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햇빛, 바람, 나무 & 사람(2일 차)

(2022.3.26. 토)

by 옥이와 일이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수비리(Zubiri) (23.0 KM 7시 출발 – 15시 도착)

< 상세 일정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0.0km) → 부르게떼(Burguete 3.0km) → 에스삐날(Espinal 7.0km) → 매스키리츠고개(Alto de Mezkirtz 9.0km) → 비스까렛(Bizkarreta 12.5km) → 린소아인(Lintzoain 14.5km) → 에로고개(Alto de Erro 19.0km) → 수비리(Zubiri 23.0km)>


< by 개미(옥이)>


이른 아침 출발한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의 풍경은 생장피에드 포르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넓게 펼쳐진 목초지에서는 말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새벽 이슬이 풀밭에 서리가 되어 하얗게 내려앉았고, 해뜨기 전이라 그런지 쌀쌀합니다. 알베르게를 나와 오솔길로 들어서 걷다 보니 조그마한 시골 동네 부르게떼(Burguete)가 나옵니다. 반대편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이 걸어오며 순례자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고 발걸음도 상쾌합니다. 시냇물을 건너 무념무상으로 걸어 산길로 들어서니 온통 너도 밤나무, 떡갈나무, 낙엽송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오로지 들리는 것은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뿐입니다. 그 위에 쏟아지는 햇빛과 인사하고, 나무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걸으며 땅들과 교감하고, 촉촉이 젖어 있는 풀들과 나의 발이 만납니다. 어떤 잡념도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자연이 주는 평안함과 휴식에 복잡한 머리가 단순해집니다. 작은 것에도 행복하고, 순례길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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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지 않아서 출출합니다. 어느덧 11.7KM 지점의 비스까렛(Bizkarreta)에 도착해 길목 카페에서 커피와 스페인 오믈렛으로 아침을 먹습니다. 테이블 주변으로 하나 둘 순례객들이 모여듭니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만난 청년 둘이 옆자리에 앉으며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어제저녁 식사할 때 송어를 나누어 주었더니 더 친근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례길에서는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친구가 됩니다. 초반에 만난 하얀 콧수염이 멋진 프랑스 아저씨는 리옹(Lyon)부터 900km를 걸어서 왔다고 합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팜플로나(41.9km)까지여서 아침 식사도 건너뛰고 부지런히 간다고 합니다. 미국인 젊은이와 캐나다 노부인의 조합은 마치 모자 같았으나, 알고 보니 순례길에서 만났다 합니다. 미국인 청년이 순례길에 인상 깊었던 장면을 예쁜 삽화로 표현한 손 수첩을 보여 줍니다. 상당히 수준 있어 보이는 그림이라 칭찬합니다. 그런데 어제 만났던 더그와 진 일행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날 복통이 난 줄 알고 침대까지 찾아와 위로해주었는데, 길을 걷는 내내 만날 수가 없어 궁금합니다. 다행히 저녁 식당에서 반가운 해후를 했습니다. 사려 깊고 유쾌한 유머로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나를 편안하게 해 줍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도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과 눈빛과 몸짓으로 진심을 나누며 친구가 됩니다. 순례길의 또 다른 큰 즐거움입니다. 때로는 길 위에서, 또는 카페에서, 숙소에서, 국가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가 다름에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동질감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길을 시작할 때는 힘차고 호기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데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힘들고 지치게 됩니다. 오늘의 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어제에 비해 비교적 순조롭습니다. 우리나라 둘레길 수준으로 구릉을 올라 산길을 걸어가 능선을 넘으면 작은 마을이 나오고, 또 거기에는 작은 성당이 마을의 중심에 있고, 주변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오늘은 운이 좋게도 코엘료가 쓴 <연금술사>의 주인공 '산티아고'를 만났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산티아고의 양보다 훨씬 많은 100마리도 넘을법한 양 떼를 몰고 뛰어갑니다. 양들도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년의 뒤를 따라 뛰어갑니다. 맨 뒤에 오는 양몰이 개는 두리번거리며 빠진 양이 없는지를 여러 차례 확인합니다. 진풍경입니다. 잠시 후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양 떼들을 보며 조금 전 그들이 필사적으로 내달린 이유를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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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릉을 몇 개 넘어 작은 마을들을 지나치니 이정표에 수비리(Zubiri) 4.5km라고 쓰여 있습니다. 반갑기는 하나 여기부터 고통의 시작입니다. 아마도 조금만 가면 될 것이란 기대를 하는 순간부터 빨리 도착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그럴 것입니다. 이 구간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 날카로운 절리와 부서진 파편들 때문에 발이 몹시 피곤합니다. 앞에 오른쪽 다리를 끌다시피 걸어가는 아주머니가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니 남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로 응원하며 함께 길을 걸어가겠다는 믿음이 느껴집니다. 지쳤던 다리에 믿음이라는 에너지를 충전하여 힘을 냅니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수비리(Zubiri)에 도착합니다. 공립 알베르게가 문을 열지 않아 사립 알베르게를 찾습니다. 한 방에 8명이 자게 되어 있는 곳입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저녁 6시가 되자 퇴근을 하고, 알베르게에는 순례자들만이 남아 내일 길 떠날 준비와 정리로 부산합니다. 어느새 알베르게 통금시간인 10시가 됩니다. 모두 내일의 순례길을 위해 잠자리에 듭니다.


< by 베짱이(일이)>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 서둘러 길을 나선다. 유서 깊은 성당의 구석구석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다음 목표를 향해 오직 걷기에만 집중하느라 여유 없는 우리 모습이 내심 씁쓸하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차차 긴장도 풀리고 이 길 위의 생활에 익숙해지면 여유도 좀 생기지 않을까? 아침 이른 시간임에도 알베르게 봉사자들이 나와 길 떠나는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다음에 나폴레옹 루트를 넘으며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멀어지는 수도원 건물들을 뒤로하고 둘째 날의 여정을 시작한다.


몸은 신기하게도 어제의 피로를 극복하고 오늘을 위한 준비가 되어 가뿐하고 기분도 상쾌하다. 이른 아침의 차고 신선한 공기와 이른 봄의 초목들로 눈 또한 시원하다. 그러나 차가운 날씨에 손이 시려 장갑을 찾아 낀다. 새벽이슬도 하얗게 풀잎에 얼어붙었다. 한기를 이기려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쭉쭉 뻗은 나무 숲 사이로 아르가(Arga) 강물이 흐르는 수비리(Zubiri)는 걷기 좋은 길이다. 강물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맑고 푸른 계곡과 초록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조화를 이루어 환상적 풍경을 자아낸다.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푸른 목초지에서 말들이 풀을 뜯는 목가적 풍경도 자주 눈에 띤다. 그러다가 양 떼를 목초지로 이동시키는 소년 목동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연금술사>의 산티아고가 수비리에 나타난 것처럼... 대개 평탄한 길이고 서서히 고도가 낮아지는 길이어서 어제의 산길에 비하면 피로도가 훨씬 덜 하다. 물론 수비리에 도착하기 전의 마지막 내리막 길은 날카로운 절리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단단히 내딛지 않으면 발목을 삐거나 다칠 수도 있는 길이어서 조심해야 했다.


강폭이 조금 넓어진 곳에 멋진 돌다리가 나온다. 광견병 다리(El Puente de La Rabia)라는 이름의 아치교다. 이 다리를 건너면 광견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는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수비리(Zubiri)가 바스크어로 ‘다리의 마을’이란 뜻이라는데 내일 팜플로나 가는 길도 강과 다리가 많은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걷게 되리라 기대된다.


오늘도 23Km를 걸었다. 배도 고프고 지친다. 어서 쉬어야겠다. 첫날에 이어 짐 배달 서비스(동키 서비스)를 받는다. 총 55일 일정의 짐을 가지고 왔으니 둘이 나누어지기에는 짐의 양이 너무 많아서이다. 내일 팜플로나에서는 순례길에 필요없는 짐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보내려 한다. 그러면 숙소를 미리 정하지 않아도 된다. 숙소를 미리 정하지 않으면 머물고 싶은 도시와 마을을 우리가 걷는 속도와 몸의 상태 등을 보아가며 정할 수 있다. 오늘의 숙소(Palo de Avellano-개암나무 지팡이)를 찾아 짐을 내리고 식당을 찾는다. 이 식당에서 어제 만난 미국인 커플들과 해후한다. 성당 미사 때 아내가 몸이 불편한 것을 보고는 알베르게 침상까지 와서 위로를 하고 간 부부와 다른 한 쌍의 커플이다.


이제 이틀째인데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화첩을 들고 다니는 미국인 청년, 어제 저녁 송어를 나눈 독일인 청년, 캐나다 누님, 아버지가 한국에서 일을 한 적 있다는 네팔계 미국인 청년, 리옹에서부터 순례길을 걸어온 프랑스 아저씨.. 잠깐 스쳐 지나며 짧게 나누는 인사와 표정 속에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묻어 난다. 포도주 한 병을 둘이 나누어 마시고 숙소로 들어서며 또 새로운 인물들과 인사를 나눈다. 국적과 나이는 다르지만 같은 숙소 같은 방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자야 하는 사람들이다. 영국과 미국, 캐나다 그리고 어제 내 앞의 침상에서 같이 잠을 잔 대만 처녀도 있었다. 어제 무릎에 상처 난 곳에 내가 약을 발라 준 그이였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함께 온 한국인 친구에게 우리 부부 이야기를 했다면서 친구를 부른다. 한국인 H는 금지된 나폴레옹 루트를 넘어온 '국제'그룹의 일원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서 일탈과 모험의 유혹이 왜 없으랴. 때로는 목숨 건 모험도 과태료나 벌금의 경제적 압박도 이 유혹을 이기지는 못하는 법이다. 다음에는 나도 나폴레옹 루트로 피레네를 넘으리라.


이층 침상이 넷이 있는 좁은 방이다. 국적이 모두 다르고 성별과 나이도 각각인 여덟 명의 동숙이다. 10시 소등 시간이 지나니 숙소 내부는 고요하다. 숙소 밖은 주말을 즐기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로 시끌 시끌하다. 이 소음은 거의 열 한시가 되어서야 진정이 되고, 본격적으로 순례자들의 코 고는 소리의 합주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진다. 코 고는 소리는 각기 다른 음색과 리듬을 가지고 지휘자 없이 자유롭게 연주되는데 인터미션을 기다렸다 까무룩 잠에 빠져든다. 때마침 성당의 시보가 울린다. 마을로 들어오다 본 산에스테반(San Esteban) 성당의 종탑에서 나는 소리일 것이다. 둘째 날의 잠 못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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