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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Jul 24. 2024

옥수수의 때가 왔다.

근교에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옥수수를 발견했다. 길가에서 옥수수를 쪄서 팔고 계셨다. 실은 우연히 발견한 것은 아니다. 여행 다녀오는 길에 밥을 먹으러 갈까 검색하다가 숙소 근처에서 맛있는 옥수수를 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옥수수를 사러 부러 오셨다고 하니 맛은 검증되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인터넷이 있어서 정확한 상호가 없고 가게 간판이 없는 곳도 실력이 찐이라면 승부를 볼만한 걸까 생각해 본다. 우리만 해도 가까운 곳이긴 했지만 약간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가족 중에 옥수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그건 아니다. 그중에 내가 가장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집에 옥수수가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아무래도 장을 주로 보는 사람이 나라서 내가 선호하지 않는 식재료는 잘 안사게 되다. 그런 내가 옥수수를 먹겠다고 찾아가자고 했다. 언젠가부터 제철음식을 자꾸 찾게 되는데 여름의 제철 음식은 옥수수가 아닌가. 차를 길가에 세우고 가까이 가니 옥수수 찌는 냄새가 구수하다. 파시는 할머니 인상이 어찌나 좋은지 옥수수까지 더 맛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첨가물 없이 찌는데도 꿀맛이었던 옥수수.

내가 옥수수를 안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옥수수하모니카 때문이다. 옥수수하모니카를 불다 보면 이 사이사이 옥수수가 끼는 것이 불편했다. 먹는 도중에 손이 은은하게 끈적이게 되는 것이 불편했다. 당장 먹기에는 뜨겁기도 했지만 나의 불편함을 기억하며 아이에게 옥수수알맹이를 떼어서 줬다. 떼어주는 대로 받아먹는 아이가 귀여워서 불편한 것은 모두 잊었다. 운전하는 남편에게도 떼어주니 잘 먹었다. 나 역시 맛있어서 열심히 먹다 보니 어느새 옥수수 몇 개를 먹어치웠다. 먹어본 옥수수 중에 가장 맛있었던 것 같다. 보통은 어렸을 적 외갓집에 놀러 갔을 때 할머니가 쪄주신 옥수수가 가장 맛있었어요. 이런 추억이 나와야 하는데 오늘부로 양평 길가의 할머니표 옥수수를 최고의 맛으로 꼽아야겠다. 더 많이 살 걸 그랬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출발한 지 한참이라 돌아가 다시 살 수는 없었다. 아쉬움을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와 옥수수가 쉴까 얼른 냉동실에 넣었다. 며칠 뒤에 옥수수를 꺼내서 다시 먹는데 그때 그 맛이 아니다. 아이도 시들하고 나도 그렇다. 이상하다. 며칠 만에 맛이 달라졌을 리도 입맛이 달라졌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즐겁게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여유롭게 옥수수를 사 먹은 맛,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차에서 내려 천막 아래서 뛰어 들어갔던 맛, 우리를 인자한 미소로 반겨주시며 뜨끈뜨끈한 옥수수를 건네주시던 할머니의 맛. 그 맛들이 사라졌구나. 여름은 한창이고 아직 옥수수는 제철이지만 그 때의 그 맛은 이미 가버린 후였다. 지나간 감동적인 맛을 그리며 옥수수를 먹으며 생각했다. 인생은 하루하루가 제철이구나, 이 순간도 지나고 나면 달라질 한 때겠구나.

분명 같은 옥수수인데 맛이 다르다.

요즘은 렌지에 잠깐 돌려먹으면 되는 인스턴트 같은 옥수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옥수수 통조림은 또 얼마나 간편한가. 하지만 초당옥수수 철이 되길 기다리고 여름이면 강원도에서 옥수수를 자루째 주문해 먹는다는 사람은 제철의 맛을 알고 원하는 것이다. 사계절 내내 나오는 옥수수와는 맛도 영양도 다르다. 한정되어 있고 제한된 '때'가 있다는 사실이 여름 옥수수를 더욱 맛있게 느끼게 해주는 것 아닐까. 매일 같은 하루 같지만 같은 하루는 없다. 어제와 오늘은 다른 하루다. 지나간 하루는 다시 오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하루가 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새로운 기회가 매일 주어진다고 생각하면 벅찬 일이다. 매일 현재를 선물로 느끼며 감사할 줄 아는 삶은 살고 싶지만 금세 까먹고 만다. 최근에 줄을 너무 치나 싶을 정도로 좋았던 책이 있다. '제철 행복'이라는 김신지 작가님의 에세이이다. 바삐 사느라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에게 썼다는 책이다. '모든 때에 의미가 있다는 걸 이해하며 해의 걸음에 발맞춰 제철마다 행복을 챙기며 살자'는 말에 깊이 감동했다. 그랬지만 까먹고 또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하루라며 불평하고 살고 있었다. 옥수수를 먹으며 다시 깨달았으니 참 다행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자꾸 깨닫는 수밖에 없다. 매일 잊으니 매일 상기시켜줘야겠다. 내 인생의 제철을 놓치지 않길 바라니까.


지금 이 계절에 무얼 하고 싶은지, 미루지 말고 챙겨야 할 기쁨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늘 살피면서 지낼 수 있기를.『제철 행복』김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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