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안 산책하고 돌아왔을 때, 하얀 방역복을 입은 다바이大白들이 집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은 코로나 감염자로 확진됐습니다. 지금 바로 수용시설로 이동해야 합니다.
你被确诊为新冠感染者现在就要去放舱”
다바이-중국 문화혁명때, 부역한 사람들을 홍위병이라고 불렀고 중국 제로코로나 정책에 호응해 하얀 옷을 입고 방역업무를 도운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2020년 1월, 코로나라는 단어가 세상을 퍼질 때부터 감염자와 밀접접촉자를 팡창으로 데리고 갔다. 14일 동안 수용하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검출되지않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팡창으로 끌려가는 일이었다. 외국인들이 올린 그 곳의 영상이나 사진은 보는 자체만으로 숨이 막혔다. “집 안에서 격리할 수는 없나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순순히 끌려갈 수는 없었다. 는 맞냐는 내 말에 단호하게 맞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검사결과는 정확한가요? 检查结果正确吗”
“네,정확합니다.是的, 很正确”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대한민국은 바다 건너에 있었다.
그동안 팡창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올렸던 영상과 글을 수없이 봤지만 막상 그 순간이 내게 닥치자 머리 속이 하애졌다.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대로 챙겼다. 옷 몇 벌, 세면도구, 노트북, 수건, 구급약들. 하얀 방역복을 입자 숨 쉬기 답답했다. 이 상황은 더 그렇다. 봉쇄 50일 만에 처음으로 아파트 문 밖을 나왔다. 봉쇄가 풀려 자유롭게 나가는 게 아니라, 감염자가 되어 끌려 나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팡창에 간다고 연락해 소란과 걱정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상하이 시내 곳곳에는 바리케이드와 차단펜스가 겹겹이 쳐 있었다. 나를 태운 방역 차량도 통행증을 몇 번 제시하며 시내를 가로질렀다.
‘아, 여권을 챙겨왔어야 했다’
그 순간 방역복 안으로 식은 땀이 흘렀다. 이제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차량은 상하이 근처 어디나,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봤지 가 본 적이 없는 섬, 아니 놀러조차 가 본 적 없는 그 섬에 지금 나는 ‘감염자’ 라는 신분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알고 있었다. 팡창에 가면 코로나가 아니라 팡창생활 그 자체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는 걸… 점점 강해지는 소독약 냄새가 팡창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겹겹이 철조망과 차단벽으로 둘러쌓인 거대한 팡창이 보였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거대한 성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공포가 밀려온다.
하얀 방역복에 페이스쉴드를 쓴 방역요원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게임진행자처럼,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의 순서대로 조립되는 부품처럼 코로나검사를 받고 지급물품을 받았다. 플라스틱 바구니에 안대, 귀마개, 화장지, 비누, 치약, 치솔, 마스크, 1회용 장갑, 개인 수저가 담겨 있었다. 안대와 귀마개는 내가 빛과 소음에 시달리게 될 거라고 미리 알려주는 것이었다. 둥근 돔 지붕 아래, 침대 수십개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줄 지어있었다. 내 인권은 이제, 대한민국 여권 안에만 있었다. 그나마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중앙이 아닌 맨 구석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방향 맞춰 나란히 늘어선 침대는 멀리서 보면 관처럼 보였다. 침대는 길이 2미터, 넓이 1미터 싱글침대였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침대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나라 제조능력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인공산과 섬도 만들고 인공비와 눈을 뿌릴 수 있는 나라,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니까
저녁 시간이 되자 침대마다 도시락이 놓였다. 봉쇄 이후 처음이었다. 재료 걱정, 물자 걱정 안 하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 회사, 상하이와 베이징에 있는 지인들에게 팡창에 수용되었다고 연락했다. 상하이사무소와 본사에도 보고했다. 지인들은 영사관에 연락해보겠다고 했다. 단, 한 사람,민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행중이거나 아니면 격리시설에 있거나 힘든 상황을 헤매는 사람에게 나에 대한 걱정을 얹고 싶지 않았다.
형준에게 문자가 왔다.
“상하이생활 그만두고 한국으로 오면 어때”
”그럴까요”
그렇게 말할 뻔했다.
3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는 핵산검사, 반복되는 부분봉쇄와 이동통제, 사회적 거리두기,
지쳤다.
감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하루 하루 외줄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조차, 나는 한국에 갈수 없었다.
더 이상 쓰라릴 것도 아플 것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봉쇄 끝까지 버텨볼게요.”
그때만 해도 몰랐다.
그 끝이 내가 죽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먹은 것은 없어도 양치질을 하고 싶었다. 세수도 하고 따뜻한 물에 씻고 싶었다. 조립식 샤워실 앞에는 긴 줄이 늘어 서있다. 수용한 인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남녀 구분도 없었다. 샤워실 천장은 뚫려 있었고 하얀 김이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뜨거운 물은 나올까…’ 졸졸 물이 나왔다.
간신히 세수와 손발만 씻고 나왔다
‘화장실을 가야하는데..
설마 재래식은 아니겠지.
문은 있을까…’
화장실은 바깥쪽 구역에 있었다. 남녀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팡창에 오니 삶에 대한 기준이 낮아졌다. 남녀 화장실이 따로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고마운 일이 되었다.
상하이 봉쇄는 내게 겸손과 체념 그리고 최소한의 만족을 가르쳐 주었다.
화장실 문을 여니 변기에 분변, 생리혈과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얽혀 있었고 오물이 쌓여 있었다.
이 화장실을 내가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절대 값이었다.
조립식 화장실이라 수압이 낮아 물이 잘 내려가지 않았다. 오물이 쌓여 있는 이유였다.
침대로 돌아와 손 세정제로 손을 닦고 물티슈로 한번 더 문질렀다.그 손등에 눈물이 떨어졌다.
3년 동안, 제로코로나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수많은 정책은 때론 경이롭기까지 했다.
웬만한 정책과 봉쇄에 이미 면역이 생긴 줄 알았다
오늘 하루 너무 지쳤다.
‘왜 내가 여기 끌려와 있는 걸까?’
눈물은 뺨을 타고 베개 위로 떨어졌다.
팡창에는 수용자 관찰을 위해 24시간 전등을 끄지 않는다. 지급물품에 안대가 들어있는 이유였다. 밤 9시가 되자 그나마 조도를 낮췄다. 칸막이 넘어 사람들이 동영상을 보며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송곳처럼 귓가를 찔렀다.
동영상 소리,
통화 소리,
게임기 소리
낮은 음량으로 윙윙거리며 끊임 없이 팡창 안을 윙윙거리며 벌 떼처럼 떠돌았다. 나도 뭔가를 틀지 않으면 이 안에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시몬스 침대 같은 편안함을 기대한 것 아니였지만. ‘서영아, 정신차려’
중얼거렸다.
잠이 오지 않았다.
*
뒤척이다가 누군가 곁에 서 있는 걸 느꼈다.민혁이었다.
“아니 …어떻게 여기 왔어요?”
“서영씨 만나러요. 일부러 감염됐어요.”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요. 같은 팡창으로 온다는 보장도 없는데요. 비행은 어떻게 하려고요.”
“3년 동안 나도 지쳤어요. 코로나 걸리면 6개월 동안 비행 못 하니까 한국도 갔다 오고 좀 쉬려고요. 우리 여기서 같이 나가요.”
민혁 말에 나는 아기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민혁 앞에서 큰 소리로 울지 못했는데.. 그동안 쌓인 슬픔과 고통이 한번에 터져 엉엉 울었다. “그래요. 마음껏 소리내서 울어도 돼요 “ 민혁이 나를 안아주었다. 눈물이 흘러 입안에 들어왔다. 눈믈의 짠 맛이 느껴졌지만, 민혁과 입맞춤은 달콤했다.
갑자기 밝아졌다. 아침 6시
시간에 맞춰 실내 조명 조도를 높였다.
눈을 뜨자 스프링에 등이 배기는 침대 위, 부직포로 싼 이불을 덮고 나는 여전히 팡창 안에 누워 있었다.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간절히 보고 싶었던 민혁은 오지 않았다. 올 수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은 팡창 안에서도 갇히지 않는다. 꿈에서라도 그를 만나 행복했지만, 지금 옆에 있는 것은 나를 지키는 방역요원과 팡창에 갇혀 있다는 불행한 현실은 그대로였다. 민혁이과 같이 있던 시간은 봉쇄된 세계에서도 내가 덜 무섭고 덜 외로웠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혼자 있는 지금, 수류탄이 터지고 하늘에서 폭격이 떨어지는 전쟁터에 남겨진 병사 같았다. 더는 여기 있을 수 없었다. 아침 도시락을 가지고 온 방역요원에게 말했다. “상하이 영사관에 연락 좀 해 주세요 ”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범죄자가 아니니 인신구속을 할 수 없어요.
我是大韩民国的公民,不是罪犯,你们不能限制我的人身自由”
“당신이 대한민국 국민인 것은 맞지만 감염자인 것도 맞기 때문에 우리는 검사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오지 않아야 내 보내줄 수 있습니다你是韩国人没错,但你也是确诊者。我们必须进行核酸检测,只有结果呈阴性,才能放你离开.”
“검사를 믿을 수 없다고요,난 걸리지 않았어요我不相信这个检测,我根本没感染!”
코로나 감염자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내 이마 위에 찍혀 있다. 주홍글씨보다 더 선명하고 깊게…누구도 지워줄 수 없다. 주변의 중국인 수용자들은 조용히 매끼 꼬바꼬박 나오는 도시락으로 밥을 먹고 영상을 보고 자고 다시 놀다가 또 밥을 먹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실과 샤워실을 잘도 오갔다. 나는 먹으면 화장실 가야 하기에 차라리 굶는 쪽을 선택했다. 물도 최소한만 마셨다. 걸린 적이 없는 코로나가 어떻게 나을 수 있을까? 문득 조지프 헬러 소설 <캐치 22>가 떠올랐다.
미친 군인은 전역신청을 할 수 있다.
전역신청을 한 군인은 미치지 않았다.
결국 전역하지 못하고 계속 군대에서 근무를 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나가려면 코로나가 완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다.
그러니 나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는데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식사를 거부하는 내 행동이 이상했는지 방역요원이 다가와 말했다 “밥을 먹어야죠” 나는 기운은 없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갈 수 없다면,밥도 먹지 않을 거예요 ” 흙수저로 살아온 재게 굶고 참는 것은 전공이었다.
“이러면 안 됩니다” 방역요원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방역요원에게 다시 외치고 싶었다. 나갈 수 없다는 절망감과 나갈 때까지 밥을 먹지 않겠다는 내 의지는 서로 등나무과 칡뿌리처럼 휘감으며 나를 조여왔다. 어제는 백년보다 긴 하루였다면, 오늘 밤은 천년보다 길고, 내일은 만년보다 더 길것만 같았다. 몸의 기운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물과 차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민혁이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비행기 몰고 왔어요.같이 타고 한국으로 가요.”
“정말요”
너무 기뻐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내 옆에 서 있는 것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방역요원이었다. 꿈이었다. 팡창에 끌려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무리 먹지 않아도 기본대사는 유지되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은 울렁거리지만 화장실을 가야 했다. 지옥문을 여는 것처럼 싫지만 숨을 참고 화장실문을 밀었다. 쭈그려 앉아 보는 소변을 보는데 웃음과 울음이 쏟아졌다. 이 상황에서도 살아있는 끈질긴 내 숨과 몸이 신기했다. 침대로 돌아가는 몇 걸음도 힘들었다. 어디 붙잡을 수 있는 벽이라도 지팡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다들 잠 잠든 이 고요한 수용시설 안에 나만 깨어 있었다.
‘이 밤도 지나면 내일 밤도 조금 다를까..
변하지 않은 사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뭘까..
살아 못 나가면 죽으면 나갈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파우치 안에 클립이 하나 있었다. 중국, 한국 오고 가며 휴대폰 유심을 바꿀 때마다 쓰던 그것, 뭉툭한 끝을 침대 난간에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클립으로는 깊게 혈관을 자를 수 없다. 로스쿨 다닐 때, 자살로 위장한 살인사건 스터디에서 배운 내용이었다. 며칠 전 나왔던 과일 통조림이 떠올랐다. 캔에서 뚜껑을 분리했다. ‘끈적한 과당이 묻은 캔 뚜껑으로 얼마나 깊게 내 혈관을 그을 수 있을까..’ 주저흔만 남을 수 있었다. 캔을 하나 더 따 뚜껑 두개를 겹쳐 바닥에 갈아 더 날카롭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를 살려줄 사람도 없고, 죽여줄 사람도 없었다.
누가 내 경동맥을 그어줬으면 좋겠다. 끌려올 때, 챙겨 온 약 중 스틸녹스가 있었다. 엄마가 우울증으로 복용하던 약. 2020년 춘절에 갔을 때 엄마가 과다복용할까 걱정돼 훔치듯 챙겨왔던 그 약을 내가 삼키게 될 줄 엄마는 몰랐겠지.. 치사량은 1500정, 내 손 안에는 28정, ‘이걸로 못 죽는다’ 억지로 한꺼번에 삼키니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던 내 식도가 거부했다 토할 것 같았다. 어지러움이 혈관을 타고 뇌로 향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벽과 바닥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캔 뚜껑을 손에 쥐고 샤워실로 갔다. 아니 기어갔다. 내 팔 안쪽 혈관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한 번에 깊게 그어야 했다.
하나, 둘 ,셋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몰려왔지만 피는 약하게 흘러나왔다. ‘이렇게 흘러서는 죽지 못한다. ’
머리끈으로 팔뚝 위를 간신히 묵고 샤워호스를 틀어 물줄기에 피가 계속 흘러나오게 했다.
쿵, 바닥에 쓰러지며 의식이 끊겼다.
6월1일
눈을 떴다. 하얀 벽이 보였다. 중국은 모든 벽이 하얗다. 벽만 보고 내가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을까?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봤지만 아니었다. 여전히 수용시설 안이었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죽어도, 그들이 나를 죽여도 아무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살아는 있다. 숨도 쉬고 있다. 하지만 혼자 어딘지 모르는 곳에 여전히 코로나감염자라는 칼(형벌도구)을 쓰고 나 혼자 갇혀 있었다.
‘나는 왜 여기에 갇혀 있는 것일까.. ’
왼쪽 팔 상처는 두툼한 드레싱 감겨 있었다. 오른 팔에느 포도당, 단백질 ,비타민이 들어있는 수액이 꽂혀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 여기서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죽으려고 그은 게 아니다. 살려고 그었다. 위세척을 했는지 옷에 하얀 거품이 말라붙어 있었다. 입안 가득 위세척 약품의 미끌거림이 느껴졌다. 토할 것도 없는 속이 울렁거렸다 수액이 조금 더 빠르게 나오게 조정하고 다시 누웠다. 몸 안에 흘러 들어오는 수액이 그동안 굶었던 장기에 억지로 영양분을 공급했다. 다시 깜빡 정신을 잃은 건지 잠을 잔 건지 모르겠다. 눈 떠 보니 수액을 다 맞았다. 방 안에는 별도 화장실과 샤워기도 있었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온 캐리어와 가방도 같이 옮겨줬다. 짐을 풀다 보니 휴대폰이 없다. 내 휴대폰을 가지고 갔다. 내가 여기서 겪는 모든 일과 과정을 남길 방법을 통쨰로 가지고 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방역요원이 문 밖에 밥을 놔두고 갔다. 늘 똑 같은 밥, 볶은 야채, 무슨 고기인지 모르는 고기볶음, 수액을 맞아서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대로 밥을 다시 문 밖에 놔두었다. 여기서 내보주지 않으면 굶겠다는 내 의지를 다시 보여주었다. 독방에 나를 가둔 후로 더 이상 코로나 검사를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휴대폰이 없었고, 창문을 비닐로 봉해져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하루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 둔해졌다. 물만 마시고 있는 내 체력과 정신력도 한계에 다다랐다. 지쳐 잠들면 방역요원이 들어와 수액을 놓고 갔다. 가끔 내 팔을 찌르는 바늘을 느끼고 깰 때도 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들은 나를 죽이지 않고 나도 나를 죽이지 않는 침묵의 합의점이 생겼다. 나는 모두에게 단절되었다. 모두에게 잊혀져도 단 한 사람, 민혁에게만은 잊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독방 안에 있는 작은 창은 밖으로 볼 수 없게 두꺼운 비닐로 봉해져 있었다. 비닐을 찢고 싶었다. 민혁에게 연락하고 싶다는 간절함은 2주 넘게 아무 것도 먹지 않는 내게 힘을 주었다. 도시락에 나오는 나무젓가락을 모아 하나씩 부러뜨렸다. 젓가락을 모아 비닐을 찢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두꺼운 비닐에 겨우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 하나 낼 수 있었다. 급하게 지어진 임시수용시설이라 페인트와 본드냄새, 건축자재 냄새가 폐를 찔렀다.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바깥 공기에 호흡을 하니 정신이 들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팡창에 끌려올 떄와 사뭇 달랐다. 나는 창문을 봉한 비닐에 낸 구멍을 더 크게 뚫기 시작했다. 갑자기 젖 먹던 힘이 아니라 수액맞던 힘으로.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방역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얀 다바이들이 파도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뭔가 이상했다. 방문을 열었다. 그동안 잠겨 있던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방문 밖에 사람들이 웅성이고 있었다. 상하이 봉쇄가 끝났다는 것이다.
2022년 6월 1일,상하이 봉쇄가 풀렸고 수용 시설에 있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봉쇄가 끝났다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상하이 봉쇄가 끝났다고.. 어리둥절했다.
방 앞에 내 휴대폰이 놓여있었다. 충전부터 해야 했다. 시아오홍슈小红书와 도우인抖音에 상하이 봉쇄가 끝났다는 소식들이 마그마처럼 넘쳐 흘렀다. 두 달 넘는 상하이 봉쇄와 며칠인지도 모르게 갇혀 있던 내게 ‘나갈 수 있는 길’이 생겼다. 감시하는 방역요원도 없었다. 끌려왔던 길을 걸어 나갔다. 팡창 바리케이드 철문을 나가야 했다. 그 전에는 방심할 수도 안심할 수도 없었다. 다른 수용자들도 나가느라고 철문 앞은 명절 기차역처럼 북적였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된다고. 계속된 단식과 스틸녹스 과다복용으로 손상된 내 장기에 남아있는 것은 여기서 살아나가겠다는 집념이었다. 철문을 나왔지만 나를 기다리는 것은 없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죽을 때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는 코끼리처럼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
현관문이 열렸다. 민혁이다. 브뤼셀로 가는 전세기였는데 코로나 감염자가 기준보다 더 나오며 비행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비행이 취소되어 너무 다행이야. 오늘 여기로 올 수 있어 정말 다행이야.”
민혁 얼굴에서 뚝 떨어지는 눈물이 내 마른 입술에 떨어졌다.
“미안해요. 혼자 팡창에 끌려가게 미안해요. ”
그래 나는 죽지 않았다. 민혁에 대한 그리움 하나로 버텨냈다.
우한봉쇄보다 하루 더 길었던 상하이 봉쇄 75일은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