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옷장에는 새 수건이 꽤 있었다. 예를 들면 1988년 정년 퇴임 기념 같은 글씨가 새겨진 사용하지 않은 수건. 이것은 새 수건인가 헌 수건인가. 옷장 한편에 수건이 쌓여있을 때 화장실에 걸려있는 수건은 닳고 닳아 옷장의 뽀송하고 폭신한 수건과 달리 마르고 얇은 천 조각이 되어 있었다. 새것 꺼내 쓰시라고 자식들과 며느리들이 갈 때마다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옷장에 얼마만큼의 새 물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을 본 자식들이 얼마나 마음이 어땠을지 보지 못한 내 마음마저 아려온다. 전쟁을 겪은 세대의 특징일까. 언제 물자가 필요할지 모르니 일단 쟁여두는 것일까. 아니다. 지금 내 옷장에도 새 수건이 있다. 2022년 야유회 기념, 이런 식이다. 받았을 당시 쓰던 수건이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런 것이라 치자. 포인트도 모아둔다. 모아두었다가 한방에 쓰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다. 티끌 모아 태산처럼 만들었다는 전설을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는 매달 복지포인트를 줬다. 야금야금 쓰다 보면 어디에 썼는지 모르게 사라지고 마는 그 포인트를 어느 직원이 한 번도 쓰지 않고 모았다가 차를 샀다는 놀라운 전설이 전해졌다. 아끼고 모으는 것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긴 하다.
얼마 전에 아이가 서점에서 문화상품권을 쓰려고 했다가 유효기간이 지나서 사용하지 못했다. 내가 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유효기간은 꽤 한참 지나있었다. 보통 상품권은 유효기간이 없던데 문화상품권도 그렇겠지 넘겨짚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받아서 모아둔 게 생각난다. 포털에서 검색해 보니 온라인상에서 등록하면 쓸 수 있다는 제목이 눈에 띈다. 휴, 다행이다. 집에 도착해서 온라인에 등록하려고 하니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경고메시지만 나온다. 콜센터에 전화해서 문의하니 2024년 5월까지는 온라인에서 유효기간 지난 상품권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안된단다. 하하하핫. 이게 무슨 말인가. 아직 나에게는 수많은 상품권이 남아있단 말이오. 서점 갈 때마다 가져가서 쓸 걸 그랬다. 아니다, 사용처가 꽤 많은데 어디서든 썼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 보통 백화점 지류 상품권은 유효기간이 없던데, 요즘 기프티콘 같은 것도 유효기간 연장이 얼마나 간편하게 되는데. 혼자 여러 핑곗거리를 생각해 봐도 별 소용이 없다. 몇 달만 전에 알았어도 좋았을 것을 후회해도 소용없다. 상품권의 유효기간은 5년이었다. 강산이 반쯤은 바뀌는 세월 동안 무얼 하다 한두 달을 아쉬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 아끼다 똥 됐다. 으악, 아까운 문화상품권들.
'아끼다'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여러 가지 뜻이 나온다.
1. (사람이 물건을) 귀중하게 여겨 함부로 쓰거나 다루지 아니하다. 유의어: 애지중지하다.
2.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겨 자상하게 보살피다. 유의어: 사랑하다, 위하다.
3. (사람이 돈 따위를) 헤프지 않게 쓰거나 써야 할 데에도 인색하게 쓰다. 유의어: 절약하다.
출처: 다음 한국어사전
나의 할머니가 살아오신 시절에는 아끼는 것이 확실하고 필수적인 미덕이었을 것이다. 아껴야 잘 산다고 저축도 권장하지 않았는가. 경제성장을 위해 각 가정은 돈을 아껴 저축해야 했을 것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물건과 자원을 절약해야 했을 것이다. 맛있는 것을 안 드시고 아껴두었다가 명절에 오면 자식 손주들에게 주시던 할머니, 아껴서 모아두신 쌈짓돈을 고이 접어 내 손에 쥐여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난다. 전쟁 같은 난리 통에는 실제로 물건을 아껴서 비축해 둔 사람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목숨을 겨우 부지해 가며 배운 생생한 그 시절 경험들은 아끼는 습관을 더욱 강화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꾸만 창고에 물건을 하나둘 쌓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활 습관이 몸에 배고 삶에 깔렸을 것이다. 이사 오기 전 이곳에 사시던 할머니는 아파트가 입주했을 때부터 살던 분이셨다. 족히 30년이 넘는 세월인데 화장실 문을 어찌나 깔끔하게 사용하셨는지 곰팡이 슬거나 부서진 곳이 하나 없었다. 오래된 트렌드가 반영된 옥색이라 그렇지 마치 새것 같아 인테리어 하면서 교체하지 말고 활용해 볼지 생각해 볼 정도였다. 욕조에는 커다란 대야가 있었고 수도꼭지에서 똑똑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물건을 아끼고 자원을 아끼시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아끼신 것은 물건뿐만이 아니었다.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배우신다면서 벽에 걸려있는 작품을 한창 설명해 주셨다. 할머니의 삶을 아끼시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전에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 중에 '삶을 아끼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구절에 관해 각자의 생각을 나눴는데 나는 삶을 아낀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해석했다. 삶을 애지중지 아껴서 살았다. 삶을 절약하며 아끼느라 마음껏 써먹지 않았다. 나는 삶을 아끼고 싶다. 애지중지하며 귀하게 여기고 싶다. 하지만 열심히 실컷 충분히 써먹고 싶다. 그게 한 번뿐인 삶을 제대로 아끼는 법일 듯하다. 열정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보기도 하고 대차게 실패해 보기도 하면서 박박 긁어서 삶을 써보고 싶다. 자주 사용해서 반들반들 윤나게 하고 싶다. 그렇다고 너무 멋대로 쓰고 싶지는 않다. 삶을 어떻게 아낄 것인가? 삶을 제대로 아끼는 방법에 대해 깊게 고민해 봐야겠다.
도망치고 싶어지는 순간이 몸집을 부풀려 커지면, 나는 인숙 씨가 아니라 인숙 씨 집 앞에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중략) 너희들이 아무리 무성하게 자라나도, 인숙 씨가 기른 것 중 가장 튼튼한 것은 나여야만 한다고. 이 삶을 아끼는 것으로 나는 그의 자부가 되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한여름 그늘한 점 없는 들판에 팔다리를 꼿꼿이 펼치고 선 작물이 된 기분이다.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듯이. 내 삶이 아직 자라고 있다.『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김신지. '인숙 씨가 살면서 가장 아낀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