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가 봉쇄되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도시는 봉쇄되었지만 우리 내장은 봉쇄되지 않았다. 식사는 매일 필요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남은 식자재를 확인했다. 이 집에 온 지 3일 만에, 어느새 냉장고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이제 냉장고가 생존에서 제일 중요해졌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도, 배달을 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시간은 그렇게 묵묵히 흘러갔다. 핵산검사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딱 한 번,외출이 허락되는 순간, 아파트 담장 고압 전류선을 넘어 봄바람은 살랑살랑 자유롭게 오가는 데, 우리는 그 담장을 넘을 수 없었다. 서영은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었다. 낮에는 회사 업무를 하느라 노트북과 휴대폰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이제 익숙해진 작은 방에서 근력 운동을 했다. 격리시설을 전전하며 터특한 홈트 노하우 덕분에,운동 도구 없어도, 웬만한 유튜버보다 더 잘했다. 매일 똑 같은 봉쇄 생활 속, 잠들기 전 가벼운 산책을 하고 싶어 서영에게 말했다.
“몰래 나갈 볼까요?”
바로 일어섰다. 나만 지루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파트 안 산책로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봉쇄는 우리만 가둔 게 아니라 반려동물들도 같이 가두었다.
제주도보다 남쪽에 있는 상하이에, 봄이 와 있었다.
밝은 달빛 아래, 매화 꽃잎이 날리는 봄 밤
우리는 봉쇄된 아파트 안을 천천히 걸었다.
쌀도 야채도 다 떨어졌다.
냉장고는 내게 냉랭한 얼굴로 했다. 그 사이, 아파트 단체방이 만들어져 서로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영 집에는 물물교환을 할 물건조차 없었다. 봉쇄 10일 째, 현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서영이 어디가에서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하긴, 나갔봤자 안이겠지, 햄과 만두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어디서 났을까? 의아해하고 있는데, 서영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화장실 휴지랑 바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안에 따뜻한 물이 스르르 번졌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로 간신히 기초 대사를 유지했다. 냉장고에 비어가는 공간이 느는 만큼 우리 위장이 비어있는 시간도 길어졌다. 봉쇄된 아파트 안에서도 시간은 흘러갔다. 4월도 이제 끝자락을 보이고 있었다. 핵산검사 줄에 서있으면 내가 중국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서영과 단둘이 있는 70㎡ 아파트 안에 있으면 지구에서 한참 떨어진 별나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언젠가 돌아갈 것 같은데 지구와 별나라 사이에 당기는 장력이 없어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답답함에 몰래 우리는 밖으로 살금살금 나갔다. 서영과 빠르게 걷다가 조금 뛰어보기로 했다. 간만숨이 찰 정도로 뛰니 가슴 속 답답함이 가벼워지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륙할 때 조종간을 당겨 고도를 높여 하늘로 올라갈 때, 기분을 느꼈다. 비행을 못 한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바퀴를 뛰고 돌아 오니 서영이 보이지 않았다.
‘힘들면 걸으면 되는데….’
불안함에 아파트 순찰을 도는 경비에게 걸릴 것도 무시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화단 옆, 고개 숙이고 웅크린 서영을 찾았다. 안도감과 반가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넘어졌어요.”
서영을 부축해 일으켰다.
원래 발목이 약하다고 했다.
과속 방지턱 경사에 발을 헛디뎌 꺽였다고.
이 집에 온 첫날, 뒤에서 안은 내 손을 풀려고 서영이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았고 오늘이 그 두 번째였다.
나는 스무 살 첫사랑도 아닌데 ,서영이와 손을 잡는 횟수를 세고 있었다.
서영을 부축해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눕혔다.
약상자에 뒤졌지만 소염진통제가 없고 타이레놀만 겨우 있었다.
‘이거라도 먹는 게 낫겠지.’
낯선 약이 하나 있었다.
스틸녹스
처방이 필요한 수면제를 한통이나 가지고 있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렸다.
“원래 발목 잘 삐어요. 괜찮아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잠시 망설이던 서영이,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아파요.”
삐었을 때, 제대로 치료를 못해 점점 만성질환이 되었다는 서영이 안쓰러웠다.
우리 둘 다 지금 상황에 지치기 시작했다.
“불편하더라도 붕대를 감고 자요”
서영 어깨를 조심스레 다독였다.
그 순간 서영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내 손 안에 있는 서영 손에 가슴이 뛰었다.
우리는 잔 듯 만 듯 잠을 설치며 봉쇄된 밤을 보냈다.
봉쇄 속에서도 주말은 돌아왔다. 비슷한 시간에 눈을 떴다.
“깼어요?”
서영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눈을 떴지만 서영은 아직 침대에 좀 더 누워 있고 싶어 했다.
“다리도 아픈데 쉬어요. 내가 커피 내릴게요”
서영이의 삔 발목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 순간 서영이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조금만 더 같이 누워있어요.”
사실 그랬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침이라서 일어나야 할 필요도, 밤이라고 자야 할 이유가 없었다.
24시간, 우리는 70㎡ 네모난 콘크리트 시멘트 벽 안에 갇혀 있었다. 서영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얼굴에 흘러내린 앞 머리를 살짝 쓸어 올려주었다. 그 사이 서영의 앞 머리가 많이 자랐다. 서영도 천천히 내 가슴 위에 팔을 올렸다. 애틋함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서영 휴대폰이 울렸다. 계속되는 알림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기운이 없는데 휴대폰은 기운도 좋았다.
“주민위에서 구호품을 나눠준다고 단체방에 공지가 떴어요.”
잠시 후, 구호품을 받으러 내려오라고 인터폰이 울렸다.
엘리베이터 안 사람들은 결혼식에 가는 하객처럼 들떠 있었다.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가 아파트 세대수대로 쌓여 있었고 계란도 있었다. 계란 한 판이 30알이라는 것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동 호수를 적고 구호품 상자와 계란 한 판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영은 아파트 안 다른 한국인들과 반가운 눈인사를 나눴다. 상자 안에는 버섯 한 봉지, 감자, 무 한 개, 이름을 알 수 없는 중국 야채 두 무더기, 양파, 마늘, 생 돼지고기 한 덩이와 쌀 500g이 들어있다. 우리는 식탁 위에 구호품을 펼쳐 놓고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요리할지 이야기했다. 돼지고기는 나만 먹을 수 있었다. 서영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나만의 음식이 생긴 게 미안했다.
“괜찮아요. 저 고기 먹을 정도로 배 고프지 않아요.”
서영은 미리 내 미안함을 덜어주는 말을 했다.
‘이름 모른 중국 야채는 어떻게 하지? 푸른 생야채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 어떻게 요리하지..’
아는 야채부터 요리해 먹고 낯선 야채는 천천히 검색해서 먹기로 했다.
주방에서 할 일이 갑자기 많아졌다. 지금까지 겨우 한 가지 음식만 만들어 나눠 먹었는데, 오늘은 세가지 요리도 가능할 것 같았다. 24시간 집 안에 갇혀 있는데, 바쁘다고 하면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 못 할 것이다. 돼지고기를 삶아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서영 집에 술 한 방울도 없다는 것이었다. 서영은 아파트 한국인 단체방에 소주를 구한다는 글을 올렸고 다른 동에 사는 한국 사람에게 팩 소주 하나를 주기로 했다.
“뭔가 답례로 줘야 할 선물이 있으면 좋겠어요.”
헬싱키 비행 갔을 때, 사온 남자 클렌징폼이 생각났다. 혼자 사는 여자가 남자 클렌징폼을 들고 물물교환을 하러 나가는 뒷모습을 보니 왠지 안아주고 싶었다. 어린 심청을 동네 동냥에 내보낸 기분이었다 서영은 팩 소주 두 개와 새우깡까지 받아왔다.
“클렌징폼을 드리니까 미안해 하며 팩소주 하나로 부족하다고 새우깡까지 주셨어요. 같은 한국사람끼리 뭘 이런 걸 주냐며 미안해하시더라구요”
헬싱키에서 5유로 주고 산 클렌징폼은 봉쇄된 아파트 안에서 또 다른 한국인에게 건네 수 있는 고마운 선물이 되었다. 봉쇄 2주 넘어가자, 외부에서 식료품이 공급되기 시작했다. 차와 소금만 마실 뻔한 상황에서 씹고 삼킬 수 있는 음식이 생긴 것 기뻤지만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봉쇄 상황은 반갑지 않았다. 우리는 갇혀 있지만 지구 자전 작용은 갇히지 않았다. 지구는 돌고 돌아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며 여름 위치로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