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결코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가 할 일은 잘 키워 세상에 내보내는 것, 거기까지다.
훈장처럼 끼고돌며 아끼려 할수록 결국 그 사랑은 집착으로 변한다.
아들이 바보가 되길 바라는가.
세상의 이치와 도리를 모두 무시하고, 오직 ‘우리 집, 우리 엄마만 옳다’고 믿으며 살아가길 원하는 부모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
부모를 향한 사랑은 본능이지만, 아내를 향한 사랑은 배워서 만들어가야 하는 의지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배우고, 지켜내고, 견뎌내는 과정에서 아들은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성숙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부모가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막는다면 그건 진짜 부모의 모습이 아니다.
자식의 성장을 가로막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미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랑은 붙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것이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혹시 부모들은 자식들이 결혼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다들 결혼하니까?
혼자 늙을 아들이 불쌍해서?
손주를 보고 싶어서?
혹은 시어머니라는 존재가 되어보고 싶어서인가?
물론 그 어떤 시어머니도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한다.
결혼의 목적이 결국 아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라면, 그 자체로는 분명한 사랑이다.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 그것은 모든 부모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시어머니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너희들만 잘 살면 된다.”
하지만 그 말은 “너희들만 잘 살면 된다”가 아니라 “너희들만 잘 살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는 것을.
결혼생활을 하면서 나는 그 진심을 깨달았다.
시어머니의 입장에서 ‘나도 그 행복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게 작동한다.
그래서 며느리와 아들이 둘만의 세상을 만들면 섭섭하고, 자신의 자리가 줄어들면 위기감을 느낀다.
그 감정이 인정받지 못할 때, 시어머니는 종종 ‘섭섭함’이라는 이름으로 불만을 표출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 말 뒤에는 “하지만 나를 잊지는 말아라.”라는 말이 숨어 있다.
이 모순이야말로 많은 갈등의 출발점이다.
아들의 행복을 빌면서도, 그 행복의 중심에 자신이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 부모의 사랑은 결국 아들의 삶을 얽매는 그늘이 된다.
정말 자식을 위한다면, 이제는 ‘내가 빠져도 괜찮은 행복’을 축복해 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빠져야 자식이 자기 삶을 살 수 있고, 내가 물러나야 며느리가 그 집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다.
그게 부모로서의 마지막 사랑이며, 진짜 어른의 떠남이다.
사랑은 함께 있으려는 욕심이 아니라, 떠나보낼 수 있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