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에 물을 안 준지 두 달쯤 된 것 같다. 두 달이라니, 쓰고 보니 너무했네. 고문관이 된 것처럼 스스로가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미안해진다 많이. 1주일에 한 번 주면 되는데 처음으로 꼬박꼬박 물을 준 화분이다.
이제껏 식물을 6개월 이상 키워본 적이 없다. 키우기 어려운 식물은 당연하고 죽이기가 어렵다는 식물까지 오래 키워본 적이 없었다. 야심 차게 들인 화분이 죽었는데 더욱 슬픈 것은 처분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었다. 쌀포대 같은 곳에 화분을 넣고 부숴서 내놔야 한다고 했다. 쌀포대는 어디서 구하며, 큰 화분을 무슨 수로 부수나. 어찌하나 고민하는 동안 죽은 식물은 점점 말라비틀어져 갔다. 집 앞에는 1주일에 한 번씩 화분을 싣고 오는 트럭이 있었다. 아저씨께 여쭤보니 화분을 하나 사면 갖다 주시면서 가져가시겠다고 한다. 키우기 가장 쉬운 아이로 부탁드리고 죽은 식물 1을 보냈다. 죽이기 어려울 거라고 아저씨께서 호언장담하셨던 그 식물도 얼마 안 가 명을 다했다. 이번에는 이사를 하게 되어 죽은 식물 2를 비교적 쉽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집들이 선물로 화분이 들어왔다. 행복한 집에서 잘 살라고 쓰인 큰 리본까지 달고 왔던 화분을 죽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음의 부담까지 진채 열심히 돌봤지만 얼마 안 가 죽고 말았다. 아, 내 손은 진정 마이너스의 손인가.
이번엔 달라진 나를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잔뜩 부풀어 왔다. 꼬박꼬박 주다가 방학 때 방심했는지 까먹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다음 물 주는 요일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날짜를 지켜 줘야지 했다. 멀쩡해 보여서 그동안 물을 너무 자주 줬던 것은 아닌가 갸우뚱했다. 물 주는 것을 또 까먹었는데 여전히 멀쩡해 보였다. 그게 몇 번 반복되다가 투명망토라도 두른 듯 아예 화분의 존재를 잊었다. 어느 날 말라비틀어진 누런 나뭇잎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물 줘야겠네, 하고는 까먹고 하루가 지났고 또 며칠이 지났다. 유독 눈에 들어온 날,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하던 일을 멈췄다. 보통 1주일에 한 번 물을 줬을 때는 샤워기로 화분 끝까지 물을 채우면 티끌만큼씩 물이 내려갔다. 이번에는 물을 채우기가 무섭게 꼴꼴꼴 소리를 내며 흡수한다. 물을 가득 주는데도 계속해서 스르륵스르륵 없어진다. 많이 목말랐구나. 네가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죽을 지경이었구나. 한없이 미안해진다. 5분도 넘게 물을 준 것 같다. 오늘 물을 주지 않았다면 영영 기력을 회복하지 못할 뻔했다. 멀쩡해 보였는데 아니었다. 화분이 살아있을 때까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물 주기다. 생명이 있는데 당연한 사실이다.
고작 일주일에 한 번 물 주는 것뿐인데 왜 육아가 생각나는 걸까. 육아도 살림도 내겐 너무 어려운 존재다. 화분 하나 아니, 나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데 이 집을 돌보고 한 생명을 어른으로 키워내는 것이 가끔 혹은 자주 벅차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애가 여럿인 것도 아니고 유별한 것도 아니다. 남들이 봤을 때 의아해 할 수 있지만 늘 헉헉댄다. 본인이 낳아놓고 왜 저리 힘들어하나 할 수도 있다. 사람 만드는 건데 힘이 드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 세상에 아이를 키우는 사람 중에 육아의 고단함을 100% 수용할 결심을 하고 아이를 낳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아이가 태어나 먹고 자고를 반복할 때, 왜 나한테 아무도 육아가 이렇게 힘든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조금 원망을 했다. 쌓인 설거지를 하고 어제 돌렸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빨랫감이 나오는 아침을 마주하며 결혼하면 끊임없이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왜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약간 화가 났다. 당연한 사실이라 아무도 일러줄 생각을 못했으려나 짐작해 본다.
그 시절 나는 결혼을 할까 말까, 아이를 낳을까 말까 따져보지 않았다. 결혼의 달콤함만 생각했고 쓴 맛은 예상한 적 없었다. 아이의 보송함만 기대했고 육아의 찌듦은 들은 적이 없었다. 하긴 안다고 해서 결혼을 안 하거나 아이를 안 낳았겠나. 바로 옆에서 나의 육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동생도 지금 육아의 매운맛을 체험 중이다. 결혼한 것, 아이 낳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잊히지 않는 행복함과 경험한 적 없는 달콤함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적나라한 현실을 알았다면 겁이 났을 것 같다.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마지막에 힘이 빠졌던 것은 변수 하나를 제하고는 모든 변수를 고정시켜 놓은 전제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실에서 가당키나 한 전제인가. 결과를 예상한다는 것은 그런 치명적 약점이 있다. 결혼도 육아도 아무리 꼼꼼히 따졌어도 예상한 결괏값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는 늘 튀어나오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육아의 고됨은 다 비슷하다. 아이를 키우든 안 키우든,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누구든 각자의 삶에는 어려움이 있다. 각자의 상황이 다르고 깜냥이 다르므로 힘듦의 크기는 절대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다. 어떤 일이든 당사자에게는 자기 일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 알면서도 나는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그보다 더 힘든 사람 얘기를 들이밀고 만다. 그 순간이 지나면 왜 그랬을까 바로 후회하면서 자꾸만 그런다. 더 힘든 사람이 있으니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취지인데 의도만 훌륭하다. 해결책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닐 테니 그런 취지가 전달될 리가 없다. 힘들다 하면 힘들구나, 하면 되는데 그 말이 왜 이리 하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왜 이리 듣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예전 전화에는 자동응답이라는 기능이 있었다. 녹음된 인사말이 나오고 삐 소리 이후에 용건을 녹음할 수 있었다. 육아든 회사생활이든 힘들다 내게 토로하면 녹음된 인사말처럼 위로를 먼저 틀고 싶다.
'오늘 하루도 애썼어요. 힘들었을 텐데 견디느라 고생했어요. 내일은 좀 더 나은 하루가 되길 바랄게요.'
삶에 무슨 해답이 있겠는가? 엄청난 소유도, 엄청난 만족감도, 엄청난 성취도 답이 아니고 그냥 저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있을 뿐이라는 말.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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