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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Jul 19. 2024

대만에는 타지 않아야 할 버스가 있다.

아이와 처음 갔던 해외 여행지가 대만이었다. 추억여행을 겸해 몇 년 만에 대만을 다시 가기로 했다. 이제는 많이 자라 의사가 분명해진 아이에게 여행 가이드북을 주었다. 가보고 싶은 곳이나 먹고 싶은 것을 추려보라고 했다. 아이는 천등을 날리고 싶고 지우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지우펀은 저녁이면 좁은 골목을 홍등이 환히 밝히는 이국적 야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센과 치히로의 모험' 속 모습의 모델이 되며 더욱 유명세를 탔다. 마침 지우펀에서 찍은 아이 사진이 있어 같은 배경에서 부쩍 큰 아이의 모습을 찍어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해열루’라는 찻집에서 볼 수 있는 지우펀 야경.

타이베이에 가는 사람들은 근교의 네 도시를 많이 구경하러 간다. 기이한 암석이 있는 예류, 천등을 날리는 스펀, 과거 금광이 있었던 진과스, 그리고 지우펀이다. '예스진지'라고 일컫는 코스인데, 택시를 빌려 하루에 네 군데를 모두 돌며 구경한다. 지난 여행 때 우리도 택시투어를 했다. 예류에서는 여왕 머리를 닮은 기이한 암석과 줄 서서 사진 찍고 났더니 이동해야 한단다. 스펀에서는 주르르 줄을 서 마치 붕어빵이라도 찍어내듯 천등을 날리고 다들 비슷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사람에 밀려 이동하며 내가 예쁜 골목 구경을 온 것인지 사람 구경을 온 것인지 헷갈렸던 지우펀. 온종일 종종거리며 다녔던 기억이었다. 이번에는 택시투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여유롭게 구경하고 싶었다. 두 군데만도 택시투어를 할 수 있지만 맞춤 투어는 비용이 너무 비쌌고, 정해진 투어는 시간이 너무 낭비되어 어느 쪽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줄을 한참 서야 기이한 암벽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8년 전도 지금도.

찾아보니 개별적으로 여행하는 사람들도 꽤 되는 것 같아 우리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라기보다는 내가 그렇게 하기로 정했다. 여행 일정은 모두 내가 짰고, 준비도 내가 했기 때문이다. 천등은 핑시에 가서 날리기로 했다. 원래 천등을 날리기 시작한 곳이라 매년 천등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펀보다 방문객이 적어 여유롭게 천등을 날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우펀에 가서 야경을 보고 타이베이로 돌아오는 코스로 짰다. 보통 오가는 교통편으로 기차를 이용한다. 타이베이에서 기차를 타고 루이팡역에 가서 지역 기차로 바꿔타면 핑시나 스펀에 갈 수 있다. 루이팡 역이 사람이 워낙 많아 번잡해서 길 찾기가 쉽지 않고 지우펀에서 돌아오는 기차는 사람이 정말 많아 앉을 자리는 기대하지 말라고 써있었다. 이런 저런 방법을 검색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신랑은 택시를 예약하자고 한다. 대만에 자주 가는 친한 동료가 예스진지를 갈 때는 택시를 이용하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역시 기차는 복잡하고 불편한가보다. 구글맵으로 길찾기를 해보니 시간이 덜 걸리는 간단한 코스가 눈에 띈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서 어떤 역에 가면 버스를 타고 천등을 날리는 핑시에 바로 간다. 이거다! 느낌이 왔다. 1년에 한 번 가는 휴가인데 돈이 좀 들어도 편한 방법이 좋지 않겠냐는 남편에게 택시보다 돈도 아끼고 기차보다 시간을 아끼니 이런 좋은 방법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대만에 도착해서 다시 코스를 찾으며 점검했다. 버스가 하루에 두 번뿐이라 시간만 여유 있게 가면 된다. 옆에서 같이 검색하던 남편은 버스요금이 없다는 것도 알아냈다. 공짜라니. 횡재한 기분이다. 버스에 대한 후기가 혹시 있으려나 했는데 열심히 검색해도 기차 아니면 택시뿐, 버스에 대한 정보가 없다. 사람들은 정보가 없는 걸까 용기가 없는 걸까 . 내가 새로운 코스를 뚫어야겠다. 정체 모를 개척정신이 샘솟는다. 여행지에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일들은 지나고보면 기억에 오래 남으며 특별한 경험이 되곤 한다. 성공하면 대박이고 실패해도 대박이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탈 수 있는 역에서 내렸다. 버스를 타러 갔더니 우리를 제하고 다들 현지 분이다. 장을 보셨는지 양손에 짐이 가득하다. 10분 후에 버스가 온다고 해서 건너편 버거킹에 가서 감자튀김을 시켰는데 아이가 갑자기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한다. 버스 놓치면 우리는 천등을 날리러 갈 수 없어, 뛰자! 아이 손을 잡고 열심히 달려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급히 다녀와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딱 맞춰 오는 버스. 광화문에서 삼청동 갈 때 타는 마을버스처럼 생겼다. 정류장이 많은 귀여운 16인승 미니버스. 보아하니 산골 마을 주민들을 위해 나라에서 운행하는 버스 같다. 그래서 요금이 없었나보다. 우리가 탄 정류장에서 버스가 꽉 찬다. 뭔가 딱딱 잘 맞아들어간다. 신난 우리를 보며 외국인들이 어째서 이 버스를 왜 탈까 다들 궁금한 표정이다. 출발 후 15분도 안 되어 그 표정이 이해됐다. 구불구불 굽이치는 산길을 끝도 없이 올라간다. 기차역 앞 정류장을 제하고는 타는 사람은 없다. 내리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도시에서 장을 봐서 가지 않으면 생활이 되지 않는 동네였던 것이다. 자차가 아니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동네다. 2차선 도로 옆은 깍아질 듯한 벼랑이고 울창하고 빼곡한 수풀이 우거진 산림이 펼쳐져 있다.

“어머, 대만은 확실히 우리보다 남쪽에 있어서인지 열대 느낌이다. 산도 나무도 참 다르네. 엄청나다.”

아이와 이야기 나누며 즐거워했다. 우리가 언제 이런 버스를 타보겠어, 하기도 했다.


그렇다, 이런 버스는 평생 탈 일이 없어야 한다. ㄹ자 같은 산길인데 기사님은 레이싱 중이다. 감속 없이 꺾는 코너링이 예술이다. 오르막이라 잠시 코너를 벗어나면 바로 가속이다. 아이와 나는 어느새 대화를 중단하고 정자세가 되어 앞에 있는 손잡이를 꽉 잡고 있다. 기사님이 숙련자인 것은 알겠지만 머릿속에는 여행자보험이 떠오른다. 해외여행 오면서 처음으로 보험 가입을 깜빡했다. 대만에 도착해서 깨달았지만 이미 가입 시간이 지나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리 급했다고 중요한 것을 빼먹었는지 나를 탓한다. 여기서 사고가 나면 보상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다음번부터는 미리 보험부터 가입해야지. 혹시라도 다음이 없는 것은 아닐까. 코너를 한 번 꺾을 때마다 상상이 업그레이드를 거듭한다. 멀미가 심한 아이가 신경 쓰이고 택시를 예약하자던 남편 눈치가 보인다. 여기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갈 순 없을까. 택시가 다녔다면 이 버스는 애초에 운행하지 않았겠지. 사람들의 후기가 없는 것은 이유가 있었을 텐데 나는 어째서 그렇게 미련하게 용감했을까. 생각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아니다 내가 타고 있는 버스가 롤러코스터다. 점점 멀미가 심해지는지 아이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던 남편도 안 되겠는지 손잡이를 잡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래, 차라리 잠드는 게 낫겠다. 아, 되감기 하고 싶다. 버스를 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까 버스를 놓쳤다면 좋았을 뻔했다. 언제 도착하는지 구글맵을 1초 단위로 새로고침했다. 이러다가는 나도 곧 토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쯤 기적처럼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아, 이 버스는 산을 넘어가는 거로구나. 기사님은 다행히 내리막에서는 브레이크를 이용했다. 이렇게 감사할 데가 있나. 곧 도착한다며 아이를 달래며 아이가 토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고난과 충격의 버스 여행은 1시간을 꼬박 채우고 나서야 끝이 났다. 아이는 내리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절망스런 표정으로 집에 갈 때도 저 버스를 타야 하냐고 물었다. 그건 아니라고 하며 소세지를 사줄까, 기념품을 사줄까 달랬다. 이번 경험은 추억으로 넘길 것은 아니었다고 인정했다.  여행이 끝나고 한참 시간이 지나도 할 만했던 특별한 별책부록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와 남편에게 과한 나의 모험심을 사과했다. 대만에 가서 예스진지를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행여라도 이 버스를 탈 시도는 하지 마세요, 부디.

문제의 그 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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