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의 발목이 많이 좋아져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봉쇄 생활은 아이들의 방학 생활계획표보다 더 규칙적이었다. 아침이면 자가진단키트로 검사를 해 앱에 올리고 저녁에는 아파트 안 검사소에 가서 핵산검사를 받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우리는 낮잠을 자지 않았다. 방은 각자 청소했고, 주방은 내가, 거실은 서영이, 화장실은 내가 청소했다. 서영이 발목 다친 후부터, 우리는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서영은 내 손을 꼭 잡고 자는 것을 좋아했다.
“기장님 손은 따뜻하고 폭신폭신해서요. 잡고 있으면 마음이 놓여요.”
아이처럼 좋아하는 서영이 귀엽고 애틋했다. 늘 외로웠던..
상하이 내 물류도 끊긴 상황에서 뜻밖에도 맥주 한 상자가 도착했다. 베이징에 있는 서영 지인이 영치품(?)이라고 농담하며 보내줬다고 했다. 중국에서 관시로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없는 것보다 많았다. 서영은 그 중 몇 병을 들고 나가, 도움을 주고받았던 한국인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왔다. 그동안 한국인 이웃들과 서로 안 먹는 식자재도 교환했고, 누가 아프다고 하면 자기 집에 있는 약을 나눠주었다. 화상을 입은 한국인이 단체방에 화상연고가 필요하다고 하자 마침 연고가있었던 서영이 재빨리 이웃을 도울 수 있었다. 우리가 오랜만에 감자튀김까지 만들어 맥주를 마셨다. 봉쇄 후 처음으로 술을 마시니 둘 다 금세 졸렸다. 초저녁 무렵,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손을 잡고 선잠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쿵,쾅’하는 폭발음 같은 큰 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놀라일어났다.
“무슨 일일까요….”
이럴 때, 서영은 침착하고 재빨랐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신호가 없다고 했다. 서영의 집은 와이파이가 없으면 휴대폰이 터지지 않았다. 인공위성까지 쏘아 올리는 나라에서, 집안에 셀룰러 데이터가 잡히지 않는 모순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더니 돌아와 말했다. “정전이에요”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신호를 잡으려면 아파트 1층까지 내려가야 했다.
“14층을 걸어 내려갔다 올라와야 하고 발목도 조심해야 하니….나 혼자 다녀올게요”
서영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컴컴한 공간에 혼자 있기 싫다는…
답을 하지 않았다. 서영은 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70㎡ 공간에 24시간 같이 있는 우리는 작은 감정의 파동도 금세 느낄 수 있었다.
“저도 회사와 가족에게 연결을 해야 하니 같이 나갈게요.”
결국 우리는 같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각자 떨어져 통화를 했다. 회사에는 당분간 비행이 생겨도 배정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비행하기 싫었다. 14층까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서영은 꼭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계단을 오를수록 숨이 가빠왔고, 등에는 땀이 흘렀다. 하지만 서영은 내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아파트 안은 어둠에 잠겼고, 그 어둠 사이에 불안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
햇볕만이 시간을 알려주었다. 휴대폰은 충전을 못해 꺼졌고,아파는 전기도,신호도,외부와의 연결도 끊긴 채 멈춰 있었다. 옆에 누워있는 서영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였다.
“괜찮아요. 지금 어때요.”
그런 말이 무슨 위로가 될까..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서영이었다.
“일어나야죠.”
창 밖으로 햇볕이 들어오는 낮 시간, 집안일을 좀 하고 나가보자고 했다. 정전이 되니 좋은 점도 하나 있다. 핵산 검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서영은 다른 한국 사람들과 연락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14층에서 1층까지 왕복하는 쉽지 않은 일은 서영의 몫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1층에 내려가 기다리기로 했다. 가벼운 뜀뛰기 운동하며 서영을 기다렸다. 정전은 전기만 끊은 게 아니라, 우리의 신경, 근육과 의지도 끊으려고 했다. 시계를 보며 아파트 안을 두리번거리다 멀리서 서영 같아 보이는 느낌에 얼른 뛰어갔다. 이제 희미하게 보여도 서영을 느낄 수 있었다. 서영이 1리터 생수 6병 묶음을 혼자 끙끙 들고 오고 있었다.
“이걸 혼자 들고 왔어요. 나한테 말을 하지”
애쓰는 서영에게 미안했고 고마웠다. 다시 14층을 숨을 몰아쉬며 같이 올라왔다. 지친 우리는 해가 있을 때, 서둘러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봉쇄상황에서, 내게 윤리나 도덕은 살아남았을 때 할 이야기였다. 서영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서영은 아무 말도 없이 아주 천천히 나를 쓰다듬었다. 어색한 숨결이 점점 가까워졌고,우리는 조용히 서로에게 몰입해 갔다. 봉쇄 40일째 저녁이었다 밖은 여전히 정전 속 침묵만 있었고, 우리 둘 사이에는 오래 억눌렸던 감정과 열정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창 밖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펑’ 전기가 들어왔다. 정전도 예고가 없었지만 다시 전기가 들어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지금 41일동안, 내게 벌어진 일은 하나같이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우리는 휴대폰부터 충전했고, 회사와 가족에게 연락했다. 서영은 한국에 있는 전 남편과 소곤소곤 통화하고 있었다. 서영의 낮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이유 없는 질투가 꿈틀거렸다. 아침부터 분주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서영의 표정이 흐렸다. 이제 그녀를 둘러싼 공기만 봐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조용히 집에서 나왔다. 매일 서영과 같이 핵산검사를 받기 위해 걷던 길을 혼자 걸었다. 서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바보처럼 계속 힐끔힐끔 옆을 봤다. 여전히 비어있던 옆을…
스케줄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정전이 끝났다고 연락을 하자마자이다. 누가 중국을 만만디라고 했을까.. 자기네들이 필요할 때는 우사인볼트보다 빠르다.
헬싱키로 가는 비행이 배정되었다며, 회사 차를 보내줄 테니 아파트에서 나오라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었다. 서영을 혼자 두고 여기서 나가야 했다. 나 혼자 이 봉쇄 지옥에서 나간다고 말해야 했다. 지금 무엇인지 내가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서영을 두고…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지만 전혀 편하지 않았다.차라리 정전이라 걸어 올라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1401호 문 앞에 섰다. 이 집에 온 첫날, 서영은 내게 집 비번을 알려주었다. ‘404075’전자 키 패드를 누르고 집 안에 들어가니 어둠뿐이었다. 베란다 구석에서, 서영이 웅크린 채 앉아 있던 서영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작은 어깨가 더 작아 보였고, 서영의 울음은 집안을 적시는 듯 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물어보는 것은 의미 없었다.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을 거니까..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집안일이건 회사 일이건 한 번도 힘들다 말한 적 없는 서영이었다.
그런 서영이 이렇게 무너져 울고 있었다. 나는 몇 시간 뒤면 여기를 떠나야 했다. 불안과 조급함이 나를 조여들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밤, 나는 방문을 다시 열고 서영을 끌어안았다.
제로코로나와 봉쇄라는 철조망에 갇힌 내게, 윤리는 멀리 있었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그 순간, 나는 격렬했다. 서영은 담담하게 나를 받아들였다.
모든 것이 가라앉은 뒤,우리는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누웠다.
서영은 처음에 내게 안겼을 때처럼, 천천히 내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방 안에는 어둠과 침묵만 있었다. 서영은 내 머리 속을 스캔이라도 했나 보다
.
“비행 스케줄 나왔나요.”
서영이 물었다.나는 기어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래요.”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말끝이 자꾸 작아졌다.
“가야죠. 주민위 같이 가요.”
서영은 일어나며 씩씩하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봐’ 서영의 캐리어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잡고 주민위로 걸어갔다. 42일 동안 몇 번을 오고 갔을까….이제, 그 길을 서영 혼자 걸어야 했다. 기장 ID와 회사에서 보내준 공문을 보여주었지만, 출문증을 받기 위해 한참 실랑이를 해야 했다. 겨우 받은 출문증을 들고 서영의 손을 잡고 아파트 정문까지 걸어가는 동안, 서영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2022년 4월 1일부터 굳게 쇠사슬과 철봉으로 막혀 있던 아파트 정문이 출문증 한 장에 서서히 열렸다. 나는 나갔다. 서영은 남았다. 멀리서 회사로고가 박힌 차를 타고 온 부기장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좀 천천히 와도 되었는데.. 내가 탄 차가 아파트에서 멀어질 때까지 서영은 정문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 옆에, 내가 두고 온 안타까움과 쓰라림도 같이 서 있었다.
3년 내내 시설격리를 했던 호텔에 다시 들어섰다. 봉쇄된 아파트에서 격리호텔로, 장소만 이동했다. 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한국에 있는 아내보다 상하이에 있는 서영에게 먼저 문자 보내는 내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비행 전 브리핑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헬싱키행은 화물기라 그나마 간단했다. 호텔에서 푸동공항으로 가는 길, 도시는 적막했다. 활주로도 조용했다. 이륙허가는 요청하자마자 빠르게 떨어졌다.나는 떠났다. 서영을 두고…봉쇄된 상하이를 뒤로 하고 헬싱키로 날아갔다. 11시간의 비행-전반은 내가 조종간을 잡았고 중간에 중국인 기장과 교대했다. 헬싱키는 달랐다. 아무도 우리를 구속하지 않았다. 11시간 만에 나는 같은 지구, 완전히 다른 곳으로 왔다. 별을 바꾼 것도 아닌데..
헬싱키의 여름은 백야였다. 저녁 9시, 선잠에서 깨어났다. 이틀 전에, 난 분명히 서영 집에 있었다. 끊겼던 전기가 다시 들어왔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서영이 울고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연락받고 어젯밤 푸동에서 헬싱키로 날아왔다. 술 마신 다음 날 블랙아웃처럼 기억을 기억이 엉켰다.그렇게,하얀 밤이 지났다.
이른 아침, 마을은 조용했다. 갓 구운 빵 냄새에 홀리는 듯,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휘바아 후오멘따 Hyvää huomenta”(핀란드 아침인사)
서영이 이 빵을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호밀빵 두 덩이를 사고 경성치즈인 에멘탈과 올리브도 샀다. 헬싱키에서 스탑오버 48시간은 완전한 자유였다. 뭐든지 먹을 수 있고 할 수 있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혼자 하면 뭐해…. ’
다시 상하이 푸동공항으로 출발했다. 숨 쉬는 공기마저 자유로운 이곳을 떠나 봉쇄감옥으로 스스로 걸어가야 했다. ‘아니, 비행기 타고 가지…’
러시아 항공을 지나 상하이 하늘이 보이자 벌써 소독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47일째 봉쇄 중인 상하이와 3년째 해외 입국자 격리 장막을 친 중국이 보였다. 봉쇄와 핵산검사 무한반복 속으로 착륙했다. 입국 후 바로, 격리시설에 들어가자마자 서영에게 온 문자부터 봤다. 아내보다 서영에게 온 메시지를 먼저 찾는 나를 욕할 생각 없었다.
“흐어수안지앤차核酸检测”
핵산검사를 받으라며 방역요원이 외쳤다. 눈을 뜨고 보니 나는 서영 아파트가 아니라 회사 격리호텔
에 있었다. 헬싱키에서 어제 밤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그때야 들었다. 서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고 싶다.”
서영에게 메세지가 왔다.
“혼자 아파트 안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있어요”
구호품 양은 같은데 혼자 먹으니 많이 남는다고 했다.
‘퍽이나’
코로나 발생 이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내가 없는 아파트 안에서, 서영은 혼자 스스로 자기를 지켜내고 있었다. 그 사이, 상하이 물류가 풀렸는지, 헬싱키로 떠나기 전보다 격리호텔에서 주는 도시락에 야채와 고기가 더 들어있다. 나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지만.. 서영에게 헬싱키에서 사온 호밀빵과 치즈를 보내고 싶었다. 이럴 때, 관시의 힘을 빌려야 했다. 중국 부기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에게 먹을 것을 좀 보내고 싶다고.. 아직 PM(Pilot Monitoring)이 미덥지 않아 이착륙 권한을 주지 않던 부기장이지만 이번에는 흔쾌히 내 편이 되어줬다. 헬싱키에서 가져온 종이봉투에 호밀빵, 치즈, 와인과 페이셜티슈를 넣고 주소를 적었다. 작은 쪽지도 하나 넣었다.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버티라고…봉쇄 끝날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은 끝내 쓰지 못했다.
2020년, 코로나가 발생한 이후 나는 3년 내내 격리와 비행을 반복했다. 군대도 3년 안 가는 데, 해외 입국자 격리를 3년도 넘게 하고 있는 내게 내가 신기했다. 서영에게 연락하면
“괜찮아요. 한 사람이라도 식사 걱정 안 하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
늘 친절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런 서영이 안쓰러웠다. 우리 둘 다 봉쇄에 말라가고 시들어갔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괜찮치 않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비행 스케줄이 나왔다. ‘한국’이라는 말에 가슴 심박수가 자동으로 높아졌다. 한국에, 집에 못 갔다 온 지 3년도 넘었다. 한국에 간다고 해도, 집에 갈 수도, 가족을 만날 수도 없다는 것도 알면서도 한국이라는 말에 비행한다고 했다. 봉쇄한 지 두 달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 가는 비행기는 난징南京에서 출발했다. 가족을 만날 수 없고 격리시설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스케줄이었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비행기 조정뿐이었다. 난징을 출발 해 인천공항에 내렸다. 한국도 정상화 많이 되어 다른 나라 항공기들이 주기장에 많았다. 한때, 내가 운항했던 항공사 비행기를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공항 땅이라도, 한국 땅 밟아보니 뭉클했다. 3년 만에 한국에 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떠날 준비뿐이었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후, 순항고도에 다다르자 랜딩기어를 올리고 오토파일럿을 켰다. 칵핏(비행기 조정석 창문) 밖으로 분당이 보였다.서영은 한국에서 분당에 살았다고 했다. 상하이에 돌아와 서영에게 분당하늘 사진을 보냈다. 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문자를 해도 답이 없었다. 답답함과 불안감이 겹겹이 내게 엉겨 붙었다. 내가 아는 것은 서영 한국 본사 이름이였다. 그걸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안과 걱정에 화를 내거나 소리 질러도….
봉쇄가 5월 말에 풀릴 거라는 소식은 여기 저기서 귀에 들어오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다시 헬싱키행 비행편이 배정되었다. 헬싱키에서 상하이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서영에게 물건을 보내는 것을 도와주었던 부기장은 감염자들이 급격히 늘어 추가수용을 위해 상해 근처에 또 다른 집단수용시설을 짓고 있다고….상하이로 돌아왔다. 다시 격리호텔로 갔다. 롱시루에 있던 내 집은 이제 어떻게 생겼는지 구조도 기억 안났다. 40일 동안 살았던 서영의 아파트 구조는 3D 화면처럼 또렷한데... 아내보다 서영이 더 걱정되고 안타까웠다. 누가 내게 돌과 창을 던져도 상관없었다.
베이징에서 함께 알고 지내던 사람들 몇몇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서영 씨 알죠? KCAO 다니는”
서영이 감염자 수용 시설로 끌려가기 직전, 지금 팡창으로 간다는 문자를 받았고 그 이후론 연락이 없다고 한다. 가슴이 칼에 찔린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진다.
‘그랬구나, 팡창으로 끌려갔구나 ’
서영은 내게 걱정과 불안을 주지 않기 위해 팡창에 끌려간 고통을 말하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는 말은 속담 책에나 있었다. 서영에게 가고 싶었다. 저 문을..격리호텔에서 내가 머무르는 방문을 나가고 싶었다. 방역요원이 핵산검사를 위해 방문을 여는 순간, 나는 방역요원을 밀치고 뛰어나갔다. 한걸음도 걷기 전에 내 머리를 방역요원이 곤봉으로 내리쳤다.
‘쿵 ’
의식이 끊겼다.
회사에서는 나의 돌발행동을 어쩌지 못했다. 부기장 천 명이 있어도 기장 한 명이 없으면 비행기를 띄울 수 없으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머리를 맞은 충격에서 깨어나도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의 탈출시도는 모두의 침묵과 담합 속에 없었던 일이 되었다.그렇게 나는 하얀 밤을 보냈다.
6월이 다가왔다. 부기장과 스케줄러에게 부재 중 전화가 걸려왔다. 상하이 봉쇄가 끝났다는 문자와 함께..두 달 넘게 상하이를 감싸고 있던 봉쇄라는 거대한 에어돔이 걷혔다. 하지만 숨도 쉬기 전에 그새 비행이 배정되었다. 상하이 봉쇄 풀리자마자 유럽으로 돌아가려는 승객들이 폭증해 브뤼셀까지 가는 특별기를 긴급 편성했다고..
서영에게 전화했다.
서영은 지금 팡창에서 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는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래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집으로 가 있어요.”
“언제 집으로 올 수 있나요.”
“지금 막 비행이 잡혀서요.”
“그래요. 비행 가셔야죠.”
서영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서영이 우리가 함께 머물던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나는 갈 수 없었다.
봉쇄가 끝났는데 서영에게 가는 게 아니라 브뤼셀로 떠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