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총회도 잘 마쳤다. 이번 총회 참석자들 중에는, 참여 전에도 스스로 무언가를 이뤄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또 아직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참석하여 열의를 가지고 듣는 사람도 있었다. 분명히, 그들 스스로의 이득에 실제적으로 기여할만한 내용을 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원래부터 스스로 하고자하는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비유하자면 이미 활공하고 있는 연과 같다고 보면 된다. 내가 굴레의 실을 조금 더 풀어주고, 뒷바람을 방향에 맞게 넣어주면 더 높고 멀게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금융공학적인 지식을 현실로 가져와 시공간을 과감하게 뒤트는 것이다. 그게 내가 잘 하는 일이며, 자신있는 강점이다.
오늘 글은 한 참석자의 질문에 관한 것이다.
내게 이렇게 질문했다.
어떻게 매일 글을 쓸 수 있는지.
내 대답은 '그냥 한다.'였다. 그리고 '안되면 되게 한다.'였다. 글을 쓰기 전에 생각해 보았다. 좀 더 괜찮은 답변이 없었을까.
나는 영화광이다. 장르 불문, 국가 불문 모두 다 본다. 그런 것들을 보다 보면, 새로운 심상이 생긴다. 그것이 매일 글을 쓰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효율적이기도 하다. 방에서 모니터를 보며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 그렇다.
오늘은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를 보았다. 전에도 여러 번 보았지만, 영화광인 나에게는 같은 영화를 되새겨 보는 것에 의미가 있다. 처음 볼 때, 인지하지 못했던 뜻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어린 왕자를 성인이 되어 다시 보는 것과 이치가 같다.
이라크전에 파병된 미 해군 네이비씰 저격수가 주인공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그는 가장 먼 거리에서 적군을 사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가장 많은 적을 사살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모범이 되는 군인이었고, 가장이었으며, 남편이었다.
그의 이름은 '카일'이다. 파병 이후에는 가족과 참전 군인들을 돌보는 데에 집중했다. 몸과 정신이 상한 참전군인들에게, 그의 위로는 큰 도움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불혹이 되기 전, 참전 후 전역한 해병대원과 일종의 재활활동을 하러 갔다. 사냥이나 식사를 같이 하며 정신적인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한, 선한 일이었다.
PTSD가 있었던 해병은 '카일'을 총으로 살해한다. 전설이라고 불리던 네이비씰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다. 장례식은 국빈급으로 치러졌고,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카일에게는 아내, 아들, 딸이 있었다. 영화상에서 그가 해병대원을 만나러 가기 전, 자신의 아들에게 했던 말이 있다.
"내가 없는 동안, 유일한 남자인 네가 집안의 여자들을 지키렴. 그것은 막중한 책임이란다. 잘할 수 있지?"
아들은 알겠다고 한다.
남자에게는 명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유명세 또는 권력과 연관된 명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명예는, 스스로의 책임을 떳떳하게 완수했는가에 대한 명예이다.
사람이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가치가 많지는 않다. 그리고 이 명예는 그중 하나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나는 보호본능이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다. 나는 내 공동체를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보호한다. 가족, 형제, 오래된 벗, 미래의 아내, 미래의 2세들에게 안전과 풍요를 제공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그 책임을 완수하지 못해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던지겠다.
그런 각오이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을 매일 쓰는 것도 이러한 정신에서 발현된다.
이러한 보호본능은, 어느 정도까지는 내 구독자들에게도 확장되어 적용된다. 여러분들도 내게는 일종의 공동체인 셈이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썩 달갑지는 않은 내용을 글을 통해 전달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차라리 저렇게 말하는 게, 선한 것이었다고. 그것이 책임감 있는 내용이었다고.
영웅과 악당에 대한 명언이 있다.
영웅과 악당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세상으로부터 큰 고통을 받았다는 점이다.
악당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고통을 받았으니, 나도 세상에 그것을 돌려줄 것이다.
영웅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고통을 받았으니, 내가 아끼는 사람들만큼은 이 고통을 받지 않게 만들 것이다.
아무리 악조건의 상황에 빠져있더라도, 그 상황속에서의 최선의 수는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에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최선의 수를 할 것인지,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인지.
정신을 일동해서 무언가에 진중하게 집중하는 것이 기본적인 최선의 수가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무언가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 스스로를 한계로 몰아붙이다보면 깨닫게 된다. 어쩌면 내가 구축하고 있는 이 박스를 벗어나서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이정도 경지는 되어야 진정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찾게 된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내가 10년간 투자를 해왔던 과정에서도, 최근 몇 년간 내 일을 해왔던 과정에서도 늘 나보다 잘난 사람들을 찾아가서 값을 지불하고 배웠다. 그들은 내가 나름대로 해왔던 최선이, 진정한 최선은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