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되는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은 분명 아닌데, 막상 그 사람이 크게 성공하고 나면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축하하는 마음은 분명한데 어딘가 낯설고, 반갑기는 한데 전처럼 편하게 웃기지는 않는 감정이 듭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예능에서 보아오던 장항준 감독이 천만 흥행 감독이 된 뒤, 이상하리만큼 예전과 같은 거리감으로 바라보기 어려워졌습니다. 그 마음이 못난 질투인지, 괜한 심술인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섭섭함인지 저도 한동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에도 어떤 익숙한 자리와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간 장항준 감독을 예능에서 보며 호감을 가져왔습니다. 잘 나가는 아내 옆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 잘 풀리지 않는 순간마저도 웃음으로 받아내는 느슨한 여유가 좋았습니다. 세상에는 자기 자신에게 늘 엄격하고, 조금만 뒤처져도 금세 초조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쪽에 가깝습니다. 미리 걱정하고, 미리 대비하고, 무언가 잘못될 경우까지 생각하며 마음을 잔뜩 앞세우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면서도 부러웠습니다.
장항준 감독의 말과 태도는 제게 그런 인상을 주었습니다. 누군가 같은 말을 했다면 무책임하거나 한심하게 보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가볍게 희화화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았고, 잘난 사람 옆에 있으면서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좋아했던 것은 그의 유머감각 자체보다, 삶을 대하는 그 느슨한 자세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나가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고, 비교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편하게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에는 묘한 안도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어딘가 완성형의 성공한 인물이라기보다, 조금 비켜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능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정해놓은 ‘반듯한 성공의 이미지’에 아주 딱 들어맞는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친근했습니다. 잘 나가는 아내 옆에서 유쾌하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사람, 거창한 포장 없이 자기의 부족한 면도 농담으로 꺼낼 수 있는 사람, 어쩌면 그런 인물이었기에 저는 안심하고 그를 좋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종종 자기와 닮은 결핍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마음을 엽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데도 당당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위로를 받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데,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항준 감독은 제게 일종의 ‘허용’처럼 느껴졌습니다. 꼭 대단히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고, 조금 부족해 보여도 웃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그런데 왜 성공 이후에는 어색해졌을까요?
그런 그가 천만 흥행 감독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자리에 올라섰고, 더 이상 ‘잘 나가는 아내 옆에 있는 유쾌한 남편’ 같은 단순한 이미지로 소비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축하할 일입니다. 저도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그렇게 잘된 모습을 보니 전처럼 편하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웃기고 친근했던 캐릭터가 갑자기 멀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늘 동네에서 추리닝 차림으로 보던 사람이 어느 날 말끔한 슈트를 입고 고급차에서 내리는 장면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내가 알고 있던 자리에 더 이상 있지 않은 느낌 말입니다.
이 감정은 상대가 변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갈 곳을 잃었기 때문에 생기기도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어떤 자리에서 좋아했는데, 그 자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자리가 실제로 사라진 것인지, 내가 더 이상 그렇게 볼 수 없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편하게 애정할 수 있었던 ‘이야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늘 조금은 비켜서 있던 사람, 성공의 정중앙보다는 바깥에서 자기 식대로 웃음을 만들던 사람의 서사가, 어느 날 갑자기 모두가 인정하는 대성공의 서사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질투라기보다, 익숙한 관계의 상실
이런 마음을 흔히 질투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저는 장항준 감독이 못되기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잘되기를 바랐고, 잘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성공을 시기하는 전형적인 감정과는 조금 다릅니다. 제 마음에 더 가까운 단어는 아마 ‘상실감’ 일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던 어떤 결, 어떤 거리, 어떤 이미지가 사라졌다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와 맥락, 내가 그 사람에게서 읽어내던 이야기까지 함께 좋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항준 감독에게 느꼈던 호감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사람 개인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덜 잘 나가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는 서사를 함께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큰 성공을 거두는 순간, 그 서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실제의 그는 여전히 유쾌하고,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 안에서 그를 바라보는 프레임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색해진 것입니다.
나의 찌질함을 비추는 거울
생각해 보면, 제가 그에게 끌렸던 이유에는 저 자신의 찌질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 앞에서 위축되고, 늘 비교하고, 잘되지 않는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런 제게 장항준 감독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부족함을 무겁게 끌어안지 않고도 유쾌할 수 있고, 누군가와 비교되는 자리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그를 보는 일이, 어쩌면 저 자신을 조금 덜 미워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천만 감독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제가 제 결핍을 안전하게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결국 해냈고, 큰 성공을 거두었고, 사람들의 인정까지 받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은근히 들키고 만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가 너무 멀리 가지는 않기를 바라는 어떤 무의식적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물론 그가 실패하길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내가 계속 편하게 좋아할 수 있는 자리 안에 머물러 주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은 분명 모순적이고, 조금은 찌질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원래 종종 그렇게 모순적입니다.
맛집을 혼자 알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좋아하는 작은 가게가 유명해졌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가게가 잘되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막상 줄이 길어지고 방송에 나오고 모두가 찾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내 것이 아닌 기분이 듭니다. 기쁜데 섭섭하고, 뿌듯한데 아쉬운 마음이 동시에 듭니다. 장항준 감독을 향한 제 감정도 어쩌면 그렇습니다. 나만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던 방식’으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모두의 시선 속에서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감정을 부끄럽지만 정직하게 인정해 보려 합니다. 좋은 사람의 성공 앞에서 손뼉 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할 수 있다는 것, 그 섭섭함이 꼭 악의나 시기만은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때로는 내가 기대고 있던 익숙한 이미지가 사라지는 데서 오는 허전함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어색한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의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돌아보면 어색해진 것은 장항준 감독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저의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쩌면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제가 그에게 기대고 있던 감정의 자리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참 단순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나의 결핍과 위로, 부러움과 안도, 친근함과 거리감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변하면 슬픈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통해 붙잡고 있던 나의 일부가 흔들릴 때 더 어색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이 감정을 억지로 좋은 마음이나 나쁜 마음으로 정리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아, 내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좋아했구나” 하고 인정해 보려 합니다. 누군가의 성공이 반갑고도 낯설 수 있다는 것, 그 낯섦 속에서 내 마음의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도 사람을 좋아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 것입니다.
장항준 감독의 성공은 여전히 축하할 일입니다. 다만 저는 이제 예전처럼 가볍게 웃으며 그를 소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조금은 솔직한 마음으로, 그를 보며 들었던 복합적인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이 정말 잘되었을 때, 왜 우리는 때로 기쁨만큼이나 어색함도 함께 느끼는지. 그 질문 끝에서 저는 결국 장항준 감독이 아니라 제 자신을 다시 보게 됩니다. 아마 이 어색함은, 남의 성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