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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Jun 30. 2022

바람 I

태풍전야의 제주도로


삼일 내내 비바람이 몰아쳤다. <<폭풍의 언덕>>처럼, 정말로 폭풍우가 불어닥친 언덕 위에 서있는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었다. 웬만한 태풍 저리가라였다. 기후 변화가 우리네 삶에 이토록 바짝 다가왔음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비가 쏟아붓고 그치기를 반복했다. 운이 나쁘면 1분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고, 운이 좋으면 비가 멎는 틈새를 틈타 여기저기로 지나다닐 수 있었다. 이제 여긴 열대지방이야, 대한민국도 아열대라고! 이건 스콜이야! 나랑 카톡 중인  모두에게 부르짖었다. 


비가 그친 틈을 타 카페로 나왔다. 에어컨이 풀로 돌아가는 실내는 서늘했다. 창가자리에 앉으려다 창밖 풍경을 한눈에 보려고 카페 중앙에 앉았다. 커다란 창들 건너편으로 야트막한 빌딩들과 그보다 키가 큰 나무들이 한눈에 보였다. 두유라떼를 한 잔 시키고, 감성 충만하게 트로이 시반 플레이리스트를 꾸렸다. 따뜻한 머그잔을 손에 쥐고 라떼를 한 모금씩 홀짝거리며 바깥세상을 바라봤다. 어지간한 5층 건물 높이를 훌쩍 넘는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게 보인다. 지상에서 걸어다니고 있을 때는 이걸 볼 수 없었는데. 비가 수직으로, 가끔 80도에서 60도 쯤으로 흩날리며 세상을 적시는걸 가만히 지켜봤다. 이렇게 비에 젖은 잎사귀들이 이리저리 떠밀리는걸 보면 오래 전이 생각난다. 태풍 예보를 하루 앞두고 제주도로 날아갔던 날이.






살려고 갔던 것 같다. 그 해 제주도가 유독 그랬다. 어찌나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였는지 누가 “괜찮아?”라고 묻기만해도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때였다. 생각해보면 두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는데, 나는 화사하게 피어났다가 곧바로 썩어문드러진 것 같았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꿈을 좇아 어떤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누가 들어도 이름을 아는 곳이었다. 연봉은 짜지만, 어쨌거나 대기업 계열사 리스트에 발을 걸치고 있던 곳. 문화, 예술, 그런 이름이 붙는 직업군 중에서 그나마 자본을 갖췄고, 그래서 언제 잘릴지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회사. 그 때는 몰랐다. 먼 미래가 아니라 그 날부터 당장 잘릴지 말지를 걱정해야했다는 걸.


갓 대학교를 벗어난 나는 많은게 부족했다. 모든게 애매했다. 전공을 살리기에도, 버리기에도 아는게 많이 없었다. 하고 싶은건 많은데 무엇을 선택할지, 어떤 기회비용을 감당할지 전혀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걸. 학부 수준에서 어떻게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전문 자격증을 따서 화려한 이력서를 만들겠냐고. 경영지원, 국내영업, 이런 단어들이 너무 낯설고 멀 때였다. 오히려 우리들은 너무나도 과도한 상태였다. 모두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상향평준화되고 있었다. 공인외국어 성적에 인턴 한 번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미는거 아니야, 하고 고민할 때였다. 우린 어떻게든 스스로를 차별화해서 자본주의 시장에 멋진 상품으로 내놓으려 발버둥쳤다. “우리 때는, 어, 다 학생운동 하느라고 맨날 학사경고 맞았어. 그래도 졸업만 하면 원서 넣는대로 다 합격이었는데.” 이런 말들을 그저 인내하면서.


왜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걱정하고, 위축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는 단군 이래 가장 높은 청년 실업률을 기록하던 시기였다. 졸업을 할지 대학원에 갈지, 그도 아니면 학교에 발을 걸치고 인턴을 3, 4개씩 하며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쓸지 모두가 갈팡질팡했다. 현실에 치인 친구들은 대학원으로 밀려나거나, 취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자기 자취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매일매일 조금씩 더 우울해져갔다. 우리는 서로에게 안부를 묻지 않았다. “잘 지내?”라고 말문을 열 수가 없어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누가 취직을 했다더라 하면 부러움이 밀려들지만, 동시에 ‘걔 성격에 못 버티고 뛰쳐나오면 어쩌나’ 걱정이 더 앞섰다. A는 2년 째 취직준비를 하고, B는 시험과 시험 사이를 전전하고, C는 어떤 회사에 들어갔다가 6개월만에 뛰쳐나온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대기업의 이름을 달고 있으며, 내 적성과 관심사를 살릴 수 있는 곳에 덜컥 인턴으로 합격했던 것이었다. 취직을 위해 써낸 자기소개서-자소설-는 며칠 뒤에만 읽어봐도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은데, 그 회사의 자소서는 어찌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썼던지 지금 봐도 예술작품이었다. 나라면 이 사람 얼굴을 보고싶어서라도 회사에 불러들일 것 같았다. 서류전형부터 시작해서 온갖 구구절절한 과정을 거친 끝에 나는 ‘다음주부터 출근하라’는 메일을 받았고, 마을버스 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이 주 뒤에 전혀 다른 온도의 눈물로 변했다. 회사에서 당장 다다음 달에 계속 볼지 안 볼지도 모르는 기간제 인턴은 너무 민폐였다. 문서 하나 제대로 만들 줄도 모르고, 하나씩 다 가르치기에는 금방 이별할 지도 모르니 마음이 안 내키고. 뭔가를 가르치면서 시키는 것보다 그냥 직접 하는게 더 빠르다는걸 사회초년생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작아보이는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출근한 후부터 퇴근할 때까지 멍하게 노트북만 켜두고 앉아있으면서 나는 점점 지쳐갔고, 빠른 속도로 말수가 줄었다. 그 부서 사람들의 탓이 아니었다. 취업률을 높이라는 사회 분위기에 치여서 어쩔 수 없이 공채를 연 회사도, 바빠죽겠는데 도움 안 되는 인력을 떠맡은 사람들도 탓할 수 없었다. 애당초에 내가 무언가를 ‘탓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자본주의 권력 앞에 나는 완벽하게 ‘을’이었다.


출근한지 고작 며칠이 지난 뒤부터 난 마음을 다스려보고자 요가원을 찾았다. 취직해서 자주 못 나올 것 같아요, 라는 말이 무색하게 매일같이 갔다. 학교 근처에 있던 요가원과 직장은 집에서 정 반대방향이었다. 나는 한 시간 걸려 출근을 하고, 퇴근한 뒤 한 시간 지하철을 타고 요가원에 간 다음, 다시 한 시간이 걸려 집으로 돌아오는걸 반복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자괴감과 자기혐오에 파묻혀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는걸 처음 절감했다.






겨우겨우 마지막 출근을 한 후, 다음날 바로 제주도로 날아갔다. 그 비행기 티켓 하나만 바라보면서 몇 날 며칠을 버틴 후였다. 태풍 예보가 있었다. 가면 못 돌아오는거 아니냐고, 친구가 걱정하는 문자를 보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이 도시에 하루라도 더 있으면 몸 안의 수분이 바싹 마를 것 같았다. 태풍보다 인간을 피해야 합니다, 하는 글을 인별에 싸지르곤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 내리니까 저녁 6시쯤이었다. 태풍이 불어닥치면 숙소에 가만히 있어야 할테니 오늘 꼭 일몰을 보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 근처로 오니 해질녘이었다. 버스 뒷문이 열리는 순간 바다 비린내가 확 끼쳤다. 여긴 제주도라 어디서든 비슷할 것 같았는데, 간만에 맡는 바다 냄새에 마음이 좋아졌다. 굽이굽이 주택 사이를 뛰어내려갔다. 노을의 마지막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배낭 하나 지고 날아온 내가 짠했는지, 태양은 바다로 퐁당 떨어지지 않고 날 기다려줬다. 거칠게 시멘트를 바른 제방 위에 서서 해가 지는걸 내다봤다. 태풍 전야,  먹구름과 수평선 사이로 저 혼자 붉은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해가 쏙 내려가고도 아쉬운 마음에 파도치는걸 한참 바라보다 숙소를 찾아갔다.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인도풍 게스트하우스였다. 제주도의 돌담길과 잘 어울리는, 농가를 개조한 곳. 누구보다 그 곳에 잘 어우러지는 주인 언니가 꾸린 집이었고, 그 다음에도 다시 찾아갈 만큼 풍요로운 곳이었다. 날이 안 좋아서 그런지 숙소는 한산했고, 그 날은 3인실을 나 혼자 쓰게 됐다. 여러가지 행운을 만끽하면서, 나 자신이 아침에 비행기에 올라탈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즐기면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어떤 만남이 날 기다리고 있는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생각보다 긴 글이 되었어요. 세 편으로 쪼개어서 올리려고 합니다. 내일, 바람 II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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