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길 위의 사람들 + 사람들(10일 차)

(2022.4.03. 일)

by 옥이와 일이

*. 산토 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 벨로라도 (Belorado)

( 23.0Km 8시 30분 출발 – 15시 30분 도착)

< 상세 일정 : 산토 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0.0km) → 그라뇽(Granon 6.5km) → 레데시아 델 까미노(Redecilla del Camino 10.5km) → 가스띨델가도(Castildelgado 12.5km) →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 14.5km) → 비야마요르 델 리오(Villamayor del Rio 18.0km) → 벨로라도(Belorado 23.0km) >


< by 개미(옥이) >


산토 도밍고의 무덤이 있는 대성당과 높은 종탑이 웅장하고 엄숙한 모양으로 거룩함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합니다. 성당 안의 제단 장식과 성당 뒤쪽의 닭장 등을 둘러보지는 못해 아쉬웠습니다. 광장 건너에는 고풍스러운 스페인 국영호텔 파라도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얼핏 창문으로 들여다본 내부가 어둠 속 조명으로 중세의 분위기를 전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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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빠져나오니 도로가 나오고 11세기에 처음 지어졌다가 18세기에 근대식으로 고쳐지었다는 오하(Oja) 강의 다리가 나오는데, 다리 옆 조그만 예배당에는 작고 소박한 제단과 양 옆으로 폭이 좁은 긴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왠지 화려한 대성당보다 기도가 더 잘 이루어질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반짝하고 잠깐 나왔던 해가 구름 사이로 들어가자마자 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서둘러 채비를 고치고 다시 길을 갑니다. 지금까지 걸었던 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초록의 밀밭이 길 양 옆으로 구릉을 이루며 쭉 펼쳐집니다. 어제 불던 사나운 북풍이 남풍으로 바뀌어 한기가 훨씬 덜합니다. 간간이 햇살이 비치기도 합니다. 덕분에 기분도 좋아지고 걷는 발걸음도 상쾌합니다.

앞에 첫날 만났던 조금은 시크한 아르헨티나 아저씨가 동행자를 만나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워낙 걸음이 빨라 금방 멀어집니다. 이제는 굳이 경쟁하듯 쫓아가지 않고 차분히 내 페이스로 가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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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차를 걸으며 처음 피레네 넘을 때의 체력은 이미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리에 근력이 붙고 체력도 조금씩 향상되는 느낌입니다. 아침 스트레칭은 불편한 알베르게 상황에서도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녁에 자기 전에도 누운 자리에서도 꼭 해야 합니다. 먼 길을 가야 하니까요. 산티아고까지 데려다 줄 발과 다리 그리고 어깨와 팔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기도 같은 것입니다.


어느새 걸음에 탄력이 붙어 걷다 보니 한국의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도시라던 그라뇽(Granon)이 나옵니다. 무슨 축지법을 쓴 것은 아니고, 걷다 보면 6Km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사이에 앞사람과의 간격이 벌어지는 경험을 모든 순례자들이 하게 됩니다. 천천히 쉬지 않고 가다 보면 자주 쉬며 가는 사람들과 간격이 벌어지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요. 망설임 없이 첫 번째 나오는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와 에스파냐 오믈렛을 먹고 있는데 카페 밖에 반가운 얼굴이 보입니다.

그동안 무릎이 아파 쉬었던 진과 더그 부부와 스티브가 보입니다. 얼른 뛰어나가 안부 인사를 합니다. 까미노 10일 차가 되고 보니 시작할 때 만났던 많은 인연이 이제는 흩어져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만난 세 사람은 이제는 형제 같습니다. 너무 반가워 서로 끌어안으며 그간의 상황을 공유합니다. 진과 더그 부부에게는 세 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딸 둘에 막내가 아들, 그 아들이 현재 대학을 다니고 있고, 딸들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워낙 버터 바른 영어라 잘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자주 듣다 보니 익숙해집니다. 언어보다는 마음이 소통을 더 가능하게 하는 도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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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에 만난 비야마이오 델 리오(villamayor del Rio)라는 작은 마을에는 어김없이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그 앞 광장에 작은 휴식 공간이 있는데 그네도 있습니다. 유쾌한 진과 더그 부부가 그네에 올라타 ‘Singing in the rain’ 노래를 부르기에 따라 부릅니다. 곧이어 ‘사운드 어브 뮤직’의 ‘도레미송’으로 한껏 기분을 내 봅니다. 진에게 ‘줄리 앤드류스’와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하니 굉장히 좋아합니다. 남편이 ‘I left my heart in sanfransico...’로 응수합니다. 일행 중 스티브는 우리 나이로 70입니다. 남편이 그를 브라더라고 하자 그가 남편을 코리안 브라더라며 좋아합니다.


아이들의 보이스카웃 인연으로 오랜 친구가 된 댄과 찰리, 한 달 전에 결심하고 함께 길을 나선 찰리 친구 랜디, 이 세 사람과 동행이 되어 길을 갑니다. 세 사람은 한국과 인연이 많습니다. 모두 한국에 와 봤고, 불고기와 김치 등 한국 음식을 매우 좋아한다 합니다. 댄은 걷기를 굉장히 좋아해서 제주에도 와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 까미노 길에서 만난 외국인 순례자들과 현지인들이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호감도가 높은 것을 보고 계속 놀라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 사람들이 이 길을 많이 찾기도 해서이겠습니다만, 이제 한국이 20~30년 전과 비교해 외국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많이 높아지고 인식도 좋아진 것을 실감하는 과정입니다. 계속 아는 체하고 칭찬을 해 주니 기분이 좋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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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자매 같이 다른 색의 같은 브랜드 우의를 입고, 어제 같은 숙소에서 잔 프랑스 아주머니 두 분이 걷고 있습니다. 한 분은 리옹에 사시고 다른 한 분은 프랑스 남부 까미노 시작점 어느 도시에 사시는 친구분들인데, 로그로뇨에서부터 레온까지의 구간을 걸으신답니다. 프랑스에도 걷기 좋은 트레킹 코스가 많다고 은근히 자랑합니다. 그럴만하지요. 남편들은 걷기를 좋아하지 않고 자전거 타기를 좋아해서 두 분이 같이 다닌다고 합니다. 이 분들처럼 까미노 전 구간을 몇 차례로 나누어 다닌다는 분들을 전에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까미노 예비 순례자 분들도 참고하면 좋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길에서 만나면 그냥 친구가 됩니다. 언어의 장벽은 미소와 눈빛으로 넘으며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애틋함 때문에 더 가까워집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건넬 이야깃거리를 준비하여 연습하기도 합니다. 모두 어눌한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만나다 보니 몸은 힘들어도 표정들은 한결같이 밝고 진지해 보입니다. 제 나이 또래의 두 분의 수줍은 미소를 레온까지는 자주 볼 수 있겠지요. 오늘도 우연히 같은 숙소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라뇽(Granon) 이후부터 길은 로그로뇨에서 브루고스로 이어지는 N-120 고속도로 옆길을 주로 걸으며 가끔씩 도로를 건너게 되는데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 그리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벨로라도(Belorado)에 도착합니다. 공립 알베르게의 숙소 창 밖으로는 또 눈이 펄펄 내립니다. 곧 멈출 테지만 난방이 쉬원찮은 오늘 밤이 걱정됩니다. 건성으로 듣는 버릇이 있는 저는 이번 카미노 길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답니다. 몇 년 전 1월에 스페인 여행을 한 경험이 있었는데 엄청 따뜻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4월에도 눈이 올 수 있을 것이란 정보를 무시한 것이지요.


연 3일 반복되는 세찬 바람과 눈 그리고 저녁에 느끼는 한기는 엄청 견디기 힘듭니다. 벨로라도(Belorado)에서 만난 공립 알베르게에는 침대가 12개가 있었는데 우리 부부 두 사람만 자게 되었습니다. 숙소의 한기도 가시지 않았는데, 직원이 일찍 퇴근해버려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 추워 저녁도 먹을 겸 광장으로 나가니 동네 선술집에 스페인 현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어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실내가 따뜻하고 동네 아저씨들의 시선도 따뜻합니다. 너스레 떨기를 좋아하는 남편이 스페인 아저씨들과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누며 허허 웃습니다. 간단하게 타파스와 와인 한 잔을 마시고 성당 근처로 발길을 돌립니다.


일요일이라 대부분 상점이 문을 닫아 썰렁한 광장에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며 깔깔 웃고 있습니다. 와인에 얼큰해진 남편이 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다가가 공놀이에 참여합니다. 유전적으로 축구를 좋아하는지 스페인 아이들이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썰렁한 날씨로 마을 구경을 멈추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옵니다. 잉글랜드 에섹스에서 오신 60대 후반의 형제분 중 형님이 몸이 안 좋아서 나헤라에서 하루 더 머무시기로 하셨는데 우리도 감기에 안 걸리게 조심해야겠습니다. 어제 산토도밍고 중국인 마트에서 속바지를 하나씩 사 입은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남편은 필요 없다는데 제가 우겨서 사주니 역시 마누라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옛말이 맞다며 고마움을 표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제 손이 곱아 더 이상 쓸 수가 없네요.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옷을 모두 껴입고 침낭에 들어가야겠습니다. 오전에 만난 한국인 청년이 베드 버그로 고생했다는데 신경 쓰여서 퇴치 패드를 침낭에 넣고 자려합니다.

내일은 아헤스까지 27킬로미터가 좀 넘는 긴 일정인데 1,100미터가 넘는 고지도 오르고 소나무 숲길을 가는 산행길이 이어질 것 같아 걱정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됩니다. 내일도 까미노 친구들을 만나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걸어 보겠습니다.




< 베짱이 일이의 일기 >


날짜 가는 줄 모르고 걷는다. 이 길의 매력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일까? 이 길을 걷는 것이 어느덧 새로운 일상으로 정착한 것이다. 처음에 두려움과 설렘으로 긴장되었던 몸과 마음이 초록의 대지와 자연이 주는 생명력과 영성으로 충만해진 탓일까? 비록 비바람과 눈보라를 헤치고 걷는 진흙탕 길은 마치 내 인생의 혹독한 시련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나는 걸으며 지난 시간의 아물지 않았던 상처와 찌꺼기들을 길 위에 내려놓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몸은 더 가벼워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 자신의 앞날을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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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를 떠난다. 아직 이른 아침의 푸른 여명의 기운이 채 가시도 않았다. 날은 여전히 차고 흐리다.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는 ‘도밍고 데 라 칼사다(Domingo de la Calzada)’라는 이곳 리오하(Rioja) 출신 인물을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이곳에 순례자를 위한 병원과 성당을 설립하는 등 까미노의 후원자였다. 그가 죽은 후 그를 기리는 성당이 그의 묘 위에 세워진 것이다. 대성당 내부는 들어갈 수가 없었고 외관만 둘러본다. 둔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건물 뒤로 오롯이 솟아 어둑한 배경 속에서도 화려하게 빛나는 세밀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된 바로크 양식의 종탑이 아름답다.


광장 앞 파라도르(Parador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의 내부도 들여다본다. 은은한 조명 속에 고풍스러운 식당의 넓은 홀이 보인다. 중세 귀족들의 식사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여기 파라도르는 다른 대도시의 것들보다 숙박비가 저렴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파라도르에서 하루 숙박을 해 볼 예정인데 아직 확정하지도 예약도 하지 않았다.






골목길을 나오자 탁 트인 벌판과 도로가 펼쳐진다. 어둡고 흐린 날씨에 아침의 찬 기운이 몸을 움츠리게 한다. 벌판에는 여지없이 강이 흐르고 다리를 지나기 전 작고 아담한 예배당에서 잠깐 발길을 멈춘다. 아내가 기도를 올리는 동안 나도 아내의 기도를 잘 들어주시길 기원한다.


흐린 하늘 위로 간간이 햇살이 비친다. 어제와는 달리 바람도 한결 부드럽다.

오늘은 벨로라도(Belorado)까지 가는 여정이다. 독일 출신 그룹 Goombay Dance Band (굼베이 댄스 밴드)의 엘도라도(El Dorado)라는 노래가 연상되는 도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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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초록의 밀밭길과 벽돌을 쌓아 올린 듯한 황금색 건초더미가 띄엄띄엄 보이고, 가끔씩 펼쳐지는 노란 유채꽃의 향연에 도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그라뇽(Granon)이다.

순례자를 그린 벽화가 정겨운 마을 입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을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한 시간 정도 걸으니 레데시아 델 까미노(Redecilla del Camino)다. 이곳의 사각형의 종탑이 있는 인상적인 로마네스크 성당과 광장의 로마시대 유적으로 보이는 pila bautismal(洗禮盤)이 유명한 곳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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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걷는다. 바람이 몰고 온 먹구름과 습도가 높은 날씨 때문에 좀 춥기는 하지만 어제의 날씨에 비하면 오늘은 꽃길을 걷는 것이다. 산토 도밍고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가 태어난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를 지난다. 코엘료가 묵었다는 알베르게는 찾을 수 없었다.


비야마이오 델 리오(villamayor del Rio)라는 마을에서 반가운 친구들을 만났다. 시애틀에서 온 D와 S 일행이다. 프랑스 루트의 시작부터 함께 길을 걷고 있다. 이들은 부르고스(Burgos)에서 순례를 마치고 빌바오(Bilbao)에서 파리를 거쳐 고향으로 간다.

스페인어를 잘 모르지만 이 마을 이름이 ‘리오 강의 큰 형’이라는 뜻 같은데, 온화한 성품의 S는 나보다 나이가 위라 내가 형이라 부르고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아재 개그로 우리를 편하게 해 주는 D는 동생이다. 부르고스까지 시간은 남았으나 이제 서서히 이별연습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네도 타고 노래도 부르며 이별의 아쉬움을 미리 나눈다.


벨로라도(Belorado)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인데 썩 아름답지도 않고 다소 딱딱한 역사화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벽화의 중심인물은 16세기 초 이곳을 통치했던 알폰소 7세이다. 벨로라도는 리오하 주 경계의 부르고스(Burgos) 주에 속하며 광역 자치주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 땅이다. 카스티야 이 레온은 스페인은 물론 유럽에서 가장 큰 자치주다.


벨로라도 거리는 날씨만큼이나 썰렁하다. 광장 주변에도 큰 슈퍼 문을 일찍 닫았는지 작은 구멍가게만 열려 있었는데 공놀이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얻은 답은 오늘이 일요일 오후라는 것이다. 날짜 가는 것은 오늘이 며칠 차라는 것만 체크할 뿐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는 모르고 열흘을 걸어온 것 같다.


숙소 도착 후 아내가 하루 기록을 정리하여 ‘어른들의 산티아고'라는 카페에 글을 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 도시를 둘러보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밥 먹으러 나가는 시간도 지체된다. 10일 내내 이런 식이지만 이번 순례길에서 여행작가로의 시작을 꿈꾸는 아내의 목표이기에 감수해야 한다. 모두 완벽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길을 두 번 걷는다. 한 번은 발과 가슴으로 또 한 번은 머리와 손으로 말이다.


어둑해져 거리에 다시 나선다. 저녁의 재미는 아무래도 머무는 지역의 사랑방 같은 술집을 찾아가 그곳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이 먹는 음식과 술을 마시는 재미만 한 것이 있으랴. 길을 같이 걷는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도 의미 있지만, 이렇게 현지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의미 있다. 스페인어를 잘 구사할 수 없지만 서로 마음만 있으면 눈빛으로 통한다. 이것이 보편적 언어(universal language)이다.


나이 지긋한 마을 촌노들은 어디에나 있고 점심이나 저녁이나 카페테리아에서 맥주나 와인 한 잔을 놓고 친구들과 모여 잡담을 나누는 풍경이 정겹다. 그 자리에 슬쩍 끼어 들어가는 눈치를 그동안 여행 다니면서 익혀온 터라, 약간의 낭패를 볼 때도 있지만 대개는 짧지만 강렬한 즐거움으로 이어지고 사진 한 장으로 그 순간의 기억을 포착하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까미노의 길동무는 순례 참가자들이기도 하지만, 그 길을 오래 동안 지켜보며 응원해 주는 지역 주민들이기도 하다. 특히 오래된 카페테리아의 주인들이나 서빙하는 분들.. 그 가족들..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그들의 식사 장면을 자연스레 관찰하게 되는 묘미를 즐기는 것은 길가는 나그네의 피할 수 없는 특권이다. 말이 통하지 않기에 눈빛과 표정과 몸짓을 위주로 대화를 나누어도 포도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벽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과의 눈빛 대화를 좋아한다. 그리 살 날이 많지 않은 분들이고 내가 다시 온다 해도 다시 볼 확률이 적기 때문에 더 애틋하다. 이빨 빠진 볼우물에 피어오르는 따뜻한 미소와 구부정한 어깨는 나의 머지않은 미래가 아닌가? 오늘 벨로라도 선술집에서 만난 노인과 마음이 통해 사진 한 장을 같이 찍는다.


까미노 길의 도시와 마을마다 성당 묘지가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묘지 사진은 찍지 말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도 그만하자. 그냥 살아 있음을 매일 축하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뻐하자.

내가 그에게 말한다. '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 그는 웃는다.

우수에 젖은 그 미소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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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길에서 만난 캘리포니아 친구들이 열띤 토론을 하며 앉아 있다. 반가운 인사를 짧게 나누고는 자기들 이야기만 한다. '치어즈'를 할 타이밍도 주지 않는다.

옆에서 아내는 오늘 카페에 올릴 글 정리와 사진 선정에 여념이 없다. 나는 애꿎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맥주를 홀짝거린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이때 건너편 테이블의 귀여운 소녀 아이가 이쪽으로 왔는데 아내의 컴퓨터 전선을 건드릴까 아빠가 아이를 엄하게 소리치며 부른다. 순간 미안한 마음도 들고 어색한 국면도 전환시킬 겸 크게 웃음 지으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다.


일요일 저녁 늦게까지 얼마 남지 않은 휴식의 시간을 보내기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왁자한 소리를 뒤로 하고 숙소로 향한다. 광장에는 은은한 조명을 받아 더 운치 있어 보이는 마을 성당과 예쁜 건물들이 있고 건물들 사이로 어둠이 내린 골목들이 유난히 아름답다.

숙소는 생각보다 춥지 않아 고맙다. 오늘도 추운 날이었기에 아내는 예방 차원에서 감기약 한 알을 권한다.

내일은 11일 차... 기록적인 날이다. 남은 여정의 삼분의 일쯤이 완성되는 날이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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