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기쁨을 만끽할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이미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얼른 취직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무척 초조했지만 현실을 냉정했습니다. 30곳이 넘는 회사에 지원했지만, 대부분은 서류에서 떨어졌습니다. 운좋게 서류 전형에 합격하더라도 면접에서 또 한번 좌절감을 맛봐야 했습니다.
나날이 자존감이 추락하던 어느 날, 기적처럼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먹던 햄버거를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메일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혹여나 내가 잘못 읽은 건 아닌지, 내게 온 건 맞는지 재차 확인했습니다. 그토록 입사하고 싶었던 업계 최고의 회사였거든요.
'O병원 주임 연구원'
어렵게 취직한 만큼 명함 속 직함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명함을 주고받는 시대가 지났지만, 친구를 만나면 괜히 명함을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그 마음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군분투하며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업무도 제법 익숙해졌고, 후임 직원도 들어왔습니다. 소위 짬을 먹은 것이죠. 오랜만에 서랍 속에 두었던 명함을 꺼내어 보았습니다. 명함은 그대로인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초년생 시절과 달리, 그럴듯한 이 직함을 보고 있자니 회의를 느꼈습니다.
'이걸 빼면 과연 나를 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 나이가 된 탓일까요? 이제 와서 웬 정체성에 관한 고민인가 싶어 저조차도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윗세대를 보며 회사는 절대 노후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지 않았던가요. 회사라는 그늘을 벗어나도 나를 수식해 줄 단어를 찾고 싶었습니다.
퇴근 후, 여가 시간을 이용해 제2의 정체성을 찾기로 했습니다. 추가 소득이 있으면 더 좋고요. 유튜브를 개설해 짧은 영상도 올려보고, 스마트 스토어에 상품등록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전혀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압니다. 저는 곧 죽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스타일인데요. 그 일들은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저 남들이 좋다니까 따라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건 또 뭘 해볼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길은 의외의 곳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방황하는 마음을 글로 조금씩 쓰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쌓인 글을 다시 읽어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감정이 낯설지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늘 소비만 해온 내가, 처음으로 '생산자'가 된 순간이었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자꾸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먼저, 재수 끝에 브런치 작가 합격 메일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 만에 두근거림이었는지 모릅니다. 브런치는 내 글을 여기저기 노출시켜주었습니다. 덕분에 읽어주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또 동경하던 작가님의 공저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한 달간 매주 두 편의 에세이를 썼고, 2주의 퇴고 과정을 거쳐 책 한 권을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 <글쓰기라는 묘한 희열>, 실물화된 저의 글을 손에 쥐니, 말 그대로 '묘한 희열'이 느껴졌습니다.
'작가라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니까 작가다'라는 스테르담 작가님의 말처럼, 저는 작가라고 우기기로 했습니다. 비록 아직은 글로 돈 한 푼 벌지 못하지만,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일은 제게 금전적 가치 이상을 줍니다. 마침내 회사의 직함이 없어도 저를 설명해 줄 수식어를 찾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