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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딜 감히, 며느리가

by 마음벗

지인의 이야기다.

그 집은 명절 당일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 집이다. 대신 전날 미리 음식을 준비해 가족들이 모여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의 며느리들이 전날 음식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그 며느리는 명절 당일에는 친정에 들렀다가 시댁에 오겠다고 미리 양해도 구했다.

다행히 친정과 시댁이 가까워, 점심만 먹고 금세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명절 오후, 그 집의 공기는 생각과 달랐다. 시댁에 도착한 며느리 앞에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시누이는 본인의 시댁에 가지 않고 그 전날부터 명절 내내 친정에서 지내기 위해 와 있었다.

그런데 그 시누이가 대뜸 며느리에게 말했다.

어딜 감히 며느리가 친정을 먼저 갔다 와?”


그 말은 거칠었고, 시어머니의 표정은 그 말에 동의하듯 의기양양했다.

며느리는 당황스러웠다. 정작 그 시누이는 자신은 시댁에 가지도 않으면서, 며느리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싶었다.


결국 남편은 누나와 크게 다투었고, 그날 그 부부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시누이와 남편 사이의 냉전은 오래갔다.

세상에는 이렇게 시어머니의 생각을 대신 말해주는 시누이들이 참 많다.


마치 대리 발언자처럼, 어머니의 불편함을 자신의 입으로 대신 내뱉는다.

겉으로 보기엔 시어머니는 말을 아끼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시누이를 통해 며느리를 누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시누이는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대신 악역을 자처했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며느리의 입장에서는 둘 다 똑같이 악인일 뿐이다.


시어머니의 불합리함을 대신 전달하는 사람도, 그 말에 묵묵히 앉아 동의의 표정을 짓는 사람도 결국은 한 편이다.


그 며느리는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시간이 약이 되었다고, 이제는 모든 게 허무하다고 했다. “어쩌겠어요, 그냥 그런 거죠.


그런 일은 누구도 못 고쳐요.”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 한마디 속에 오히려 희망의 씨앗이 있다고 느꼈다.


고칠 수 없다는 체념 속에서도, 그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

바로 그 지점이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 며느리들과 남편들, 그리고 일부 깨어 있는 시부모들이 그 부당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면, 세상은 이미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다짐했다. “나는 그런 시어머니가 되지 않겠다.”

며느리의 친정 방문에는 얼굴을 찌푸리는 어머니, 그런 모습들은 더 이상 다음 세대로 이어져선 안 된다.

어쩌면 시어머니들은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당연함’을 멈추어야 한다. 당연한 듯 이어진 부당함을 부수는 일, 그것이 다음 세대의 사랑을 지키는 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세상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어른이라면 자신의 위치에서만 논리를 세우지 않아야 한다.


상대의 자리를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아야 한다.

며느리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에서, 딸의 자리에서 그렇게 서로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족은 가족이 된다.


시어머니의 권위로부터 비롯된 말 한마디가 한 가정의 평화를 흔들 수도 있다. 반대로, “그럴 수도 있지”라는 한마디가 상처를 덮고 화해를 싹 틔울 수도 있다.


며느리의 친정 방문을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며느리가 나의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믿는다.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당함을 알아차리고, 그 불합리를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며느리의 침묵, 그 담담한 체념 속에도 이미 변화의 조용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물결 안에 서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며느리로서, 또 언젠가 누군가의 시어머니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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