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동료 작가님이 SNS에 아이와 다녀와서 올리신 교육 후기를 보았다. 답십리 영화 미디어센터에서 하는 교육이었는데 '라디오 만들기'였다. 보자마자 노오란 플라스틱 라디오가 떠올랐다. 정확한 학년은 기억나지 않지만 고학년에 라디오 만들기를 배웠다. 문을 열면 코를 찌르는 매캐한 암모니아 냄새와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늘 나던 곳, 과학실. 교실 뒤편에는 해골이 버티고 있고 한쪽에 있던 키 큰 장에는 플라스틱 바구니마다 과학 실험 준비물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선생님 지시를 받고 친구와 수업 전에 과학 수업을 준비하러 가고, 수업이 끝나면 실험 도구들을 정리했다. 정리할 것도 별로 없는데 괜히 느리 적 느리 적 시간을 보내다 수업에 들어갔던 불량한 기억도 나는 바로 그 과학실에서 라디오 만들기를 배웠다. 등받이 없던 동그란 의자에 앉으면 보이던 6명씩 앉을 수 있는 널찍한 책상에 늘어져 있는 조그마한 부품들. 트랜지스터, 콘덴서 같은 이름마저 생소했던 부품들도 신기했고, 인두를 갖다 대면 동글동글 이슬 맺히듯 녹아내리던 납도 신기했다. 어설프지만 열심히 조립했던 라디오에서 소리가 났을 때의 그 성취감이란. 학창 시절 동안의 어떤 것보다도 뚜렷한 기억 중 하나다. 경진대회에서는 소리만 나도 수상을 할 수 있었다. 무슨 상을 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고 혼자 모든 것을 조립하고 마지막에 주파수를 잡으며 소리를 찾던 그 떨림은 정확히 기억난다. 아이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육을 신청했다. 교육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딱 하나 남아있던 자리를 운 좋게 등록했다.
집에서 꽤 먼 거리라서 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센터는 주차가 불가라고 해서 지도에서 주차장을 찾아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곳을 발견했다. '전농동 로터리 시장' 얼마 전에 남편이 부침개 가격을 맞혀보라며 영상을 보여줬다. 얇은 부추부침개였는데 손바닥 정도 크기인 것 같았다. 런닝맨에 나온 영상을 본 것인데 부침개 한 장에 500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에 팔고 계셨다. 앉아서 먹는 자리는 몇 개 없지만 사람들이 10장, 20장씩 주문해서 픽업해 간다고 했다. 그 가게가 있는 곳이 바로 전농동 로터리 시장이었다. 교육장이 집에서 꽤 멀어서 이왕 간 김에 이것저것 하고 싶었는데 부침개 가게까지 들르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주말 오전은 도로에 생각보다 차가 많았다. 원래 계획은 센터 근처에 주차하고 시장에 가서 부침개를 사고 시장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다. 시장에는 보통 오래된 맛집들이 있기 마련이니 그곳에 가서 골라보자고 했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교육 시간까지 여유가 별로 없을 것 같아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급히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맛도 가격도 아름다운 가게'라는 글을 눈에 띄었다. 동대문 체육관에 주차하고 나오니 바로 코 앞에 가게가 있었다. 일단 가격은 아름다웠다. '짜장면 3,500원' 3,500원이라니 언제 적 가격인가? 음식을 주문하고 남편과 어릴 적에 짜장면이 얼마였는가 이야기를 나눴다. 떡볶이가 얼마였고, 과자가 얼마였고, 아이스크림이 얼마였는지까지 나왔는데 막상 짜장면 가격은 정확하지 않았다. 어릴 때라 우리가 음식값을 낸 적이 없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찾아보더니 15년 전에 짜장면이 3,500원이었다고 한다. 식당에 들어가니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오늘 체육관에서 시합이 있다더니 운동복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왔고 혼자 드시는 어르신이 많았다. 우리는 짜장면 곱빼기, 해물덮밥, 볶음밥을 시켰다. 짜장면 말고 다른 요리들의 가격은 파격적이진 않았지만 다른 가게에 비하면 저렴했다. 나온 음식을 보고 우리는 또 한 번 놀랐다. 양이 꽤 많았다. 탕수육도 시키고 싶었는데 내가 다이어트 중이라 먹을 사람이 없어(평소엔 탕수육 킬러) 대신 물만두를 시켰는데, 다른 요리양이 많아서 물만두가 나오기도 전에 많이 남기겠다 싶었다. 남편은 옛날에 먹던 짜장면 맛이 난다고 했고, 아이는 배불러서 반도 못 먹겠다고 했다. 내가 시킨 해물덮밥은 생각보다 해물이 많이 들어있어서 남기지 않고 먹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 먹고 나오는데 시간이 애매하다. 근처 카페 가서 잠시 시간을 보낼까? 말했더니 남편이 시장에 다녀오자고 했다. 버스를 타고 10분, 가자마자 바로 사고 오면 교육 시간 전에 딱 맞게 올 것 같단다. 배불러서 커피 마시기도 부담스러웠는데 그러자고 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우리은행 옆에 작게 '시장 입구'라고 쓰여있다. 안쪽에 상가가 크게 있으려나 하고 들어가자마자! 우리가 찾던 부침개 가게를 마주했다. 시장 입구에 있다더니 진짜로 시장 입구에 바로 있다. 앉아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길래 운이 좋다고 생각했더니 착각이었다. 쉴 새 없이 부침개를 부치고 계시던 주인아주머니는 이미 받은 주문이 밀려서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다.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실제로 몇 분이 와서 주문했던 부침개를 픽업해 갔다. 두 손으로 한 아름 안아야 할 만큼 큰 양푼에 가득 담긴 반죽. 중간중간 계속 야채를 넣으셨는데 부침개는 생각보다 컸고 야채도 꽤 들어있었다. 아주머니는 기름을 두르고 반죽을 한 국자 퍼서 널따란 무쇠팬에 펼쳤다. 뒤집개로 아까 펼쳐뒀던 부침개를 살짝살짝 거들떠보다가 가운데까지 익었다 싶으셨는지 휘리릭 뒤집는다. 그리고 이미 뒤집혀서 위쪽에 있던 부침개는 도마로 이동할 차례다. 도마에는 얇은 부침개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누가 얼마 큼의 부침개를 주문했는지 기억하시는 것인지 쌓여가는 개수가 각각 달랐다. 무쇠 팬에는 보통 4-5개씩 부침개가 올라가 있었고 기계처럼 같은 동작을 반복하셨다. 팬에서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잠깐동안 온몸에 열기가 느껴지고 처음에 고소하던 기름 냄새도 그새 질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부쳐도 주문량을 따라잡기가 어렵다고 하시던데 불 앞에서 얼마나 힘드실지 짐작도 안 갔다. 특히나 더웠던 올여름을 노상에서 어떻게 버티셨을지 역시 상상도 안 됐다. 부침개를 찾으러 온 아주머니와 친하신지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셨다. 덥긴 하지만 땀이 안 나는 체질이라며 힘들지 않으신 듯 웃으며 말씀하셔서 놀랐다. 아주머니를 지켜보고 있자니 얼마쯤은 남아야 난 할 수 있을지 따져보게 됐다. 교육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쯤 우리 부침개를 포장해 주셨다. 교육 끝나고 부침개를 먹어본 남편과 아이는 생각보다 맛있고 예상치 못하게 매워서 놀랐다. 아마도 고추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 탓에 사 온 부침개를 다 먹진 못했지만 궁금했던 가게에 가볼 수 있어서 좋았다. 참고로 시장은 내가 예상한 활기찬 곳은 아니었다. 물론 안쪽까지 들어가 보지 못했고 주말이라 평소와 달랐을 수도 있지만 부침개 가게를 제외하고 주변의 몇몇 가게들은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라디어 만들기 교육 시간은 무려 3시간이었다. 1시간 예상하고 간 터라 놀랐지만 덕분에 난 긴 시간 자유를 느꼈다. 세운상가에서 평생을 일하셨다는 박사님이 라디오 작동 원리도 설명해 주시고 후기대로 아주 알찬 교육이었다. 라디오를 만들어본 아이의 소감은 어떨지 궁금했다. 안테나를 요리조리 움직여 가며 음악이 진짜 나온다며 기쁜 마음으로 나에게 이어폰을 건네는 것을 보니 묻지 않아도 재밌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나와 같은 벅찬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 엄마, 아빠와 짜장면도 먹고, 시장에서 부침개도 사고 추억 가득한 하루를 만들었을 거라 기대한다. 가족 모두에게 기억에 남을 하루였다. 짜장면 가격 보며 얘기하다가 남편과 서로의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눴고, 아이와는 내 어린 시절과 같은 경험을 나눴다. 서로를 몰랐던 때의 기억을 나누며 우리 가족은 오늘 공유 공간을 한 발짝 넓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