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진흙의 까미노 길(9일 차)

(2022.4.02. 토)

by 옥이와 일이

*. 나헤라(Nejera)-산토 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 21.5Km 8시 30분 출발 – 14시 30분 도착)


< 상세 일정 : 나헤라(Nejera) → 아소프라(Azovra 6.0km) → 시루에냐(Ciruena 15.5km) → 산토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21.5km) >


< by 개미(옥이) >


나헤라(Nejera) 숙소의 덧창을 여니 마을 골목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습니다. 하늘은 청명하고 맑습니다. 30킬로의 전날 일정에 쌓였던 피로는 깔끔하고 따뜻한 알베르게에서 잠을 자서인지 거의 풀리고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상쾌한 마음으로 나갈 채비를 갖춰 다시 길을 떠납니다. 숙소가 마을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바로 순례길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긴 여정에는 숙소와 먹을 것이 중요한데 숙소를 미리 정하지 않고 느낌으로 정하는 방법도 해보니 괜찮습니다.


마을에서 언덕을 오르는 길이 눈길이라 몹시 미끄럽습니다.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지런히 재촉하여 발걸음을 빨리 해봅니다. 길 양 옆에 길게 펼쳐진 설경이 장관입니다. 밀밭과 유채꽃밭과 포도밭 설경이 등 뒤에서 비치는 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십니다. 앞서 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던 오스트레일리아 아주머니께서 ‘Beautiful~~’을 연발합니다. 자기 나라에서 보기 힘든 설경이 때마침 내려준 생일 선물 같다며 감탄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제가 생일이었다고 합니다. 햇살도 잠시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또 거세게 바람과 우박이 몰아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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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눈에 대한 준비를 한 까미노들이 뒤늦게 우의를 챙겨 입는 우리를 앞질러 저만큼 멀어집니다. 까미노 길 초반 느긋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앞질러 가는 순례자들을 따라잡으려고 걸음을 재촉합니다. 마음만 앞설 뿐 부지런히 걸으나, 간격은 좁혀지지 않고 어깨가 빠질 듯이 아픕니다. 다시 해가 나고 눈발이 잦아들어 날씨는 평온함을 찾았으나 승부 근성이 도진 마음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걸음걸이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고 눈이 녹고 나서 진흙탕으로 변한 길이 발목을 잡습니다. 등산화와 스틱에 진흙이 켜켜이 눌러 붙습니다. 속도를 내기는커녕 그냥 걷기에도 힘이 듭니다. 그 순간 알았습니다. 회귀본능.... 처음 가졌던 겸손한 마음은 점점 없어지고 다시 또 경쟁과 ‘빨리, 빨리’ 본능으로 돌아왔습니다. 직장 생활 34년 동안 일분일초도 헛되이 쓰면 안 되겠기에 남들보다 빨리 하는 것을 능력인 양 고집하며 살아왔습니다. 조금만 늦게 일을 처리하는 동료를 보면 답답해했고, 심지어는 무능력자인 것처럼도 생각했습니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이든 공부든 하지 않으면 특유의 신경질을 부렸던 그 성질이 도로 도진 것이지요...

순례길의 진흙이 그런 나를 붙잡으며 천천히 가라고 합니다.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며 경치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6Km쯤을 걷고 나니 아조프라(Azofra) 마을이 보입니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카페에 자리를 잡고 뒤에 오는 남편을 기다렸으나 오지를 않습니다. 아침에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프랑스 자매분들에게 물어보니 두 갈래 길에서 다른 길로 갔다 합니다. 서로 엇갈린 것입니다. 커피의 여유를 포기하고 부지런히 쫓아 걸으니 저 멀리 보입니다. 까미노 길은 일행을 잃어버려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언젠가 만나게 되어 있는 한 방향 길이니까요.

오늘도 비와 눈이 번갈아 가며 내리길 반복합니다. 바람도 세찹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이 와도 우비를 갈아입지 않습니다. 그저 내리는 눈을 묵묵히 맞고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햇빛이 나와 젖은 옷을 말려주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15.5Km 이정표가 보이고 시루에나(Ciruena) 마을이 보입니다. 까미노 길에서 마을이 보이면 사막에서 오아시스 만난 듯 반갑습니다. 카페에서 지친 발과 어깨를 쉬고 요기도 합니다. 먼저 와서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순례자들과 인사합니다. 길에서 만나 친구가 된 미국분들이 시끌벅적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커피를 마실 때쯤 한국인 젊은이 둘과 함께 나타난 볼로냐 친구 바르트가 반갑게 인사합니다. 이들은 그라뇽(Granon)까지 간다고 합니다. 우리의 오늘 목적지 산토 도밍고 데 라 깔사다에서 6킬로를 더 가야 하는데, 슬쩍 욕심이 납니다. “그래, 우리도 한 번 고려해 볼게.” 그들이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보며 먼저 일어섭니다. 순례길에서 먹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에너지가 들어가면 다음 일정까지 기운을 내서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고 난 후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씩씩하게 걸어 오늘의 목적지 산토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 도착합니다. 물론 또 거센 눈발과 바람을 뚫으면서 걸었지만 언제나 도착할 때는 마지막 힘이 불끈 솟아오른답니다.


산토도밍고의 숙소는 대규모의 공립 알베르게인데 숙소가 많지 않아서인지 까미노 친구들이 많이 보입니다. 따뜻한 물 샤워는 역시 피로를 푸는 최고의 보약입니다. 아! 그런데 라디에이터에는 온기가 없고 방 안에 한기가 가득합니다. 배가 조금 나오고 부드러운 음성에 마음씨 좋아 보이는 관리인에게 호소하니 방으로 직접 와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는데, 글쎄요..

이 길 내내 한국의 집처럼 훈훈하게 잘 수 있다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현명할 듯합니다. 이제 거리로 나가 이곳 포도주와 어울릴 만한 음식을, 이름은 모르지만 그림을 보고 잘 선택하여 기분 좋게 내일을 준비하는 마무리를 하려 합니다.



< by 베짱이(일이) >


아침에 창을 여니 찬바람이 확 끼친다. 다행히 하늘은 맑고 밤사이 쌓인 눈이 거리에 하얗다. 어제의 악몽 같은 눈보라 길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거리를 나선다. 아침 햇살에 하얀색 설경이 황금빛으로 눈부시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언덕에 오른다. 멀리 눈 쌓인 피레네 연봉들을 배경으로 신비스러운 구름과 바람이 연출하는 기가 막힌 풍경화에 어제의 고통은 씻은 듯 사라진다. 이제 진흙(mud) 대신 대리석(marble) 길이 펼쳐질 듯한 느낌이다. 생장에서 산티아고 가는 ‘프랑스 길’은 피레네 남쪽에서 동에서 서로 뻗은 800km 구간을 걷는 길이다. 우리는 줄곧 아침에는 등 뒤에서 떠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서쪽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밟으며 오전 내내 길을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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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언뜻 드러나는 하얀 구름 사이로 햇살 품은 파란 얼굴의 하늘이 북풍이 몰고 온 먹구름과 경쟁한다.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날씨의 조화에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아예 우의를 입은 채로 계속 가든지 해야 한다. 이곳의 4월은 우기는 아니지만 습도가 높고 기온이 낮은 탓에 눈이나 비가 곧잘 내린다. 오늘도 장갑을 끼었음에도 스틱을 잡은 손이 시려서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번갈아 넣어 녹이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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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찬 바람과 눈보라도 다시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해발 평균 800~900미터 정도의 고원 지대를 지나게 되는데, 이러한 지형을 메세타(Meseta)라 부른다. 원래는 건조하면서 바람이 심한 지형인데 지금은 대기가 습하고 기온이 낮아 눈보라까지 몰아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전진하는 속도가 느려지게 마련이다.

너무 일찍 대리석 길을 기대한 것을 경계한 것일까? 잠깐 아름답던 설경과 얼어붙었던 ‘대리석 길’이 녹아 다시 질척거리는 진흙길로 변한다.


우리네 삶도 그렇지 않던가? 늘 아름답고 행복한 날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어두운 구간을 지나야 할 때도 있고, 그 기간이 매우 길어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흙길은 해가 나고 물이 빠지면서 다시 단단해지고 걷기 좋은 길이 된다. 건조해서 먼지 날리는 길에서는 이슬비라도 내려주었으면 할 때도 있다. 늘 인생은 희비의 쌍곡선이 교차되는 것처럼 길도 그런 것이다.


길을 걷다 가끔은 뒤를 돌아본다. 아주 드물게 혹은 너무 자주는 아니고... 내가 걸어온 길을 본다. 힘들게 걸어왔지만 그 길고 짧았던 순간들이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인생도 그렇다. 한국 전쟁의 비극이 휴전으로 마무리되고 6년이 지난 가을에 이 세상으로 던져진 나는 60 성상을 넘어 64라는 적지 않은 기록적 숫자를 등에 달게 되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고 제2의 인생이라고 말들 하는데 삶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것..


사는 것은 지금이지만 살고 나면 과거이고 남은 것은 미래인데, 길을 걷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15.5Km 이정표가 보이는 지점에서 오늘 남은 길을 헤아려 보니 6Km 남았다. 시루에냐(Ciruena)라는 마을의 카페에서 우의를 벗고 스틱과 신발을 잘 털고 들어선다. 아이들 스카우트 인연으로 친구가 되었다는 캘리포니아 출신 세 사람이 먼저 도착해 식사를 하고 있다. 오늘의 수고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사를 나눈다.


식사가 끝날 때쯤 한국인 처녀 둘과 친구가 된 볼로냐 친구 B가 들이닥친다. 너무 힘들었다고 너스레 떠는데 표정은 마냥 즐겁다. 자기들은 그라뇽(Granon)까지 간단다. 산토 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서 6킬로미터를 더 가야 하는 곳인데, 볼 것이 많기 때문에 저녁 늦게라도 도착해야 내일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그냥 21.5km만 걷기로 했는데 목표를 수정해 볼까하는 마음에 망설이게 된다. 아내의 눈치도 그렇다. 그러나 어제 너무 무리했으니 오늘은 원래 목표 지점까지만 가는 게 낫겠다.

오늘도 구간은 짧지만 힘이 든다. 그리고 아직 6km를 더 가야 한다. 일단 일어서야지. 젊은 친구들을 뒤로하고 카페를 떠난다. 아직 우리 앞에는 비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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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 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의 숙소는 지역의 체육문화센터 내에 자리하고 있는 대규모 공립 알베르게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도 만났다. LA에서 온 멕시칸 아메리칸 등 몇몇 분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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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장에는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의 다양한 등산화가 진흙이 잔뜩 묻어 있는 채로 놓여 있다. 체육 활동을 끝낸 어린이들과 부모들이 우리를 힐끗힐끗 바라본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배정된 방으로 관리인을 따라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에게 배정된 방의 실내가 너무 썰렁하다. 다시 내려가 관리인에게 보아 달라고 했는데 라디에이터를 만져 보고는 별말 없이 내려간다. 설마 더운물은 나오겠지 하며 샤워 꼭지를 트니 이내 더운물은 나온다. 몸이 더워지니 오늘 하루의 피로가 풀린다. 그리고 그라뇽까지 가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아내의 제안으로 중국인 마트에서 내복을 한 벌 씩 사 입었다. 일기를 쓰고 있는데 졸음이 쏟아져 잠자리에 들었다. 내복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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