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기장의 목소리가 기내에 울려 퍼진다.
“캐빈크루 프리페어 포 랜딩 Cabin crew, prepare for landing ”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상하이 출발 베이징행 비행기를 탄 피곤함에 살짝 느슨해진 눈꺼풀이 다시 떠진다. 등받이와 테이블을 접고 가방을 좌석 앞자리 밑으로 밀어 넣고 안전벨트를 매라며 승무원들이 분주히 지나다닌다. 상하이 홍차오 공항에서 출발한 동방항공 비행기는 2시간 만에 베이징으로 왔다. 한국 인천과 베이징 거리는 900Km, 상하이에서 베이징까지 1,200Km이다. 창 밖으로 베이징 수도공항首都机场이 보인다. 늘 뜨고 내리는 수많은 비행기로 복작였던 베이징 하늘은 2020년 봄 이후, 조용했다. 활주로도 관제탑도 같이 동면에 들어갔다.
이제 착륙허가를 기다릴 정도로 항로가 붐비나 보다. 십 년 동안 베이징에 살면서 한국을 수없이 오고 갔다. 금요일 저녁 9시에 베이징 수도공항 출발 KE854를 타고 가, 일요일 저녁 7시에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는 KE853을 우리는 베이징-인천 출퇴근 비행기라고 불렀다. 금요일 저녁에 한국으로 퇴근했다 일요일 저녁에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주말을 이용한 기간, 바쁜 일정을 보내고 하늘에서 베이징 야경이 보이기 시작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한국 갈 때마다 바빴다. 번갯불에 콩도 구워 먹는다는데 콩은 커녕 공항 올 때까지 하루 종일 밥 한 끼 못 먹고 종종거리고 다니다 체크인 후 출국심사를 마치고 공항 라운지에 와서야 간신히 뭔가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인천공항에서 사람들은 출국한다고 이야기한다. 나에게는 귀국이다. 나의 집은 어디지… 출국을 하는 걸까? 귀국을 하는 걸까? 내게 집은 분당에 있는 가족이 사는 아파트일까, 여기 베이징에서 사는 아파트일까? 어느 쪽도 안주하지 못 한 채, 베이징과 서울 하늘을 오고 갔다. 둘 다 내 소유는 아니지만 배타적 점유, 사용권은 있었다. 베이징 공항에 이제 출국도 귀국도 아닌 도착을 한다. 2020년 봄 이후, 나는 한국에 가지 못했다.
제로코로나 장성을 넘을 수 없었다.
수도공항 아니 베이징에 처음 와 보는 수연은 계속 긴장하는 듯했다. 내가 상하이 봉쇄 내내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던 베이징에 떠난 지 2년 만에 다시 왔다. 상하이에서 베이징법인으로 이동하는 수연과 함께…. 수연은 낯선 베이징에서 앞으로 생활할 집을 고르는 데, 베이징에서 오래 살았던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도 베이징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비행기 티켓 값도 수연이 부담하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내 추억 찾기 비용은 내가 내야지…. 공항에서 짐을 기다리는 동안 끊임없이 안내 방송이 울려대고 있다. 둥근 공항 천장을 올려다보니 에코체임버처럼 베이징에서 보낸 10년 간의 시간과 추억이 울려 대고 있다.
디디滴滴(중국차량공유플랫폼)를 타고 편하게 왕징望京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공항버스를 타기로 했다. 수연에게 베이징의 맨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 처음 만나는 베이징을 편하고 빠른 디디가 아니라 공항버스로 제대로 천천히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왕징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예약한 하얏트 호텔까지 걸어서 10분이다.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2021년 10월에 베이징을 떠나 18개월 만에 2022년 5월에 돌아왔다.
하얏트호텔에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난다. 2018년, 왕징에 처음으로 생긴 제대로 된 글로벌 호텔, 하얏트 개장에 왕징교민들은 열광했다. 그전에 리두丽都나 싼위안치아오三元桥까지 가야 글로벌 브랜드 호텔이 있었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수연은 베이징 법인에 갔다 온다고 했다. 집은 내일 부동산을 만나 둘러보기로 했다. 수연이 베이징 법인에서 보낸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나도 호텔문을 나섰다.
베이징에 살면서 많은 이별을 했다. 몇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고 나누었던 사람들이 한국으로 돌아갈 때마다 마음에 멍이 들었다. 그렇게 수많은 이별을 했다. 베이징에 워낙 오래 있다 보니 귀임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주재원도 있었다. 처음 베이징에 왔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항공사 직원 윤희가 귀임할 때, 첫 이별이라 가장 시퍼런 멍이 들었다. 다들 떠나는 데 나만 빌트인가구처럼 베이징에 남았다. 이별할 때마다 여기저기 멍이 들었다. 2018년에 윤희가 돌아왔다. 이제 승진해서 부문 책임자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이산가족이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뻤다.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2015년에 베이징을 떠나 오만으로 갔다 올해 베이징 대사관으로 다시 부임한 외교관 지영 소식이 반가웠다. 떠나는 사람은 아쉽고, 돌아온 사람은 반갑고, 계속 있는 사람은 보고 싶다. 만남, 헤어짐, 떠남은 베이징 사는 내게 가슴을 조금씩 파내는 끌 같다.
머리는 생각하고 있고 발은 습관대로 움직였다. 어느새 나는 오픈했을 때부터 다녔던 <박승철 헤어> 미장원 앞에 서있다.
2층 창문, 화려하고 선명한 박승철헤어라는 한국어 간판이 보인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삐꺽거리는 느낌은 여전하다. 미장원 문을 여니 ‘딸랑’ 종소리가 난다. 2021년 가을, 떠났던 그 시간과 똑같은 풍경이다. 폐까지 들어오는 짙은 파마약 냄새, 미용가운을 입고 휴대폰을 보는 손님과 머리를 깎기 위해 가위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이 내가 떠난 트루먼쇼 세트장에 그대로 남아 있다.
2020년, 중국 제로코로나 방역을 가장 강하게 실시했던 곳은 수도 베이징이었다. 만리장성보다 더 철통 같은 디지털 제로코로나 장성을 쌓았다. 미용실 같은 접객위생시설은 3개월 간 문을 닫았고 겨우 문을 열게 했을 때, 조건은 한 사람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용사는 방호복에 페이스실드까지 착용해야 했고 하루 고작 10명 정도 손님만 받을 수 있고 매출감소는 적자와 같이 늘어갔다. 한국인 미용사는 한 명만 남고 다 돌아가야 했다. 미장원 예약하기 힘들어 누가 알면 수강신청 하는 줄 알겠다는 것은 우리끼리 주고받던 말은 농담 아닌 사실이었다.
“환잉꽝린欢迎光临” 직원이 다가온다. 얼굴이 낯선 걸 보니 새로 왔다 보다.
“2시에 예약했어요.”
“네, 휴대폰 뒷자리가 어떻게 되시죠.”
“5146이요”. 제 선불카드 잔액 남은 것 좀 확인해 주세요.”
중국 미장원은 30%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선불카드를 사지 않을 수 없다. 잔액이 796위안 남았다고 한다. 펌을 한번 정도 할 수 있는 금액이다. 남은 잔액에 맞춰 펌을 해달라고 했다. 선불카드 잔액을 남기지 않아 미련도 안 남을 것 같다. 2시간 만에 추억도, 남은 잔액도 다 정리하고 나왔다.
미장원 바로 옆 <오디 발마사지>는 깨끗하고 서비스가 좋아 늘 사람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발마사지 받고 집까지 돌아가려면 귀찮다고 투덜거리면 나는 오디에서 마사지 받고 집에 걸어갈 수 있는 `오디권`에 산다고 자랑했다. 마사지 받으러 가면 항상 하얗고 깨끗한 포목으로 된 이불을 덮어주는 게 좋았다. 마사지를 시작하면 오른 발에 따듯한 수건을 감아 놓고 왼쪽 발부터 해주는데 왼쪽 발이 끝나기 전에 바로 잠이 든다. “집 두고 왜 마사지집 가서 자는지 몰라” 그렇게 농담하며 형준이 베이징에 오면 같이 마사지 받았다. 코로나 기간에 마사지집도 영업 정지와 재개를 반복했다. 베이징에 제로코로나 정책의 흔적이 없던 곳은 없다.
*
수연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베이징 법인 방문일정이 끝났다고 한다. 수연과 같이 마트에 가기로 했다. 온라인 쇼핑으로 사람말고 다 살 수 있는 중국이지만(심지어 비행기와 인공위성도 살 수 있다) 오프라인 구매가 주는 즐거움도 있다. 일요일 아침마다 에코백을 들고 장 보러 가던 <차이시앤궈메이>菜鲜果美다. 유일하게 오프라인 쇼핑하던 곳이다. 야채, 과일도 신선하고 좋고 해산물도 다 손질해준다. 일요일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도 안 한 부스스한 얼굴로 가서 신선한 야채, 과일, 해산물을 장바구니 가득 채워 낑낑대면서 돌아왔다. 나는 베이징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장바구니 카트를 끌거나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카트나 검은 비닐봉지는 왠지 아줌마 상징 같았다. 형준은 한 달에 한번씩 베이징에 오는 날 일요일 아침에 장을 보는 게 우리 루틴이었다. 형준은 카트에 담아 끌고 오면 편할 텐데 하면 나는 싫다고 했다. 굳이 둘이서 장 본 물건을 에코백에 담아 천천히 걸어왔다. 둘이 에코백 하나씩 팔에 안고 나란히 왕징 가로수 길을 걸었다.
마트에 들어서자 과일, 야채 신선하고 푸릇한 냄새가 난다. 여기가 왕징에서 제일 깨끗하고 친절한 마트라고 수연에게 이야기해줬다. 1층에는 신선식품, 2층에는 가공식품을 파는 곳이다. 2층 수산물코너에 가서 생선을 고르고, 원하는 손질방법을 파파고로 번역해 보여주면 다 해준다고 알려주고 1층에서 중국 야채를 보며 이름을 이야기해줬다. 우리나라에 있는 야채보다 중국 야채는 다양하다. 남쪽인 상하이와 북쪽인 베이징에서 먹는 야채는 또 다르다. 한국 사람 입에 맞는 야채는 이런 종류가 있다고 알려줬다. 형준과 같이 왔을 때도 이렇게 똑같이 이야기했던 기억이 스쳐간다. 이제 헤어진 지 2년이 되어가지만 형준과의 추억은 여전히 상하이 봉쇄처럼 덜 아문 상처이다.
맛집 천국, 미슐랭 별 받은 레스토랑이 20 개도 넘고 전 세계 모든 글로벌 브랜드 호텔의 럭셔리 식당이 한 집 건너 있는 상하이에 살던 내가 베이징에서 와서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은 <정일품> 비빔밥이었다. 저녁으로 맛있는 음식 먹으러 가지는 수연에게 비빔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2011년, 내가 베이징에 처음 왔을 때부터 있던 식당이다. 그 사이 주인은 한국인에서 중국인으로 바뀌었다. 코로나 때,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귀국하며 한인 사회는 바람빠진 풍선보다 빠르게 쪼그라 들고 있다. 이제 왕징에서 한국인이 하는 식당은 5개도 안 남았다.
40위안, 12가지 나물과 보리밥, 된장국 한 그릇, 여전하다. 상하이에서 이렇게 나물반찬을 주는 식당이 없다. 수연과 같이 나물비빔밥을 먹으며 왕징 쓰취四区에 대해 이야기했다. 왕징에서 제일 먼저 개발된 곳이고 한때, 모든 한국주재원들이 살던 아파트였다고… 미식천국 상하이 살면서 제일 먹고 싶었던 고추장과 참기름을 잔뜩 넣어 젓가락으로 야무지게 비벼 떠먹는 나물비빔밥은 베이징에서 보낸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식사 후 산책 겸 리두丽都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어느 새 5월 뜨거웠던 바람도 조금씩 선선해지고 있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초저녁, 리두까지 걸어가며 왕징은 방사선으로 퍼지는 구조라 동서남북이 확실하지 않아 파악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케아IKEA 위치와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당분간 필요한 물건이나 가구는 이케아에 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이케아에 아무 것도 살 것 없어도 형준과 자주 갔다. 이케아 매장 3층에서 1층까지 걸어서 내려오면 산책하기 충분한 거리였다. 분기마다 바뀌는 인테리어과 새로 나오는 상품으로 트렌트 파악하기 좋았다. 이케아 구경하러 한국에서 베이징으로 여행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해줬다.
리두는 우리나라 서울 동부이촌동처럼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전 세계 어디에 있지만 일본 사람들도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한국 사람들은 한인타운을 만들지만 일본사람들은 절대로 자기네가 사는 동네가 눈에 두드러지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일본학교도 있지만 워낙 조용조용해 사람들이 독일학교, 프랑스학교 있는 것은 알아도 일본학교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누오NUO호텔을 보여줬다. 글로벌 브랜드를 달지 않아도 어느 최상위 글로벌 브랜드 호텔에 뒤지지 않는 퀄리티, 서비스로 유명한 호텔로 우리나라 신라호텔 같은 포지션이라고 알려줬다.
호텔 옆 하우스브로이로 갔다. 예전에 수제맥주 마시려면 시내까지 나갔는데 다웨大跃啤酒 Great leap brew 맥주 리두분점이 생기면서 왕징에 사는 우리가 얼마나 환호했는지 이야기도 해줬다. 좋았던 시간도 잠시, 여기도 제로코로나 동안 강력한 방역으로 제대로 갈 수 없었다. 1인 1m 거리 유지로 한 테이블에 한 명씩 앉아 각자 마시고 했다. 서로 목소리도 안 들려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맥주를 마셨던 이야기도 했다.
“우리 참 어처구니없는 일 많았죠. ”
곡식을 쪼아먹는다고 참새를 잡아 병충해가 창궐해 오히려 수확량이 줄어 결국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비극을 불러왔던 대약진운동의 <대약진>을 브랜드로 한 다웨맥주에서 수제맥주 한 잔씩 했다. 기억하기도 싫을 대약진이라는 명사가 상표로 가능한 이 나라는 기억에 관대한 걸까?
다른 제로코로나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잊고, 아니 기억 못 하는 척하는 걸까?
왕징 하얏트호텔까지는 디디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 9시에 만나기로 했다. 수연에게 잘 자라고 인사하고 내 방으로 왔다. 침대에 누우니 상하이가 아니라 베이징에 있다는 게 신기하다. 베이징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은데 이제 그 베이징이 내게 낯선 얼굴로 대한다.
호텔 조식당은 통창으로 햇볕이 잘 들어오는 채광이 좋았다. 창밖으로 푸른 정원을 보며 햇살 좋은 창가에서 식사할 수 있다. 투숙하지 않아도 아침을 먹으러 오는 교민들이 많았다. 나도 형준이 오는 날이면 아침은 가끔 여기서 먹었다. “시내 나가지 않아도 왕징에서 이런 조식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늦은 아침을 형준과 천천히 즐겼다. 이제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하얏트 호텔은 차를 플런저에 내려준다. 안길백차安吉白茶의 맑은 색과 은은한 향이 좋다. 생크림 잔뜩 올리고 메이플 시럽 뿌린 와플을 “이렇게 먹으면 몸에는 안 좋은데 입에는 좋죠” 형준과 같이 먹던 그 아침을 이제 수연과 같이 먹는다.
9시에 부동산 직원을 만났다. 왕징에서만 형성된 부동산문화가 있다. 한 달 월세에 해당하는 금액이 부동산 중개수수료다. 월세가 2만 위안이면 수수료도 2만 위안이고 집 주인이 낸다. 물론 집주인은 이 비용을 월세에 녹여 놨다.
회사에서 집 임대비용을 부담해주는 주재원 때문에 생겨난 관습이다. 부동산에서는 이 돈으로 집주인이 해야 할 임대집 관리를 대신해 준다. 집 안에 전등이 나가도, 물이 새도, 변기가 막혀도 연락해야 하는 사람은 집 주인 아니고 부동산직원이다. 베이징에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남자는 ‘집안에 발생한 이런 저런 고장을 고쳐주는 부동산에서 일하는 아저씨’라고 수연에게 이야기해줬다. 보통 중국 교포중 한국에 가서 공사장에서 일하다 돌아온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데 가끔 내게 호칭을 ‘아가씨’나 ‘마님’을 써 당황한 적도 있다. 구한말, 만주로 이주했던 조선족들의 3세가 쓰는 단어와 표현은 1900년대말 우리말이다. 영어, 외래어, 줄임말로 빠르게 변하는 한국어와 달리 조선족 언어는 100년전 한국어 그대로이다. 상하이 부동산은 임대인과 임차인 양쪽에게 한 달치 월세를 복비로 받는다. 정말 집만 중개해주고 끝이다. 중개수수료를 받기 전에는 친정엄마 같지만, 받고 나면 시어머니 같다. 그에 비해 베이징 부동산들은 정말 친정엄마보다 잘해준다.
나를 담당했던 직원은 다른 곳으로 갔고 새로운 얼굴의 낯선 직원이 왔다. 수연을 잘 부탁한다는 내 말에 직원은 “당연하죠” 친근하게 웃는다. 왕징도 30년 넘어가면서 구축아파트가 많아졌다. 신축아파트는 왕징 중심 상권에서 멀어 장단점이 있다. 수연은 굳이 유치원, 국제학교 셔틀 버스가 다니는 중심 상권에서 좀 멀지만 다왕징大望京공원 근처 신축 바오리保利 아파트나 강변 산책이 가능한 동호만东湖湾으로 보는 게 좋다고 했다. 집을 고를 때, 좋은 집을 고르는 게 아니라 덜 나쁜 집을 골라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아파트 분양할 때 동일한 인테리어와 마감을 한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에서는 아파트는 벽만 분양한다. 모든 장식과 설비를 집 주인취향과 예산에 따라 하니 같은 아파트여도 구조, 마감, 인테리어가 다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수연에게 중국 아파트 특성에 대해 설명해주며 같이 둘러봤다. 상하이에서 호텔 레지던스에서 살았던 수연은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집을 둘러보면 뭐 하나가 맘에 들면 뭐 하나가 맘에 안 드는 게 당연하다. 베이징에서 10년을 산 나는 아파트 단지 별 장단점과 내부 구조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보는 집마다 탐탁치 않다.
몇 군데 둘러보던 수연이 화딩华鼎을 보자고 했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화딩… 내가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곳…나는 수연에게 화딩 아파트는 아예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수연이 화딩이라는 단어를 꺼내서 속으로 뜨끔했다. 화딩은 고개 돌려 쳐다 보기만 해도 쓰라린 곳이다.
“그 아파트는 낡았는데요.”
부동산 직원 말에 수연은
“근데 위치가 좋다면서요.”
되묻는다.
맞지, 화딩 아파트 위치가 왕징 최고라는 것은 이견이 없다. 한인 사회 위축과 중국 경기 침체로 임대 매물은 많았다. 화딩아파트는 301,302동이 그나마 몇 년 늦게 지어져 덜 낡았다는 직원 말에 그쪽 집을 보겠다고 했다. 302동 504호가 비어 있다. 내가 살던 집이다. 아니 한 달에 한 번 씩 베이징에 오던 형준과 같이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한 달에 이틀은 둘이 살고 28일은 혼자 살던 집이다. 아직 비어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404075
현관 전자기 비밀번호도 동일했다. ‘오래 동안 비어 있던 집 상태는 어떨까?’ 가슴 속 덜 아픈 상처 위에 앉은 딱지처럼 먼지와 침묵이 앉아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떠나는 날 그대로였다. 부동산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청소했다고 한다. 언제 임대가 나갈 지 모르니 항상 좋은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랬구나…’
이 집에 처음 이사하고 나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집안이 보이는 게 싫어 중문을 설치해 달라고 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내가 살았던 흔적이 묻어 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입을 열 수 없었다. 뜻밖에 집을 보자마자 수연은 여기로 하겠다고 한다. 순간 당황했다. 내가 살던 집에 수연이 살겠다는 별 특별한 것 없는 사실에 왜 가슴이 뛰지… 집 안에 남겨놓는 것도 없는데 내 소유 집도 아닌 이 집에서 수연이 살겠다는 것이 싫을까… 부동산 직원은 몇 년간 비어있던 집 임대가 성사된 것에 기뻐했다. 너무 순순히 임대계약이 성사되었다. 이제 나의 할 일은 끝났다.
나는 오늘 오후 5시에 기차편으로 상하이로 돌아가야 한다. 베이징 공항에서 주말 저녁이면 더 붐비는 항로로 비행기가 제대로 출발할 확률은 낮다. 국내선 연발착은 늘 기본이었다. 비행기가 제 시간에 뜨면 그게 오히려 더 신기한 일이다. 수연은 호텔로 가고 나는 윤희와 만나기로 한 기린사로 갔다. 엘레먼트 프레쉬 Element fresh(브런치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상하이 생활과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우리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2배 속도으로 보는 것처럼 빠르게 말을 하며 웃으며 나누었다.
윤희는 2019년 11월부터 시작된 코비드 19로 3년 넘는 시간 동안 고생했다. 중국 방역 정책 변화와 운행 중단, 겨우 재개된 스케줄은 한 도시에 일주일에 한편 취항이었다. 방역정책 바뀔 때마다 운항이 취소되거나 변경되었다. 하루에 3~4대씩 뜨던 비행기를 한 달에 한편 띄우니 항공사 적자를 월급으로 받는 기분이었다. 항공사마다 급여를 줄였고 무급휴직을 쓰게 했다. 겉으로는 주 2일, 주 3일 근무로 하고 쉬는 요일은 무급으로 했지만 그렇다고 집에 쉴 수도 없어 출근했다. 이제 코로나도 끝났지만 그동안 고생만 하다 떠나려고 한다. 슬프다. 이제 베이징에 올 일 없을 거라는 이야기로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베이징을 인연으로 우리는 두 번 만나고 두 번 헤어졌다.
*
십 년 동안 건너고 건너왔던 사거리에서 멈춰봤다. 멀리서부터 신호등 보면서 언제 파란 등으로, 빨간 등으로 바뀔까 걸음속도 조절하면서 건너기 바빴다. 출근 시간에 여유 있는 사람 없다. 그 사거리에서 멈춰 본 적이 없다. 빨리 건너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던 그 사거리에 오늘은 파란 등에 안 건너가고 멈춰봤다.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에 시간 병행이론이 나온다. 같은 시간이지만 한 곳에는 대한제국이, 한 곳에는 대한민국이 공존하는 병행이론… 사거리에서 난 시간 여행자가 되었다. 왕징 사거리에서 2023년 5월에, 2021년 10월의 내가 같이 존재했다.
이제 청산한 베이징 사무소가 있던 건물 앞에 가봤다. 휴일이라 빌딩 문이 닫혀있다. 매일 아침 다다다 걸어 출근한 곳이다. 입점해 있는 건물이 리노베이션 한다고 해 공사 소음, 먼지, 진동으로 고통받았고 위치 조정으로 내부 공사를 새로 해야 했고 다른 곳에 임시로 이사 갔다가 다시 이 자리로 오는 과정이 쉬웠을까? 화장실도 제대로 없던 환경, 온통 페인트, 유해물질에 소음과 진동 가득한 공사판 속에서 보냈던 힘들었던 시간의 무게도 시간이 흐르니 이제는 가볍다.
2011년, 처음 왕징에 와서 살았던 집도 가봤다. 이사하자마자 바로 앞에 왕징 소호 SOHO 공사가 시작되었다. 왕징에서 소호 땅 팔 때부터 살았다고 농담하지만 그때는 밤에 침대에 누우면 땅 파는 진동을 느껴졌다. 베이징에 사는 시간 동안 하루도 공사판을 보지 않고 공사 소음을 듣지 않는 날이 없었다.
시간과 공간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무엇이 있는지는 모두 다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 시간은 떠난 사람에게 그리움이고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설렘이다. 베이징에서 살 때는 떠나기 위해 갔던 곳을 이제는 상하이로 돌아가기 위해 간다.
체크아웃을 하고 지하철로 남역으로 가기로 했다. 혼자 가도 된다고 하는데 수연은 굳이 같이 배웅한다고 한다.
“이제 베이징이 제가 사는 곳이 되었잖아요. 임 변호사 님은 손님이고요. 손님 가신다는 데 주인이 배웅해야죠.”
‘그렇지, 이제 나는 베이징에 아무 연고도 없는 손님이다.’
왕징역에서 베이징남역까지 지하철14호선를 타면 50분 걸린다. 차로 가도 그 시간 걸린다. 5위안이면 왕징남역까지 갈 수 있으니 정말 가성비 좋다며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베이징남역까지 갔다. 여권을 보여주고 역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수연이 서 있다.
‘누군가의 배웅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 …. 내 생에서…
이제 나는 더 이상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을 수 있을까? ’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 4시간 걸린다. 1,200Km 거리를 시속 300km로 간다. 곧 시속 450km 고속기차가 개통될 나라에서 시속 300km 면 느린거다. 시속으로 추억을 나를 수는 없지만
아그네스 발사Agnes Balsa가 불렀던 그리스 민요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카타리니로 가서 행복하게 살기로 했지만 조국을 버릴 수 없었던 연인은 끝내 오지 않았고 혼자 탄 기차는 8시에 떠났다.
베이징에서 살았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아쉬움과 추억을 내려놓고 지금 살고 있고 살아야 할 상하이로 가는
내가 탄 기차는 이제 5시에 떠난다.
베이징은 나의 과거가 되었고 수연의 현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