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영역 공부는 잘했는데 수리영역이 다 말아먹었다.
부족한 수리영역을 언어, 사탐 영역이 메꿨다. 스카이는 못 갔지만 인서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영역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낸 편향적 뇌구조 덕이다.4학년 때, 대학원을 갈까 취업을 해야 할까 하는 갈림길에서 나를 예뻐한 법대 교수님은 로스쿨을 권유했다. 수학 못 해 스카이 못 간 내 안의 열등감이 로스쿨에 대한 욕망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부모가 변호사이거나 대기업 임원, 교수 등 든든한 뒷배를 가진 간다는 로스쿨에 흙수저인 내가 도전했다. 시험에는 뒷배가 필요 없으니까…
로스쿨 2년 내내, 나는 한마디 말도 안 하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현대자동차 1차 벤더사에서 중국 관련 법률 업무를 하다 형준을 만났다. 형준은 티 나지 않게 조심스레 내 옆을 맴돌았다. 형준은 중국을 가겠다는 내 의지를 꺽지 못했다. 형준은 결혼하고 가라고 했다. 누군가 내 옆에 있어주고 지켜줄 사람이 생긴다는 게 좋았다.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가거나 형준이 오기로 했다. 한국 기업들 법률 관련 자문, 소송을 도와주고 중국 경제, 정치를 연구하는 공공기관 KCAO 현지파견 변호사로 베이징에 왔다.
방송출연하거나 유튜브를 하는 유명변호사처럼 화려한 삶은 아니어도 여기서는 나를 둘러싼 모든 굴레와 선입견이 없었다. 지방대 로스쿨을 나온 것도 홀 어머니가 혼자 키운 것도 아무도 물어보지도 않았고 알지 못했다.흙수저인 내가 은수저로 살 수 있던 시간이었다. 2019년 11월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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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 근무하려고 했던 베이징 사무소 포지션은 붙박이가 되었다. 2016년 사드 배치 문제가 불거지며 봄날 같던 한중 관계는 겨울왕국처럼 얼어붙었다. 본사 소속 변호사 중에서 혹시 중국으로 보낼까 봐 중국어를 할 수 있는데도 못하는 척한다는 소문마저 들려오며 아무도 중국으로 오려고 하지 않았다. 서울과 베이징을 오고 가며 유지하던 우리 결혼 생활은 코로나가 갈라놓았다.
2019년 11월 우한 폐렴은 중국이 중국을 봉쇄하게 했다. 2020년 춘절에 한국에 가서 형준과 엄마를 만나고 베이징으로 돌아온 것이 우리 마지막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한국과 중국을 오고 가던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오고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갔다. 봄이 오고 또 봄이 왔지만 중국 제로 코로나 정책은 건설현장에 부어 놓은 레미콘처럼 견고하게 굳어갔다. 이제 우리가 한국과 중국을 오고 갈 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형준에게 이제 나를 떠나라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나는 한국에 갈 수도 형준이 중국에 올 수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 만나 행복하라며… 똑같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세계에 살지만 내가 사는 세계는 또 다른 세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형준과 이별 후, 그와 함께 했던 공간과 시간을 바꾸고 싶었다.
베이징에서 사는 동안 형준은 매달 중국에 왔고 같이 밥 먹고 마트도 가고 산책을 했다. 왕징 구석구석 묻어 있는 형준과의 추억과 흔적에서 떠나고 싶었다. 본사에서도 베이징 사무소를 최소화해 중국인력만 남기고 한국인력은 상하이로 옮기겠다고 했다.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본사에 속으로 흔쾌히 겉으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