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01. 금)
*. 로그로뇨(Logrono) - 나헤야(Najera) (31km 9시 출발 – 18시 도착)
< 상세 일정 : 로그로뇨(Logrono0.0 km) → 빠르께 데 라 그라헤라(Parque de la Grajera 7.5km) → 나바레떼(Navarrete 13km) → 벤또사(Ventosa 21km) → 나헤야(Najera 31km) >
어제 저녁 타파스 거리를 돌아다니느라 춥고 오슬오슬해 타이레놀을 먹고 푹 자버렸습니다. 그 탓인지 일찍 일어나 출발해야 하는데 늦잠을 자버린 것입니다. 느긋한 성격인 남편은 아침 스트레칭에 발 마사지에 도통 서두르지 않습니다. 이왕 늦은 김에 여유를 부리고 늦은 출발을 했습니다. 로그로뇨(Logrono)는 도심을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는 것을 보니 매우 큰 도시입니다.
도심을 빠져나와 산 미겔(San miguel) 공원으로 진입하니 현지인들이 개를 데리고 나와 산책합니다. 하늘이 심상찮습니다. 희뿌연 구름이 잔뜩 몰려오더니 눈발이 조금씩 날립니다. 점점 바람이 세지고 눈발은 함박눈이 되어 세게 몰아칩니다. 잠시 멈춰 서서 우비로 중무장을 하나 소용없습니다. 손끝은 시리고 우비는 사정없이 바람에 날리고 배낭은 어깨를 짓누릅니다. 공원을 벗어나니 카냐스(Cañas) 저수지가 보이고 야영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날씨도 좋지 않고 코로나 영향으로 사람들은 없습니다. 거기를 벗어나니 구릉으로 이어지는 길이 구불구불 나옵니다. 그 길을 올라 산등성이를 넘어섭니다.
길 옆으로 차량 통행이 잦은 도로가 있고 철조망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철조망 울타리에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어 걸어 놓았습니다. 서울의 남산에 열쇠고리를 묶어 놓았듯이 지나가는 사람마다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걸어 놓은 작은 나무십자가의 행렬입니다.
등성이를 내려서니 큰 교차로가 나오고, 그 옆에 작은 도로를 내는지 공사 현장이 나옵니다. 눈이 오는 악천후에 혼자 도로 공사를 하는 스페인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올라’ 인사를 했더니 작업을 멈추고 손을 들어 선한 미소로 답을 합니다. 서로 마음이 통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갑자기 하늘이 맑아지더니 거짓말처럼 햇살이 비칩니다. 순간 얼었던 몸이 녹으며 따뜻해집니다. 걸음을 빨리하여 13km 지점인 나바레테(Navarrete)까지 부지런히 걸었더니 성당이 나오고 그 옆에는 작은 카페가 있습니다.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카페로 순례자들에게는 적당한 휴식처가 됩니다. 어김없이 연세 지긋한 아저씨가 포도주 한 잔 드시다 주문을 하는 저에게 말을 건넵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엄지 척하면서 굉장히 좋아라 합니다. 아마도 이 길을 다녀간 한국인들의 인상이 좋게 남았던 것 같아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잠깐 쉬는 동안에 또 눈이 거세게 내립니다.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마을 벤또사(Ventosa)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잠시 반짝 해가 나던 날씨는 다시 꾸물꾸물거리더니 또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 정도로 바람과 눈발이 거세집니다. 피할 곳 없으니 뚫고 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어 계속 걸어가나 전진이 더뎌집니다. 눈은 우박으로 변하더니 얼굴을 때리고 우비를 뚫을 듯이 쏟아져 몸이 얼어 갑니다.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마침 또 하늘이 맑게 개고 따뜻한 햇살이 비칩니다.
벤토사 표지판이 보일 때쯤 길바닥에 ‘Hello BART’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눈비를 뚫고 19.2km를 걸어와서인지 몹시 지치고 힘들어 오늘의 목표지를 수정하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마을에 들어가 잠시 쉴 곳을 찾다 오기가 생겨 끝까지 걷기로 합니다. 한 번 주저앉기 시작하면 이 길의 끝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Hello BART’ 주인공이 뒤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한국인 젊은이들과 친구가 되었는데 길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고 빨리 오라 해서 부지런히 걷고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온 친구랍니다. 볼로냐 올 기회가 있으면 자신을 찾아 달라고 너스레를 떱니다, 앞에 가고 있을 친구들을 따라잡으려면 속도를 내야 한다면서 쏜살같이 앞질러 갑니다.
한 차례 또 눈이 우박이 되어 내립니다. 나헤야(Najera)까지 한 시간여 동안 끊임없이 해와 눈이 경쟁하듯 자리를 바꿉니다. 스페인 북부 피레네 남부 지역의 꽃샘추위인가 봅니다. 끝없이 이어진 포도밭에 줄지어 늘어선 시커먼 포도나무에 봄은 아직 오지 않은 듯합니다. 싹이 나서 잎사귀가 커지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영글어 포도주병에 담길 날을 상상해 봅니다. 오늘 날씨도 그날이 오기 전 겨울이 부리는 마지막 심술이겠지요. 하루 종일 변덕스러운 날씨를 경험하며 다시 내 삶을 돌아봅니다.
오래전 어느 추운 겨울날 눈보라 속을 고통스레 걸어갔을 순례자들의 심정을 헤아려 봅니다. 삶의 고통과 고난의 크기만큼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진실을 새삼 마음속에 조용히 새기며 내일 걸어갈 길의 고통의 크기를 가늠해 봅니다.
봄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세찬 눈보라가 몰아친다. 푸른 밀밭과 시커먼 포도나무 밭 사이로 난 끝없는 길...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조차 없다면 얼마나 더 힘들고 외로울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시간의 길이가 실제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언뜻언뜻 드러나는 조각구름과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파란 하늘이 우리를 위로하며 조금만 참고 힘내라고 응원한다. 이 시련 속에서도 구름에 가린 태양이 잠깐잠깐의 햇살과 온기로 저 시커먼 포도나무 둥치에 생명의 기운을 전해주고 있음을 안다.
석회석 공장 주변 덤불숲에서 작고 예쁜 회색빛 토끼를 보았다. 서리풀 공원에서 길들여진 뽀얗게 살찐 토끼가 아니라 야생의 이베리아 산 토끼.. 길 가다가 다시 그 놈인 지 또 한 마리를 본다. 눈보라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즐기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속도로 옆으로 난 언덕길을 넘는데 철조망에 손가락 두 개를 십자 모양으로 만들어 걸어 놓은 듯한 나무 십자가들이 인상적이다. 이 길을 걸었을 수많은 순례자들의 간절한 소망과 의지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바레테(Navarrete)라는 도시에서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카페를 발견하고 우의를 벗고 스틱을 챙겨 들어선다. 마을 노인 한 분이 바에 앉아 낮술 한 잔 하고 계신다. ‘꼬레안’이냐며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미소 짓는다. 젊은 시절 나의 노년을 상상하는 것조차 기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내가 노년에 이르고 보니 긴 세월 인생의 끝자락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생의 황혼을 즐기는 노인 선배들을 무한한 존경과 경외감으로 대하게 된다. 푹 패인 얼굴의 주름살 안에 흐르는 따뜻하고 온화한 눈빛과 어렴풋한 미소를 머금은 이 나바레테(Navarrete)의 촌노와 같은 포도주 한 잔을 주문해 브라보 하며 눈이 멎기를 기다린다. 얼었던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며 눈발이 잦아든 틈을 타 노인과 작별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해가 구름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눈발은 날리는데 날씨는 좀 누그러진 듯하다.
에스테야에서 B가 예고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의 날씨일꺼라는 예상이 안되었다. 눈보라와 바람을 맞으며 진눈깨비까지 내리는 진창길을 걷는 것은 힘이 든다.
<주홍글씨>를 쓴 미국의 작가이자 외교관이었던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은
이라 했는데, 우리의 진흙길도 곧 끝나고 대리석 위를 걷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기운을 내어 다시 전진한다.
다음 도시는 벤토사(Ventosa)다. 이곳에서 쉬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광야의 투사처럼 악천후를 의연하게 헤치고 전진한다. 오늘 일정을 계획대로 이어가는 우리 모습이 스스로 대견하다.
그도 잠시, 곧 눈발이 거세지고 바람이 다시 세차게 분다. 얼굴을 때리는 우박으로 안경이 흐려져 앞을 볼 수가 없다. 시린 손을 가끔씩 비벼가며 그저 스틱과 두 다리의 감각에만 의지해 진흙길을 고통스럽게 걷는다. 이때 멀리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 들려 뒤를 돌아다보니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온 BB이다. 볼로냐 대학원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있는친구다. 에스테야에서 친해진 한국인 젊은이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길을 가고 있는데, 우리처럼 출발이 늦어 앞서 가는 친구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며 비바람을 뚫고 씩씩하게 전진한다. 이 젊은 친구를 보니 우리도 힘이 좀 나는 듯하다.
피레네의 남부 고원의 꽃샘추위인가? 한국에서도 대관령이나 강원 산간에서 5월에도 눈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지만 이곳처럼 바람이 심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헤야(Najera)에 도착하니 신기하게도 바람이 잦아들고 눈이 그쳤다. 마을 중심부를 통과하여 우리가 예약한 언덕길 끝의 숙소를 찾았다. 숙소 아래층에는 리셉션과 큰 홀이 있고 위 층에 방이 셋 있는데 그 위층으로 이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가족들이 살고 있다. 이전에 줄곧 묵었던 이층 침대의 알베르게와는 사뭇 다르게 독립된 방에 침대 둘이 있는 아담하고 따뜻한 공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받으며 따뜻한 물 샤워를 한다. 지친 순례자에게 이렇게 훌륭한 쉼터가 있다는 것에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난다. 가뿐해진 몸으로 거리 구경도 하고 저녁을 먹는다. 오는 길에 슈퍼에서 영국인 형제 중 동생분을 만났다. 형이 감기에 걸려 여기서 하루 더 쉴 예정이라 한다. 더럭 겁이 난다. 우리도 감기 걸리지 말아야 하는데... 모처럼 포근하게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