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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시어머니의 소싯적 자랑

by 마음벗

우리 시댁만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집이나 시어머니들은 한 번쯤 ‘자신의 소싯적 자랑’을 늘어놓는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나도 젊었을 땐 예뻤어.”

“그땐 사람들이 나를 보고 고개를 돌렸지.”

그 말의 핵심은 ‘나도 한때 너 못지않게 빛났어’라는 것이다.

즉, 며느리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아들이나 남편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그들은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가 ‘엄청나게 아름답거나 특별하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소용이 없다.

결국 시어머니들은 며느리에게 그 말들을 쏟아내며, “어서 이쁘다고 말해. 어서 칭찬해 봐.”라는 마음을 내비친다.


그건 단순한 허영심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어머니는 자신과 며느리를 경쟁 상대로 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누군가 내 젊음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외로움’이 숨어 있기도 한 것 같았다.

나의 경우, 다리가 비교적 건강한 편이라 치마를 잘 입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다리 이야기를 꺼내면, 시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내 젊었을 땐 말이야, 내 다리가 그렇게 예뻤다니까.”

그 말은 늘 자연스럽게 빠지지 않고 흘러나왔다.


어떤 지인의 시어머니도 그랬다고 한다.

“나는 젊어서 말이지, 치마를 딱 입고, 뾰족구두를 신고, 요렇게 걸어 다녔지.”

그 장면을 상상하면 조금 귀엽기도 하고, 또 조금은 안쓰럽다.


그 말에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

그저 며느리에게 “정말 멋지셨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솔직히 패션이나 미용에 크게 관심이 없다.

아이 키우며 하루 세끼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나를 가꾸는 시간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밤에 모든 일을 마치고 누워 눈을 감는 그 시간이 내게는 가장 간절한 순간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바로 아침인 사람에게, “요즘 어떤 옷이 유행이다”, “그때는 이 옷이 유행이었다”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만약 신생아를 돌보느라 잠 한숨 제대로 못 자는 며느리에게, “나는 예전에 구두 신고 다녔지”라며 자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이야기는 며느리가 아니라, 그 시절을 함께 지켜본 남편에게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젊은 날의 그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그에게는 그 시절의 그녀가 여전히 생생할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찬란했던 시절’은 꼭 젊은 시절에만 머무는 걸까?

지금도 충분히 찬란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에 머물러 사는 시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들이 여전히 현재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이야기는 지금도 만들 수 있을 텐데.

나의 찬란한 순간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어야 한다고.

나를 꾸미지 않아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이들과 웃으며 밥을 먹고, 하루를 무사히 마무리하는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시어머니의 ‘소싯적 자랑’을 들을 때, 이제는 짜증이 나지 않는다.

그분의 말속에 숨어 있는 외로움과 지나간 청춘의 그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한다.

”나의 모든 시간이 내 찬란한 시절이 되게 만들겠다.”

늙음이 초라함이 아니라, 시간이 빚어낸 품격이 되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내 하루를 정성스럽게 살아낸다.

진짜 아름다움은 과거의 사진 속에 있지 않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 속에 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시어머니의 ‘소싯적 자랑’은,
본인을 위해서도, 며느리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길 바란다.


“지나간 찬란함을 붙잡을수록, 현재의 빛은 희미해진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마음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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