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사람을 관찰하고, 사람들을 본인의 기준으로 자신의 영역 안에서 역할을 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첫 만남부터 상대를 세심하게 살핀다. 말투, 표정, 행동, 반응 하나하나를 분석하며 마음속에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기록한다.
이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은밀하게, 치밀하게, 상대의 약점과 강점을 계산하며 먹잇감인지, 사냥꾼인지 알아보는 탐색이다.
그 탐색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상대의 성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면, 그들은 즉시 본인 기준의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곧 라벨이자 역할의 선언이다. “이 사람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먹잇감” 또는 “이 사람에게는 내가 먹잇감이구나”라고. 그렇게 상대의 정체는, 그들 기준에서 판단되어 포지션이 부여된다.
여리고 순해서 내 말을 잘 듣겠다 싶으면, 그 순간 눈빛이 변한다.
겉으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시작된 것이다.
본인의 판단이 맞는지, 상대가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는지, 작은 실험이 조심스럽게 시작된다.
처음엔 사소한 부탁, 농담처럼 던지는 말, 가벼운 태도.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탐색전이다.
회사에서는 “전에 같이 일하던 애들이 어땠는지”, “그들의 평판은 어떠했는지”를 슬쩍 흘린다.
시댁에서는 “그전 여자친구가 어땠는지”, "누구집 며느리는....."를 은근히 들려준다.
얼마나 잘난 사람들이었는지,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니 내가 봐준다는 식이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대화처럼 보이지만, 그 말들엔 분명한 경고가 숨어 있다.
'네가 어떻게 하는지 똑바로 지켜보겠다.'
잘 따르기만 하면 괜찮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다.
은밀한 조종과 무자비한 작업이 시작되고, 상대를 조금씩 무너뜨리는 심리적 사냥이 본격화된다.
이 사냥꾼들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냥꾼이 되었다가도, 어느 순간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다른 사람의 공격과 평가 속에서 치욕을 맛보며, 먹잇감의 설움을 뼈저리게 경험한다.
그리고 본인이 먹잇감이라 정의한 사람 앞에선 순간 사냥꾼으로 다시 변신한다.
그들에게 당했던 모욕과 상처를 고스란히 먹잇감인 나에게 쏟아낸다.
그들의 사냥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치욕의 앙갚음이다.
그 과정에서 착하거나 성실하고, 남에게 친절한 사람들은 쉽게 능멸의 대상이 된다. 성실함과 약함은 그들에게 놀잇감과 권력의 재료가 될 뿐이다.
참고 또 참다 결국 관계를 끊어낸 사람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만, 그렇지 못한 먹잇감은 그들의 영원한 놀잇감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그들이 상대를 나약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그들이 정한 논리일 뿐, 사실이 아니다. 나약함이라는 라벨은 상대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구다. 실제로 약한 사람은 따로 있다. 진짜 나약한 사람은 그들 자신이다.
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먹이를 사냥하며, 필요할 때는 약한 척하며 속임수를 쓰는 존재들이다.
상사로부터 받은 스트레스, 부당한 대우, 과중한 일에 대해 웃으며 넘기지만 결국 하소연, 히스테리의 형태를 띠며 어떤 식으로든 결국 먹잇감에게 흘러들어 간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강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전략과 권력욕이 곧 그들의 본성이다.
이 사냥꾼과 먹잇감의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하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위험했다.
반응할수록 나는 그들의 게임에 참여하게 되고, 무심함과 침묵으로 내 영역을 지키지 못하면 결국 놀잇감으로 남았다.
관계를 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만약 불가피하게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무표정과 무응답은 여전히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어떤 탐색과 공격도 내 마음을 흔들 수 없게 만드는 최소한의 방어선이 되어갔다.
사람을 간 보며 호구를 가르고, 먹잇감을 사냥하는 이들은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직장, 가족, 친구, 심지어 가까운 사람 사이에도 숨어 있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다가오지만, 그 친절 속에는 분석과 평가, 통제의 의도가 숨어 있다. 내가 상대의 전략을 깨닫지 못하면, 그들의 게임 속에서 나는 점점 작아지고, 나의 존엄은 침범당한다.
누군가 나를 사냥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나는 무표정과 무응답이라는 보호막을 준비해야 한다.
상대가 어떠한 방식으로 공격하든, 내가 반응하지 않고 내 영역을 지키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조종할 수 없게 된다.
관계의 역학은 결국 힘의 균형과 태도의 문제다. 사냥꾼이 되려는 사람은 많지만, 나를 존중하는 힘과 내적 태도를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다. 상대가 사냥꾼이든 먹잇감이든, 내 존엄과 마음을 지키는 방패를 세우는 것이었다.
내 방어선이 흔들리지 않고, 그들의 전략이 무력화되면, 내 평화는 지켜진다.
관찰하고, 관찰당하며, 먹잇감과 사냥꾼으로 갈리는 순간들.
먹이사슬의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긴장이 온몸을 조여 온다.
처음에는 몰래 욕을 하며 억울해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잘 지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무례를 무시해보려 했지만, 역시나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내 탓을 하며 스스로를 자책했고,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냥꾼으로 변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보다 더 약해 보이는 누군가를 탐색하고, 은밀히 희생시키려 하기도 한다.
이 먹이사슬을 알아채고 스스로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자연스럽게 그 사슬을 체득하고 이어간다.
집단 속에서 분명한 가해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해자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안도한다. 그러나 그 안도조차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결국 내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곧 이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세상살이는 참으로 고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