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프로미스타(Fromista) (25.5Km 8시 출발-16시 도착)
< 상세 일정 : 카스트로헤리스 (Castrojeriz 0.0km) → 모스뗄라레스 언덕(Alto de Mostelares 3.5km) → 이떼로 델 가스띠요(Itero del Castillo 9.5km) → 이떼로 데 라 베가(Itero de la Vega 11.5km) → 보아디야 델 까미노(Boadilla del Camino 19.5km) → 프로미스타(Fromista 25.5km) >
< by 개미(옥이) >
알베르게 아침 식사 자리에서 드디어 프랑스 아주머니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알려 주십니다. 마리세(MARYSE)와 이브에떼(YVETTE)라 하며 우리가 프랑스어 발음하기를 힘들어하자 입 모양을 교정해 주며 따라 하라 합니다. 생각해 보니 로그로뇨(Loglono)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거의 같은 숙소에 머물렀습니다. 비슷한 경로와 속도를 가지고 있어 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정을 쌓은 덕분에 저를 동생같이 생각하는지 만날 때마다 챙겨 줍니다. 또 혼자 여행하는 남아공 아주머니 다리아(DARIA)도 자신의 이름을 공책에 적어 주며 알려 줍니다. 오렌지 껍질을 대신 까주는 저를 보면서 “남편의 마더”라 하며 농담을 던져 한바탕 웃습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하루 종일 바람을 가르며 걷습니다.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 마을 입구를 나오자마자 황량한 모스텔라레스(Alt de Mostelares)의 고개를 굽이굽이 오릅니다. 눈앞에 정상이 보이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산 정상에 두 개의 점이 보이더니 이내 없어집니다. 속도를 내어 보지만 이미 상당히 높은 고원에 올라와 있어 금방 숨이 차기 때문에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내 속도로 꾸준히 걷습니다. 걷다가 어느 순간 잠깐 쉬거나, 땀이 나 옷을 벗기 위해 멈추는 정도의 짧은 시간인데도 쉬지 않고 걷는 앞사람과의 격차는 커져 버립니다.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같지요.
정상에 올라서니 메세타 평원입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어제에 이어 하늘은 흐리고,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람을 거슬러 걷다 보니 자칫 몸이 날아갈 것 같습니다. 구름에 가려진 햇님이 어서 나와 바람을 누그러뜨려 주기를 기도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부르고스 지역과 팔렌시아 지역의 경계가 되는 피수에르 강을 건너 이테로 데라 베가(Itero del Castillo) 마을에 도착합니다. 드디어 마을 초입에 있는 카페를 찾았는데 게리와 쳐리스 부부가 카페를 막 나오며 우리를 발견하고 뛰어와 끌어안습니다. 수리비 마을 초입 내리막길에서 힘들어하더니 평지에서는 다람쥐처럼 빠르고 부지런하여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부부입니다. 이 카페는 목이 좋아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모두 거쳐 갑니다. 늦게 도착한 한국인 젊은이는 주문이 밀려 잠깐 쉬었다 그냥 갑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작은 구릉들과 언덕의 굴곡이 끝나고 지평선까지 멀리 뻗어 있는 너른 평원만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어진 바람과의 사투, 이제는 거스르지 않고 타협하기로 합니다. 마치 절규하고 포효하는, 때로는 간절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그 옛날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프랑크족들이나 바다 건너 아프리카 대륙의 무어인들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라 하던데, 무수한 병사들과 주민들이 희생되어 그들의 원혼이 울부짖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지금은 한가롭게 이 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들에게 이 땅에 숨겨진 이야기를 격하게 들려주는 것 같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 가정집 같은 알베르게 겸 카페 >
두 번째 마을 보아디야 델 카미노(Boadilla del Camino) 마을에 도착합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성모승천 성당과 후기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7m 높이의 ‘심판의 기둥’이라는 원주 탑을 구경합니다. 이 기둥은 중세 공개 재판에 사용되던 것으로, 중대한 죄를 지은 사람을 묶어 놓았던 기둥이라 합니다. 마을 초입 카페에 순례자들이 많이 모여 있어, 조금 더 걸어 한적한 카페를 찾습니다. 알베르게를 겸하고 있는 카페인데 여행을 좋아하다 이곳에 정착한 네덜란드 부부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오늘의 야채수프’와 샌드위치도 맛있고, 알베르게도 북유럽풍으로 이전 알베르게들과는 달리 분위기가 정갈하고 세련되어 보입니다. 캐나다 아주머니와 우리 한국 젊은이는 이곳에 머무르기로 합니다. 잘한 결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정대로 6.4km를 더 가기로 합니다.
바람이 좀 잦아들 줄 알았는데 웬걸요, 지금까지의 바람보다 더욱 세찬 기세로 우리를 몰아칩니다. 다행히 길은 걷기 좋은 흙길이고 검정 버드나무 길입니다. 18세기 후반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건설했다는 까스띠야 운하 옆으로 까미노 순례길이 쭉 이어집니다. 바로 운하 옆쪽으로 가다가는 바람에 떠밀려 물에 빠질 것 같아 살짝 비껴 걸어 봅니다. 저기 오늘의 목적지 프로미스타(Fromista)가 보입니다. 마지막 힘을 냅니다.
네덜란드 부부가 추천한 프로미스타 알베르게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모작 등을 비롯하여 그림이 많고 제법 오래된 가구가 있는 북유럽풍의 멋지고 깨끗한 알베르게입니다. 저녁 식사 제공은 하지 않는다면서 근처 좋은 레스토랑을 소개해 주는 주인장은 백발의 멋진 분입니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요란한 악대 소리가 납니다. 이곳 고등학생들의 브라스 밴드가 연주를 하며 지나갑니다. 구경하는 우리를 보고 1 유로씩 내라고 합니다. 유로 가진 게 없어 주머니의 사탕을 한 개씩 나누어 주니 어떤 친구가 자기 이름을 이야기하며 악수를 청합니다. 이 추운 날씨에 학생들의 열정이 부럽습니다.
그리고 보니 오늘이 불금입니다. 주머니에 유로화를 준비해 거리로 나가 보아야겠습니다. 알베르게 주인장이 소개한 레스토랑은 가성비 좋은 식당입니다. 순례자 메뉴를 주문하려는데 한글로 된 메뉴판을 내밉니다. 까미노 순례길에서 KOREA는 엄청 유명합니다. 모처럼 편하게 메뉴를 주문했는데 정말 맛있습니다. 함께 자리한 멕시코 아저씨가 기분이 좋은지 와인 한 잔을 더 주문합니다. 화상으로 손자 손녀와 통화하며 우리를 굳이 소개합니다. 가족들의 격한 인사에 가슴이 훈훈해집니다. 기분 좋은 저녁입니다. 바람 때문에 고갈된 에너지를 보충했으니 내일은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합니다.
< by 베짱이(일이) >
15라는 숫자가 이렇게 의미심장했던 적이 있었던가? 처음으로 매일 걷기만 하는 단순한 일상이 그것도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15일을 이어가고 있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 혼자이거나 부부 둘이라 하더라도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25~30Km씩 열흘 이상을 걸어 300Km를 돌파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이 500Km이다.. 휴.. 숫자가 이토록 크게 중압감을 준 적이 있었던가? 그저 무심히 숫자를 무시하고 걸었는데, 아마 13일째 되는 날 어느 지점에서 300Km 고지를 넘은 것 같다. 이제 400Km 고지를 넘으면 절반의 문턱을 넘는 것이다. 너무도 긴 여정이라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냥 매일 목표로 한 마을과 도시를 향하여 어제 머물렀던 알베르게를 ‘기계적으로’ 떠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인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람들을 이끄는 이 길의 힘은 무엇일까? 이 길은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되고 이어진 길이다. 그러나 종교와 무관하게 이 길을 걷는 이들도 많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아, 그렇다. 걷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사연을 풀어내고 새로운 사연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코엘료가 <순례자(Pilgrimage)>에서 검을 얻는 것으로, <연금술사(The Alchemist)>에서는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으로 상징하고 있는 그 ‘무엇’을 얻으려는 각자의 염원이 사연 속에 감추어진 검과 보물이리라. 그렇다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전망이나 아이디어? 아니면 자신감? 과거의 깔끔한 정리?
내 인생 후반에 이 길 끝에서 얻게 될 선물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나 자신이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앞으로 그 부족함을 채울 힘을 조금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안거 기간 내내 화두를 하나 들고 참선하듯 단순하지만 명료하게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길은 내게 이미 큰 선물이다. 물론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 물리적 거리를 생각하면 너무 성급한 결론이다.
외부에 조금씩 더 열리는 내부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몸과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지는 느낌도 있다. 길 위에서 만나는 바람과 구름과 고원에서 만나는 모든 생명들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더 열리고 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편견이나 선입견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걸었고, 걷고 있고, 또 걷기를 원하는 이 길이 각자 또는 모두에게 장정(長程)이고, 따로 또 함께 쓰는 대장정의 드라마이기에 각자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주는 그 무엇이리라. 예단이겠지만 길 위에 축적된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내일 다시 걸을 수 있게 하는 힘이며 끝까지 갈 수 있게 이끌어 주는 힘인 것 같다. 그 힘은 이 길 위에 쓰여진 구원의 기록이었고 피와 땀으로 얼룩진 평화의 기도였고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고원의 세찬 바람 속에 빠져나가 버린 내 몸속 에너지가 다시 다른 에너지로 응축되어 내 몸에 스며든다. 내일을 두려워 말고 오늘을 직면하자. 오늘을 당차게 살아가는 것이 욕된 과거를 씻고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이 들게 하는 저녁이다. 내일의 거센 바람도 나를 단련시키고 성숙시키는 에너지로 받아들이자.
프로미스타(Fromista) 는 고원에 부는 바람에 맞서 건설된 마을이다. 부활절을 앞두고 학생들이 관악기와 타악기를 연주하며 행진한다. 추운 날씨에도 이들의 밝은 표정과 씩씩한 몸짓에서 삶은 이어진다는 믿음 또한 갖게 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