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구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주류의 의견은 동기부여, 끌어당김의 법칙 등이다. 주류의 의견은 긍정, 낙천이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못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현실 관찰값과는 무관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숫자와 데이터만을 신뢰하는 사람이기에, 숫자와 데이터를 본다.
저런 거 부여잡고 사는 사람들은 진짜 위기가 닥치면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 도망친다. 자주 관찰할 수 있었다.
내가 이걸 자주 관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는 그 상황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도망칠 때, 나는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관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표본이 있다. 소수지만, 그 상황에서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내 옆에 있었던 한 줌의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어딘가 어두운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다.
다크한 에너지라는 것은 주류가 주창하는 내용과는 정반대의 속성을 가진다. 긍정이나 낙천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기부여와 끌어당김의 법칙은 동화 속 이야기, 그 이상 그 이하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위기, 어려움, 고통, 고독 앞에서 꽁지 빼는 모습들을 실시간으로 관전하며,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걸 아예 시야에 담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며, 담더라하더도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 많다.
나 같은 사람들은 속세의 쾌락 도파민 시스템이 실패한 뇌를 가지고 있다. 작동 불능이다. 그러니 재미를 기대할 값들이 거의 남아있지가 않다. 여행, 명품 따위에는 흥이 안 생긴다. 그나마 기별이 가는 것이 여자인데, 그 마저도 적극적일 만큼의 역치가 남아있지 않다. 모든 것들이 처음 해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인구가 범접해보지 못한 세계를 쟁취하는 것에 대한 엄청나게 심각한 욕심이 있다. 자신의 전반적인 건강과 수명 단축을 감수하고서라도 쟁취하려고 하는. 그러한 것들의 쟁취에 있어 발현되는 절대적 도파민 수치가 여자랑 침대에서 뒹구는 절대적 도파민 수치보다 크게 앞서기 때문이다.
더 큰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이게 좋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로 좋은 건지.
나 같은 비주류 사람은, 달성시키기 심각하게 어려운 목표에 도전을 함에 있어서.
여정을 같이 할 팀원을 선별한다.
선별의 가장 큰 기준은, 그 사람의 도파민 시스템이 어느 정도까지 망가져있는지 판별하는 것이다. 이건 육감으로 선별하는 것이지, 심박수 측정기처럼 파동을 측정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어딘가 얼굴이 썩어있어야 한다. 싱글벙글하고 있는 사람은 아웃이다. 웃는 상 하고 있는 사람도 아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 살만한 것이다. 자신의 한계 RPM에 근접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물이다.
안색이 좋지 않고 썩어있음에도 생산성 있는 일들을 계속 잡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분노가 내재되어 있는 얼굴임에도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해대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동물적인 육감으로 알고 있다. 저런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무너져내리는 상황 속에서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을 것임을. 그래서 내 후방을 지켜줄 확률이 높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나쁜 일이 터져도 별 신경도 안 쓰는 사람들이다.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스탠스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래서 작업 진행이 멈추지 않는다. 멈출 이유도 딱히 없고, 멈춘다고 악재가 그만 터져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멈출 이유가 딱히 없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만드는데에서 나오는 도파민보다 더 큰 자극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소재가 없어서 그렇다. 멈춘다고 악재가 그만 터져주지 않는 것은, 속세의 이치이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은 생각보다 정말로 우리 개개인을 신경 안 쓴다.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내 옆에 붙였던 팀원이 줄행랑을 치면, 적은 아무도 안 지켜주고 있는 내 등에 쉽게 칼을 꼽을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런 허약체들과 전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살면서 한 번쯤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대중들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쩔 때는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질하고 험담을 하기도 한다.
다만, 사태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걷잡을 수 없는 위험이 들이닥치면.
그들은 달아나며, 나 같은 사람을 찾기 시작한다.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내 구독자들은 수준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라 나를 단편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내 글을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읽어가며, 나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래서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다.
여러분들이 살면서 한 번쯤은 잘 생각해보아야 할 어젠다는.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선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선한 것이 아니었으며, 악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이면 너머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고찰의 사거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 같은 캐릭터들은 더더욱 내 등 뒤의 여자와 아이들을 보호하려 들 것이다. 때로는 내 목숨을 담보로 해서라도 말이다.(카르마의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명예 의식이나 기사도 정신이 있다.)
그 이면 너머를 들여다볼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 같은 캐릭터들은 약자들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삶을 살다 주변에 흔치 않게, 나 같은 사람이 보인다면.
그러니까 어딘가 모르게 사람이 다크한 면이 있고, 시니컬하고, 말 수가 없고, 잘 어울리지 않으려 하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방으로 만들어 볼 궁리를 해보는 게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된다.
그 사람은 자신의 여러 가지 자원을 낭비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그 말은 즉슨, 그 사람에게는 오랜 세월 정직한 고통 감내로 축적된 가공할만한 물리적 위력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숨기며 조용히 살고 있다는 뜻이다.
정말 필요할 때, 모든 것을 쏟아내기 위해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자신의 여자, 자신의 아이 또는 그에 준하는 의미를 가진 자기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이 사람들에게는 남을 효과적으로 해할 수 있는 완력이 있다.
그러니 기왕이면 적이 아닌, 우방으로 만드는 게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Adagio in C Minor | Nicholas Britel
https://www.youtube.com/watch?v=L84xbtDHIU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