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 나쁘지 않은 개똥철학에 관하여.

by 언더독

선과 악에 관한 이야기들은 많다.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등의 것들이 대표적인 철학적 개념이다. 현대에 와서는 마이클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었다. 아주 기억에 남았던 예시는 '기찻길 어젠다'였다.


자신이 기차를 모는 기관사라고 했을 때, 앞서 나있는 좌측 그리고 우측 철길만을 선택할 수 있다. 좌측 철길은 멀쩡하고 우측 철길은 끊어져있다. 다만, 좌측 철길에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묶인 채 놀고 있다. 좌측 철길로 가면, 자신의 아이는 기차에 치여 죽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승객들은 살게 된다.


우측 철길로 향하게 되면, 아이는 살고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승객이 사망하게 된다.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과연 어느 선택이 정의인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나는 이러한 철학적 사고를 이야기하고, 참신한 자각을 받는 것에 대단한 즐거움을 느낀다. 비록 그것이 실속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지라도, 한 명의 존엄한 인간으로서 독립적인 철학을 깊게 만들 수 있고 더욱 성숙한 영혼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그토록 추구하는 자유와 일치성을 보이는 맥락이다.



서른 살이 된 나에게는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콘셉이 있다. 그것을 재단하는 가장 큰 기준은 개개인의 '책임감'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있어서 강한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 많으면 그 그룹은 유토피아와 가깝게 변할 확률이 높다. 매일같이 고된 일들이 몰아치는 일터라 할지라도, 이러한 사람들과 팀을 꾸리게 되면 출근이 즐겁게 된다. 반면에 아무리 편한 꿀직장이라 할지라도, 남들을 배려할 줄 알만큼의 지능이 되지 못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면 그곳은 지옥이 될 확률이 높다. 꼭 일터가 아니더라도 가족, 친척, 부부, 연인, 친구 등의 사사로운 그룹들에도 적용되는 진리적인 확률적 이야기이다.


나만큼 철학과 논리로 정리정돈 되어 있지 않은 머릿속과 마음속이라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은 그 내용을 어지럽게나마 육감적으로 알고 있다. 강한 책임감에 따라 자신이 고통을 더 감내하게 되면, 남들이 편해진다. 남들이 편해지는 것을 몸소 보았을 때, 자신이 공동체에 미덕을 실천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영혼의 평안은 람보르기니로 얻을 수 없고, 메이커 아파트로 얻을 수 없으며, 가슴 크고 얼굴 반반한 여자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미덕을 실천했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만 마음 저변 진실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철학적 정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어보면 보다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이라고 부른다. '명상록'은 로마제국 마지막 오현제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전쟁 중 일기이다. 로마판 난중일기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나의 주관에 따르면 강한 책임감의 사람은 선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고, 형편없는 책임감의 사람은 악을 추구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의 나는 이를 실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을 얻게 되는 이득 되는 방향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의 가문은 과거, 강제적인 일본제국군의 보증 요구로 가산을 날려 몰락한 경남 지역 유지의 집안이었다. 이런 찢긴 과거를 복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내 친부를 포함한 몇 세대가 인생을 산화시켰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차례가 왔다.


나는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진정 '스토아 철학'을 채택하는 삶을 살면 이득이 된다는 것은 내 주변에 이러한 사람들만 자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주변에는 나처럼 최전방에서 벅찬 싸움을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서로를 가엾게 여기기도 하며, 좋은 게 있으면 나눠먹고, 손실이 있으면 함께 감내하려고 한다. 모든 경우, 이러한 전략은 보다 나은 전투력을 만들어 준다.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해군의 잠수함 'U-boat' 편대는 'Wolf pack hunting'이라는 전략을 사용하여 대서양에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이 전략의 이름은 늑대들의 사냥 습성에서 따온 말로, 늑대 무리는 떼를 지어 사냥하는 양상을 보인다. 당시, 연합군 함대는 이들의 작전능력으로 인해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보았다.



중동지역을 가면, 별 볼 일 없는 일을 하며 지내는 20대 남자들 대부분이 슈퍼카를 몰고 다닌다. 이는 이들이 석유부자라서 이렇게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을 좀 더 캐내보면 달리 보이는 점이 있다. 이들의 국교는 무슬림으로 코란이라는 경전이 있다. 그 경전에서는 형제애에 대해 상당히 진중한 입장을 제시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신실한 무슬림이기 때문에 이를 아주 엄격하게 지킨다. 이들은 각자가 별 볼 일 없는 일을 하더라도 큰 한 주택에 형제들이 다 같이 모여 살며, 각자의 재산을 모아 살림살이들을 장만하여 공유한다.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들이 그 형제들의 집에 들어와 가사를 하게 된다. 그래서 아내들, 2세들 또한 유복한 환경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주니어들은 따로 친구를 사귈 필요도 없다. 자동으로 죽마고우가 되면서 형제애에 관한 습성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이러한 양식은 대를 이어 전수된다. 그래서 그들은 서구 문화의 독립적인 생활양식을 우습게 생각한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논리적으로 전혀 현명한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조용한 곳에서 혼자 생각해 보길 권한다. 이러한 철학적 잣대를 들이대었을 때 자신이 선을 추구하는 인간인지 악을 추구하는, 또는 어쩌다 보니 추구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인지 말이다. 이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으며, 노소 또한 구별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틀을 대어볼 수 있다.


한 영화에서 본 대사가 기억난다.


이상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다.


여러분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세월을 소비해가고 있는가에 대해, 한 명의 작가로서 참견할 일말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이고, 여러분은 여러분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잣대를 어떻게든 대어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 번쯤 대어본다고 큰일이 날 것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내 지극한 주관은 팩트를 들어 그 논리관계를 설명할 수 있기에, 영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니다.


대부분의 모든 이상은 평화롭다. 자본론, 국부론 등의 국가 단위 안목을 가진 론들부터 개개인의 가치관을 관장하는 철학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평화롭다. 그러나 역사는 폭력적이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삶 또한 사실 상당히 폭력적이다. 직장은 힘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곳이며,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문지방 안 또한 힘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곳일 확률이 높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연애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사업과 투자의 세계 또한 권모술수와 경제적 무력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담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야생적 현실에서 나의 개똥철학을 기준 삼아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 세 가지 효과가 스스로 인지할 만큼 나타난다.


첫째는 몸과 정신이 상당한 물리적 고통에 노출된다. 언제 어디서나 최전방에서, 선발군이 되어 전투에 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돈 없이도 남들에게 인정받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남들의 인정을 받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영혼은 행복하고 평안한 상태에 머문다. 나의 글을 구독해 주는 구독자들 또한 어찌 보면 나를 인정해 주는 이름모를 고마운 사람들이다.


셋째는 자산이 증가할 확률이 높아진다. 가장 거칠고 척박한 그리고 보잘것 없는 곳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식의 명예를 가지고 싸우는 이들은 남들의 인정을 받고, 이는 곧 대가성으로 부여되는 돈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처럼 고통을 오롯이 감내하는 이들 곁에는 그러한 과정을 미리 밟아보았던 선구자들이 인간성을 발휘하여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직접적인 물질이 될 수도, 사업적 지식 전수가 될 수도, 또는 투자적 지식 전수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대한민국 인구 하위 4% 기초수급대상자의 집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상위 0.1% 이내의 사업가와 독대한 적이 있다.)




새로운 철학적 틀을 지금의 자신의 삶에 대어보며 어디가 다른지 확인해 보는 습관은 당신의 인생을 변화시킨다. 돈돈 거리는 세상에서, 돈과는 관련 없이 맛 볼 수 있는, 기별이 가는 고차원의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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