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다. 서영이 탄 고속열차 G21는 베이징 남역에서 상하이로 출발했다. 4시간 후면 이제 베이징에서 서영의 공간과 시간은 없을 것이다. 서영은 베이징남역에서 헤어지며 말했다.
“이제 베이징에 올 일 없을 것 같아요.”
늘 친절한 서영은 웃으면 손을 흔들면서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띵동’
현관 벨소리가 들린다.
형준은 내가 주소를 알려준 아파트를 정확히 찾아왔다.
‘당연하지.’
그전에 살던 집주소를 모를 수가 없다. 일부러 기억을 지운 해리성기억상실이 아닌 이상..
형준은 내가 보내준 아파트 동호수에 당황했을 거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현관문을 열었다. 슬리퍼를 신어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열린 문 앞에 놀란 형준이 서 있다. 4년간 베이징에 오지 않았던 사람인데도 마치 어제 온 것처럼 능숙하게 혼자 찾아온 것이 묘하게 거슬린다. 서영을 베이징남역까지 배웅하고 오느라고 혼자 오라고 했다. 내가 앞으로 베이징에서 생활할 집을 구하러 상하이에서 베이징까지 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서영이 같이 왔다는 것은 형준은 모르고 있다.
당황과 태연함 그 사이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형준을 보고 들어오라고 했다.
“이제 여기서 내가 살 거예요. ”
*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대학과 MBA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과장으로 아버지 회사에 입사했다.
언니는 회사 경영에 관심이 없었다. 미국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형부는 회사에서 법무팀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성姓이 다른 형부에게 회사를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장자승계라는 박물관에 전시될 것 같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우리나라에서 둘째 딸이 기업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부서지기 쉬운 얇은 유리이다. 유리는 깨지지 않아 가치가 있다. 깨진 유리는 상처만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악착같이 회사 일을 배우고 집중했다. 인구 5천만 명, 내수로 먹고살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수출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해외 법인 중 가장 비중이 컸던 중국 사업에 집중하며 글로벌 전략기획실에서 회사 경영을 배우던 나는 협력사 회의에서 한산기업 연구소장 대신 참석한 형준을 처음 봤다. 원래 연구소장이 왔어야 하는 기술회의였는데 연구소장에게 일이 생겨 부연구소장인 자기가 대신 왔다고 했다. 다들 머리 희끗한 임원급 연구소장들이 참석한 회의 중, 젊은 형준이 눈에 띄었다. 부연구소장이라고 해도 젊은 편인 그가 궁금해 물어보니 협력사 오너 아들이었다. ‘그럼 그렇지’ 형준은 순도 99% 금수저는 아니어도 14K 금수저였다.
형준은 말수가 적고 침착한 전형적인 엔지니어였다.
협력사 사람들은 누구나 내게 잘 보이지 못한 안달하는 데 형준은 데면데면했다. 업무 관련 회의에서 몇 번 만났지만 항상 사무적이었던 형준이 궁금했다. 고등학교 동창모임에서 유연히 형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한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 그 나이에 결혼했다는 게 이상할 것은 없는데 누구랑 결혼했는지 궁금해 알아봤더니 한부모 가정 출신으로 간신히 로스쿨을 졸업한 여자라고 한다. 여자는 지금 중국 베이징에서 공공기관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형준은 한 달에 한 번씩 가거나 여자가 오거나 하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신기하다는 어투로 내게 큰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소곤소곤 대는 목소리로 동창에게 들었다. 14K라도 기업 오너 아들은 역시 관심의 대상인가 보다. 형도 있지만 기업에는 관심이 없고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형준이 한산기업을 물려받을 거라고 했다. 도대체 상장법인 오너 아들이라는 신분과 어울리지 않았을 그 여자와 왜 결혼했을까 궁금했다.
2020년 1월, 중국 우한 발 폐렴이 퍼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가 모든 것을 멈추었고 방역과 격리, 마스크가 일상용어가 되었다. 모든 대면 회의는 영상회의와 컨퍼런스콜로 대체되었다. 영상 회의 속 수많은 모니터 중 나는 여전히 형준얼굴에 시선이 끌렸다. KF94 마스크를 하고 있더라도 그의 얼굴을 보면 좋았다.
멈추고 서로를 멀리하는 일상화된 사회적 거리 두기는 우리 회사에 도움닫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해외로 갈 수 없었다. 돈 쓸 곳이 없었던 사람은 자기만족에 집중했고 고급 레저차량이 잘 팔리기 시작했다. 이동도 권력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고급 SUV에 심취했다. 이동이 멈춘 시대에 오히려 혼자 이동할 수 있는 차량이 전 세계적으로 잘 팔렸다. 그렇게 2년 동안 아버지 회사는 더 성장했고 모든 협력사도 같이 성장했다. 2022년, 한국은 드디어 위드코로나를 선택했다. 나도 아버지도 형준도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렸다. 대부분 그저 감기처럼 앓았지만 접시물에도 코가 빠져 죽는 사람이 있다. 누구는 살아남았고 누구는 죽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없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는 항상 경영권 지키기와 승계걱정을 했다.
본인이 창업한 것도 아닌데.. 엄밀히 말하면 할아버지가 창업하고 수많은 직원들이 헌신과 열정을 키워온 회사에 아버지는 그저 얼굴 사장 같았다. 내게 경험과 실전을 배우라고 했다. 상하이 법인에 가서 중국 사업을 좀 더 배우라는 아버지 말에 동의했다. 상하이에는 글로벌 자동차 업체를 비롯한 수많은 부품사, 협력사들이 촘촘히 모여있는 거대한 클러스터였다. 현대차만 베이징기차와 협력하면서 베이징으로 갔지만 대부분 자동차 회사들은 상하이와 그 주변 도시에 모여 있었다. 중국에 가려면 출국 전 48시간 이내에 24시간 간격을 두고 서로 다른 시약으로 다른 검사 기관에서 코로나 검사를 2번 받아야 하고 입국 후 14일+7이라는 해외입국자 격리를 해야 했지만 재택근무 한다 생각하기로 했다. 비행편도 일주일에 한 편만 있어 이코노미 좌석도 백만 원이 넘었다. 비즈니스 좌석은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들었다. 이렇게 힘든 일정을 각오하고 오너 딸이 상하이 법인으로 근무하러 간다는 것은 남들에게도 보여주기 좋았다. 아버지는 이 정도 고생은 해야 직원들이 나를 인정할 거라고 했다.
2022년 4월 1일 아침, 인천공항에서 어렵게 구한 비행기표로 출국하려던 내게 배웅 나온 비서가 이야기했다. 상하이가 봉쇄되었다고 … 체크인 카운터 직원이 이야기했다. 오늘 새벽에 상하이가 봉쇄되었다고… 어떻게 상하이가 봉쇄되지… 이게 뭔 말이지 모르는 채 뒤돌아선 내 앞에 봉쇄되지 모른다는 상하이에 혼자 있는 서영이 걱정에 무작정 공항으로 달려온 형준이 보였다.
그날, 상하이로 가는 모든 교통편이 끊겼다.
형준과 나는 그날 상하이로 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둘 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잃었다.
“같이 식사라도 할래요? ”
멍하게 서있던 형준은 거절하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가까운 그랜드하얏트호텔로 갔다. 1층 레스토랑에서 식사와 와인 1병을 시켰다.
“레드와인 하실래요. 화이트 와인으로 하실래요? ”
형준은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겠다고 했다. 와인 리스트업이 괜찮았다. 코로나로 사람은 이동 못해도 물류는 돌았다.
“파이퍼 하이직 어때요”
잘 칠링 된 샴페인을 직원이 정성스럽게 따르자 보글보글 와인잔에서 기포가 올라왔다.
와인잔 기포 너머 면도를 못해 거뭇거뭇 거친 턱이 보였다. 샴페인 병에도 동글동글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형준은 코로나로 중국 국경이 봉쇄되면서 베이징과 한국을 오고 가던 결혼생활을 끝냈다고 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제로코로나 정책으로 지친 서영은 형준에게 미안하다며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헤어지자고 했고 형준은 서영이가 하고 싶은 대로 동의했다고. 그게 서영이 편하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코로나로 오고 갈 수 없는 막힌 국경은 영원히 넘을 수 없을 것 같다. 자기와 헤어진 후 서영은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고 했다. 상하이가 봉쇄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인터넷에 떠돌자 걱정이 되어 서영에게 가려고 했다는 형준의 담담한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말했다.
“그럼, 이제 저를 편하게 해주는 것은 어떠세요. ”
그렇게 형준과 나는 사귀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동차 관련 기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내게 기술적 배경과 가장 큰 협력사 오너 아들이 형준이 버팀 막이 되어 줄 것 같았다. 두 달이 넘던 상하이 봉쇄는 75일 만에 끝났다. 나는 어쩌면 그 봉쇄가, 제로코로나가 지속되길 바랐다. 나는 원래대로 상하이로 가기로 했다. 내가 안 가도 중국사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경영수업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가기로 했다. 이제 중국 자동차 기업 클러스터보다 서영이 살고 있다는 상하이가, 봉쇄되었다 풀린 상하이가 궁금했다.
서영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서영 이름만 쳐도 널려 있다.
서영은 누구처럼 소년 어사급제 장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누구처럼 변호사시험을 아홉 번씩 보지 않았다. 공공기관 변호사로 일하면서 각종 프로젝트와 상담기록, 칼럼 등 서영이 쓴 글은 많았다. 베이징과 상하이에 살면서 해외 생활에 대한 글을 자기 블로그에 올렸다. 서영은 모르지만 나는 서영의 일상을 알 수 있었다.
상하이 봉쇄가 풀린 후, 2022년 8월에 나는 상하이로 갔다.
매주 토요일 저녁 6시에 상하이 시내 음식점에 같이 식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직장인 모임에 나갔다. 항상 같은 부류의 모임은 몇 개 참가했는데 해외에 가니 그런 모임이 없었다. 단신 부임이나 배우자가 외국인 사람만 참가할 수 있는 그들만의 확실한 서클이다. 매주 음식 종류를 바꿔가며 다른 식당에 가는데 쓰지민푸四季民福라는 베이징요리 식당에서 베이징 카오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자기도 베이징에서 살았다고 하는 여자에게 눈길이 갔다. 10년 동안 베이징에서 살다 2021년에 상하이로 왔다는 하얀 얼굴을 보는 순간, 서영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굳이 의도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지만 좁은 교민사회에서 자연히 서영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서영은 나를 몰랐지만 나는 서영의 하루, 아니 어제와 내일, 그 이전의 삶과 이별, 고통을 다 알고 있었다. 서영과 나는 모임에서 자주 만나며 친해졌다. 아니, 친해지려고 했다. 형준과 헤어지고 상하이로 온 서영에게 완전한 결별이 맞는지 그 상처를 확인해야 했다. 상하이 봉쇄 해제 이후에도, 간헐적 봉쇄와 지역 격리가 난무하던 상하이에서 우리는 친해졌다. 서영은 중국 생활이 처음인 나를 위해 많은 정보를 주었다. 반찬은 여기 단체방에서 시키면 된다. 코스트코 구매 대행방에서 여행사 단체방까지 나는 서영의 도움으로 상하이에 쉽게 적응했다.
2022년 12월, 갑자기 중국은 위드코로나를 선언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코로나의 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코로나가 드디어 일상이 되었다. 중국에서 숨 쉬는 사람들은 다 코로나에 걸렸다. 나도 서영도 예외는 없었다. 우리 모두 태어나면 얼굴 빨개지도록 큰 소리로 울어야 하는 것처럼 의무적으로 코로나에 걸렸다. 나는 두 번째 감염이라 가볍게 넘어갔는데 처음 걸린 서영은 1주일 넘게 드러누워 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그렇게 4년 만에 코로나가 끝났다. 정말로 그토록 중국이 주장해 온 제로코로나는 코로나를 받아들인 후에야 찾아왔다.
긴 병에 효자 없듯, 중국 오랜 경기 침체에 자동차 산업도 위축되었다.
테슬라가 전기차와 자율 주행으로 자동차 업계 주도권을 잡으며 내연차 위주였던 회사 매출은 빠르게 줄었다. 유능과 결단은 회사 임원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에게도 있었다. 베이징 공장에 집중해서 하이브리드 자동차로 가야 한다는 삼촌 조언에 따라 아버지는 과감히 상하이 공장을 매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 전화에 나는 베이징으로 가겠다고 했다. 베이징에 가서 하이브리드 차 생산이 본 궤도에 오르는 과정을 배우며 함께 하겠다고 했다. 형준에게 베이징 연구소로 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서영은 형준과 베이징에서 함께 온전히 살지 못했지만 나는 완벽한 형준과의 삶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 뜻(형준에 대한 묘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이글대는)을 꺽지 못했다. 늘 친절한 서영은 베이징으로 가야 한다는 내 말에 아쉬워했다. 서영이의 가장 얇은 부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긴 시간 해외에서 살면서 항상 만나면 언젠가 떠나는 사람들과 헤어지며 멍이 드는….
베이징으로 간다는 내 말에 또 서영은 맑은 얼굴로 나를 봤다.
실핏줄이 터져 멍이 번지는 표정이다. 집을 구하는 것을 도와 달라는 내 말에 서영은 친절하게 같이 간다고 했다. 나는 서영과 같이 베이징으로 가 확인하고 싶었다. 서영과 형준의 확실한 결별을, 그들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을… 그렇게 우리는 같이 베이징으로 갔다.
서영이 소개한 부동산 직원과 같이 아파트를 둘러봤다.
임대료가 얼마가 되든 상관없는 나와 다니면서도 자기 돈으로 월세 내고 살던 서영은 알뜰하게 아파트를 골랐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부동산에서 보여주는 아파트마다 장단점을 골라냈다. 어느 아파트를 봐도 그저 그랬다. 전에 서영은 베이징에서 ‘화딩华鼎’에서 살았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화딩이라는 중국 스러운 한자 냄새 강하게 풍기는 이름을 설핏 들었다. 화딩, 어떤 아파트에서 형준과 서영이 살았는지 궁금했다.
화딩을 보러 가자는 말에 서영은 도드라지지 않은 못마땅함을 살짝 내비친다.
화딩아파트 302동 504호에 들어서기 전까지… 생선이 신선한지 아닌지 아가미만 봐도 알아내는 어부처럼 부동산에서 보여주는 아파트마다 장단점을 집어내던 서영은 그 아파트 앞에서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 집에 뭔가 있구나… 형준과의 무엇이… 흐려지는 서영 눈빛에서 이 공간에 남은 의미를 읽었다.
부동산에서는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전에 한국인 여자 혼자 살았는데 그동안 비어있던 집이지만 관리를 잘하고 살 던 집이라 깨끗하다고… 한 달마다 남편 형준이 왔다 갔다는 사실을 몰랐나 보다. 알아도 몰라도 상관없지. ChatGPT보다 빠르게 분석하던 서영은 이 집 안에서 애니악보다 느린 컴퓨터가 되었다. 이 집으로 계약하겠다는 내 말에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본업인 변호사로 돌아가 집 계약서 작성을 도왔다. 임대 계약서를 체결한 나는 이제 이 공간의 배타적 점유와 점유권을 얻게 되었다. 나는 이 집에서 남아있지 모를 형준과 서영의 추억을 캐내서 버리고 싶다.
서영은 오늘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돌아가야 한다. 내일 월요일부터 출근을 해야 하니까…베이징남역까지 지하철로 가겠다는 서영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서영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상대방은 모르지만 나만 아는 비밀을 혼자 움켜준 은밀함은 주머니 속 사탕을 가득 움켜준 아이 주먹만큼 단단했다. 혼자 가도 된다는 서영을 베이징남역까지 데려다주고 왕징으로 돌아왔다. 서영은 나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일부러 서영의 흔적을 골라냈다. 누군가의 이별은 누군가의 시작이다.
“들어오세요.”
“어, 그래요”
발 디디면 깨질 것 같은 얇은 살얼음을 밟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형준이 엉거주춤 집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서영과 형준, 그 둘은 모르는 나만의 은밀한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