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내 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내가 움직이면 분위기가 따라 움직이고, 내가 나타났을 때 그 자리가 조금 달라지는 경험을 원합니다. 그것이 권력이든, 명예든, 인기든, 재력이든, 결국 본질은 비슷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 사람이다”라는 감각, 그리고 “나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라는 확인입니다.
김은숙 작가가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 “왕관이 무겁지만 벗기는 싫다”는 표현은 그래서 유난히 진실하게 들립니다. 그 말은 단지 유명인의 고백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의 본심에 가까운 문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임은 버겁고 부담은 크지만, 그렇다고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은 싫다는 마음. 힘들어도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고 싶은 마음.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차마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을 미덕으로 배우지만, 동시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아주 깊이 품고 삽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불편할 만큼 정직합니다. 왕관은 무겁지만 벗고 싶지 않다. 얼마나 많은 관계와 조직과 역사 속 사건들이 사실은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을까요.
누구나 자기 삶의 중심에 서고 싶습니다.
생일날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친구와 가족, 연인이 나를 위해 시간을 내고 축하를 건네는 날. 케이크의 촛불도, 준비된 음식도, 오가는 메시지도 모두 나를 향합니다. 그날은 유난히 기분이 좋습니다. 특별한 선물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날의 주인공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이 ‘주인공의 감각’에 크게 반응합니다. 내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반기고, 내 말에 집중하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허전함이 느껴지는 것. 그것은 단순한 허영심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존재를 확인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투명하지 않다는 것, 나는 대체 가능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을 타인의 반응을 통해 느끼는 일입니다.
반대로 내가 말해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고, 내가 들어와도 분위기가 변하지 않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처럼 느껴질 때 인간은 깊은 서늘함을 경험합니다. 무시당하는 것은 단지 기분이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 존재가 축소되는 감각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각보다 ‘보이지 않는 상태’를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돈이나 권력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따라오는 ‘존재의 증명’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 위치가 또렷해지고, 내 말의 무게가 달라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말입니다.
권력은 왜 이렇게도 사람을 붙잡을까요?
역사를 보면 권력은 쉽게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자지간에도, 형제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권력은 언제나 긴장을 만들었습니다. 사랑과 신뢰로 묶인 관계조차 권력 앞에서는 흔들릴 때가 많았습니다. 권력은 단순히 자리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누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느냐의 문제이고, 누가 기준이 되느냐의 문제이며, 누가 타인의 시선을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는 말도, “연출은 한 명이어야 한다”는 말도 결국 같은 뜻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협력이라 해도 실제 현장에서는 중심축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중심이 누구인지 빠르게 알아차리고, 그 주변으로 눈치를 보며 줄을 섭니다. 이상적으로는 함께 결정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구조가 쉽게 유지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평등한 긴장을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결국 누군가가 중심이 되고 누군가는 주변이 됩니다.
그래서 권력을 한 번 쥔 사람은 쉽게 놓지 못합니다. 그 자리에 익숙해지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배열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취향이 기준이 되고, 내 선택이 방향이 되고, 내 기분이 분위기를 좌우하는 상태. 그 달콤함을 맛본 사람에게 중심에서 밀려나는 일은 단순한 자리 이동이 아니라 존재감의 박탈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끝까지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던 일화를 두고 사람들은 농담처럼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왕세자였다고. 그러나 그 농담 속에도 인간적인 진실이 있습니다. 왕관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수록, 그 왕관이 주는 감각도 누구보다 잘 압니다. 버거워도 놓기 싫은 마음. 바로 그 모순이 인간을 설명합니다.
명품과 자동차와 주소가 말해주는 것들
사람들은 종종 물건을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신호를 소비합니다. 명품을 사는 일도 꼭 물건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닙니다. 물론 예쁘고 품질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나는 이 정도를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재력, 취향, 계층, 네트워크, 안목 같은 것들을 말없이 증명해 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은 또 다른 구별의 장치를 만들어냅니다. 모두가 아는 명품으로는 차별화가 안 되니, 더 희귀하고 더 조용하고 더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보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드러내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아무나 따라올 수 없기를 바랍니다. 인정받고 싶지만 쉽게 읽히고 싶지는 않은 모순적인 욕망입니다.
사교의 자리에서 오가는 질문들도 비슷합니다.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차는 무엇을 타는지, 휴가는 어떻게 보내는지. 겉으로는 가벼운 대화 같지만 그 안에는 아주 복잡한 탐색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의 사회적 위치를 빠르게 파악하려 하고, 자신의 위치도 그에 맞춰 조정합니다. 직접적으로 묻지 않아도, 슬쩍 던진 질문 몇 개만으로도 상대의 배경을 읽어냅니다. 그리고 그 정보로 거리를 정하고, 태도를 고르고, 말의 높낮이를 조정합니다.
참 피곤한 일입니다. 하지만 또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분류하며 살아왔습니다. 누가 더 중심에 있는지,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지, 누가 더 주목받는지 살핍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 지위가 분명한 사람, 모두가 아는 성취를 가진 사람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됩니다.
반대로 설명할 것이 없는 사람은 조용해집니다. 물론 조용함이 언제나 초라함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해서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굳이 자신을 내세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압니다. 진짜 단단해서 조용한 사람과, 내세울 것이 없어 작아진 사람의 침묵은 다르다는 것을. 말의 양이 아니라 공기의 결이 다릅니다.
성공을 원하는 마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마음을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인정받고 싶어 하고,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하고, 중심에 서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욕망 덕분에 사람은 공부하고, 일하고, 만들고, 도전합니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때로는 삶을 움직이는 엔진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누구도 인정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더 나아지고 싶지 않았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덜 발전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욕망 그 자체보다 욕망을 다루는 방식일 것입니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은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오직 내가 주인공이어야만 견딜 수 있는 상태는 위험합니다. 나 외의 사람은 모두 배경이어야 하고, 누군가의 빛은 곧 나의 어둠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관계는 금세 경쟁장이 됩니다. 타인의 성공을 축하하지 못하고, 박수를 쳐야 할 순간에도 속으로 점수를 매기게 됩니다.
권력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자리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중심에 선 사람일수록 더 많은 불안과 의심 속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 중 누가 진심인지, 누가 자리 때문에 고개를 숙이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왕관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무겁습니다. 그 무게는 책임의 무게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확인받아야 하는 불안의 무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인간은 왕좌를 원하는 동시에 왕좌에 갇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올라갈수록 더 높이 보이지만, 동시에 더 쉽게 내려올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왕관은 무겁지만 벗기 싫다는 말은 단지 욕심의 고백이 아니라, 인간의 비극을 담은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누구의 말은 세상을 흔들고, 누구의 말은 공기 중에 흩어집니다.
트럼프의 한마디와 나의 한마디는 무게가 다릅니다. 누군가의 발언은 시장을 흔들고, 주가를 출렁이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주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큰 손실을 안깁니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말은 가족과 친구 몇 명의 하루 기분 정도만 건드릴뿐입니다. 이것이 권력의 현실입니다. 같은 언어를 써도, 같은 문장을 말해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파급력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큰 자리를 원합니다. 영향력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한 것이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의 행동을 바꾸고, 흐름을 바꾸고, 결정을 만들 때 사람은 자신이 작지 않다고 느낍니다. 존재감은 결국 영향력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고, 내가 한 말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삶은 많은 사람에게 견디기 어려운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투명인간처럼 산다는 것은 조용하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과의 접점이 희미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돈으로, 성취로, 외모로, 지식으로, 관계로, 취향으로, 혹은 도덕성으로까지.
인간은 저마다 다른 옷을 입고 같은 무대로 올라오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특별하다고 말하고 싶고, 나를 봐달라고 말하고 싶고, 내 자리의 의미를 확인받고 싶은 존재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왕좌보다도 시선의 방향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평생 어떤 경기의 플레이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관찰자가 되기도 합니다. 누가 올라가고 누가 밀려나는지, 누가 중심이 되고 누가 주변이 되는지 지켜봅니다. 그 게임은 늘 흥미진진합니다. 파급력이 클수록 사람들의 시선은 더 몰립니다. 정치도 그렇고, 연예계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작은 모임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늘 중심과 주변의 드라마가 생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질문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나는 정말 왕관이 필요한 사람인지, 아니면 단지 외면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지. 나는 정말 권력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 나는 정말 모두 위에 서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인지.
이 질문 앞에 서면 욕망의 결이 조금 달라집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생각보다 거대한 왕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몇 사람, 내가 없어지면 허전해하는 자리, 애써 과시하지 않아도 존재가 가볍게 취급되지 않는 관계. 어쩌면 인간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만큼은 분명한 인물로 남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욕망할 것입니다. 권력을, 돈을, 명예를, 왕좌를 말입니다. 그 욕망이 많은 비극과 갈등을 낳으면서도 동시에 문명을 움직여 온 힘이기도 했으니까요. 다만 그 욕망을 너무 고상한 말로 꾸미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고, 잊히고 싶지 않고, 중심에 서고 싶다고. 그것은 부끄러운 고백이 아니라 인간적인 고백이니까요.
왕관은 무겁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벗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마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세상은, 그 무게보다 더 견디기 어려워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