부를 거리에서 만나 반갑다고 얼싸안으며 전화기를 바꾸어 가며 사진을 몇 장씩 찍는다. 찬 바람을 맞으며 추위에 떨면서도...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결속력이 강한 것 같다.

숙소에 들어와 빨래를 하다가 나이 분간이 안 되는 그리스인을 만났는데. 한국인을 알아보길래 반가워 ‘니코스 카잔 차키스’를 아냐 했더니 모른다 한다. <희랍인 조르바>는 알고 있으려나..? ‘엘 그레코’가 화가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조르바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며 힘이 있어 보이는 잘생긴 중년의 멋쟁이였다,

KakaoTalk_20220707_182754762.jpg

오늘 여정은 28킬로가 넘는 긴 일정으로 바람도 세차고 간간히 비도 오고.. 걷기에 힘든 날씨가 계속되었다. 가끔 해가 난 듯하더니 다시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불곤 했는데 내일도 이런 날이란다. 비가 눈이 되어 내리기도 할 것 같다고... 내일 나헤라(Najera)까지는 29킬로미터가 넘는 긴 거리인 데다 초반 5킬로부터 10킬로 구간까지는 오르막이다. 좀 걱정은 되지만 내 몸의 회복력을 믿어야지. 몸에 대한 신뢰가 한 풀 꺾이기 시작하면 끝까지 갈 수 없다. 몸이 지치기 시작할 때 그동안 잠재워 두었던 정신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 시내 나가는 길에서 조우한 G와 T 부부를 보며 힘을 낸다. T는 몸이 비대하고 다리를 약간 저는데 G가 끌어 주고 기다려 주며 밝은 표정으로 함께 걷는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늘 조화가 필요하다.

순간순간 지혜롭게 판단하여 몸이 너무 지치지 않게 해야 한다. 정신도 감당 못할 정도로 몸이 힘들게 하진 말고 중간에 쉬자. 시간은 넉넉히 남겨 두었다. 쉬면서 또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있으리라.

keyword
이전 08화8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6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