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리를 진짜 못한다. 내가 먹어도 맛이 없다.
요리를 만드는 센스가 없어 이것저것 넣다 보면, 이건 무슨 맛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요리 레시피 그대로 따라 한다. 그래야 그나마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소위 말하는 ‘손맛’이 없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내가 만든 볶음밥, 김치찌개, 비빔밥이 너무 맛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은 음식 대부분이 내가 만든 것뿐이니, 그들에게는 내 음식이 곧 ‘엄마의 맛’인 셈이다.
그러다 학교를 다니며 급식을 접한 뒤,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 급식이 진짜 맛있어! 급식실 아주머니들은 요리 고수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도 거기 가서 먹고 싶다.”
그 말속에는 진심이 있었다. 나는 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음식을 즐기지도, 맛있게 먹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냥 ‘남이 해준 밥’이면 다 맛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어머니들은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처음 시댁에서 음식을 먹었을 때, 솔직히 감사하고 좋았다. 그런데 식사가 끝날 즈음, 남편이 말했다.
“엄마, 이거 진짜 맛있다! 식당 차려도 되겠어요.”
시어머니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물론 맛있었지만, 식당을 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함께 맞장구쳤다. “정말 맛있어요.” 그 말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시댁 식사 때마다 ‘맛있다’는 말은 일종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며느리라면 시어머니의 음식에 감탄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들들은 그런 말을 안 해도 괜찮았다. 오직 며느리들만이 그 말을 반복해야 했다. 언젠가 나는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말했다.
“작은 며느리는 이거 맛있다고 하던데?”
그제야 나는 “맛있어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시어머니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시댁 식탁에서는 표정도 요리의 일부라는 것을. 맛있다고 말하는 얼굴까지 연기해야 하는 자리였다.
나도 시댁 식구들에게 많이 식사를 대접했었다. 이미 “나는 요리 못한다”라고 말해두었기에, 다들 마음을 비우고 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음식을 먹고는 “맛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놀랐다.
“이게 맛있다고요?”
물론 인사치레였겠지만, 이상하게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얼굴은 그때부터 굳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맛있다”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없는 그분이, 그날 따라 더 말이 없었다.
요리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새 시어머니와 나 사이의 경쟁 구도를 만들어버렸다. 가족들은 모르는 사이 심사위원이 되었고, 밥상은 전쟁터가 되었다.
한 번은 내가 소불고기전골을 만들었다. 물론 양념된 고기를 사서, 야채를 넣고 간장과 조미료로 맛을 맞췄을 뿐이었다. 나는 ‘맛있지 않아도 되니, 먹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반응이 좋았다.
“맛있다! 이거 마누라가 만든 거야.”
남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말은 거짓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만든 건 맞지만 ‘시판 양념된 고기’였다.
며칠 후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 명절에 내가 소불고기 사다 놓을게. 네가 와서 전골 좀 해라.”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었다.
‘네가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무언의 도전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따졌다.
“당신이 왜 거짓말을 해서 이런 일이 생기게 해?”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전화해 말렸다. “괜히 번거롭게 왜 그걸 만들어 먹어.”
결국 그 일은 취소되었지만, 나는 이미 알았다. 시어머니에게 음식은 단순한 밥이 아니라 ‘자존심’이란 걸. 그리고 그 자존심의 무대에 나는 원치 않게 끌려 들어간 것이었다.
이후로 시어머니 앞에서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조용히 그녀의 표정을 살핀다. 내가 왜 이래야 할까?
요리가 대결이 되어버린 관계, 밥상이 권력의 자리로 바뀐 현실이 씁쓸했다.
며느리를 대결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가족의 한 사람으로 두어달라고. 요리의 손맛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로 관계를 재는 시어머니가 많아지기를.
그래서 나는 또 배운다.
현명한 시어머니의 역할을, 밥상이 아닌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손맛은 혀끝에서 나는 게 아니라, 관계에서 나는 것이다.”
누군가의 식탁이 전쟁이 아닌 위로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집에서의 시부모님께 식사를 배달음식으로 대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요리를 잘하진 못하지만, 정성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 손수 밥을 차려내는 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가끔은 배달음식도 좋고, 외식도 괜찮다.
함께 밥을 먹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밥의 출처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는 며느리에게 “음식 해 와라” “차려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내 서툰 음식이라도 기꺼이 먹어주겠다고 하면, 그 마음이 고마워서라도 매번 정성껏 차려주고 싶다.
잘 차린 밥상보다 더 귀한 건, 그 밥을 함께 먹어주는 사람의 따뜻한 눈빛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밥은 마음으로 먹는 것.
사랑이 담긴 밥상은 손맛보다 사람 맛으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