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림보 달팽이 haru Nov 10. 2023

첫 만남

2. 당신의 친구





화려하고 수려한 경치보다는 고즈넉하고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유정은 힘들게 호텔까지 걸어가면서 호텔 문 앞 직전 까지도 후회와 한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러기에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고 더군다나 호텔까지 갈 수 있는 택시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것은 겨우 호텔 안내 지도가 적힌 종이 한 장뿐.

그렇게 그것에 의지한 채  흰 눈 위에 발자국을 하나씩 찍어 가고 있었다.

그때 유정의 옆으로 차 한 대가 쓱 하고 지나갔다.


'태워달라 할 걸 그랬나....? 길이라도 물어볼걸..'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히치하이킹을 하기에는 그녀가 그리 대담하지 않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하... 호텔은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눈 때문에 보이지가 않잖아!"

유정은 거의 울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운전하는 낯선 그 차가 유정을 지나쳐 왼쪽으로 가고 그 멀리에는 어떤 건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마도 저기 일 것이라 짐작 만했다. 위치상으로 그곳에 호텔 같은 건물이라곤 그곳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방금 지나간 그 자동차가 마치 자신을 안내하는 듯 한 느낌을 받은 건 그냥 기분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주 커다란 숨을 쉬었다. 하얀 입김의 온도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띠리링~

유정은 힘겹게 호텔 문을 열었다.

그녀의 어깨와 머리 위에는 하얗게 소복하게 눈꽃송이가 쌓여있었고 그녀는 그의 시린 손으로 애써 털어내었다.


"이럇사이마세!"


경쾌한 목소리로 맞이하는 직원이 보였다.


'하... 이제 살았다.'





룸으로 들어온 유정은 일본 여관의 특유의 고즈넉함과 이국적인 풍경에 놀란다.


“와.. 이제 일본 온 거 진짜 실감 나네!”


유정은 곱게 걸려있는 유카타를 얼른 입어보고 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어본다.


“오호~~ 괜찮은데? 이제 즐기기만 하자! "


들뜬마음의 유정은 유카타를 입고 호텔 여기저기를 구경 다녔다. 혼자 하는 여행의 첫 발이 폭설로 힘들 뻔했지만 이제 그런 것 은 아무렇지 않은 듯 즐겨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삿포로의 '아나타노토모노야'는 깔끔한 내부와 고즈넉한 풍경, 온천으로도 현지인들에게 유명한 곳이다. 가끔 한국인 관광객이 sns를 보고 찾아오기도 한다.

유정은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였던 ‘혼자만의 여행’을 위해 몇 달간 여행지를 검색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찍 이루게 될지는 몰랐다.

아마도 그 사건이 없었다면 여행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유정이 한참을 구경하다 멈칫했다. 그녀의 발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작고 반짝이는 것이었다.


“와.. 예쁘다.. “


해와 달모양이 반으로 쪼개어 포개면 하나가 되는 특이한 팔찌였다.

유정은 홀린 듯 그 팔찌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본 그 팔찌에 소원을 담을 듯한 눈빛으로 말이다.


재욱이 프런트의 일을 보다 로비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건너편의 기프트 샾에서

어렴풋이 유카타를 입은 실루엣이 단번에 그 여자임을 알았다.


'잘 어울리네.. 유카타.. 뭘 보는 거지? “


유정이 싱긋하며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재욱은 금세 알아차렸다.

흔하디 흔한 기프트샵의 액세서리이지만 그중에서도 재욱이 제일 좋아하는 물건이었다.


“저 잠깐 휴식이요!”

재욱이 성급하게 같이 있던 요시 씨 에게 말했다.


“에~?! 아직 5분 남았다고 5분!”

요시 씨가 의아하다는 듯 재욱에게 외쳤다.



유정은 호텔의 이곳저곳을 구경 다녔다. 로비에는 유정이 모르는 일본어가 적혀있는 책들이 가득 있었고

아담한 테이블이 여러 개 있었으며 조용히 책을 보며 차를 마시는 손님들이 있기도 했다.

한참을 그 풍경을 바라보다 유정은 로비 한편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올려다봤다.


꼬르륵...

유정의 배에서 배꼽시계가 울렸다.


'아.. 배고파.. 저녁밥은 그래도... 레스토랑에서 먹는 게 좋겠지?'


레스토랑의 오픈시간을 확인한 유정은 서슴지 않고 들어갔다.

직원이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오… 전부다 일본어야… 흠… 그림도.. 없네.. 뭘 먹어야 되는 거야..”


한참을 주문을 못하고 메뉴판만 보고 있자, 여자 직원이 눈치를 채고 다른 직원에게 재욱을 불러주길 청했다.

프런트에서 한창 바쁘게 일을 하고 있던 재욱의 앞으로 일본인 직원 유우야 씨가 다가왔다.


"재욱! 레스토랑에서 손님이 주문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유우야 씨는 재욱에게 레스토랑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 이쪽도 바쁜데~오늘따라 단체 손님이.."


그러자 요시 씨가 재욱에게 먼저 말을 던졌다.


"괜찮으니까 재욱 가봐~ 한국인 손님 말하는 거 아냐?"


재욱은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이 번쩍였다.


"아.. 그 여자.."


"괜찮아~ 어서 가보라고"


재욱은 요시에게 미안하다는 손모양을 하고는 유우야 씨의 뒤를 따라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저 끝의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한참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여자가.. 유정이 있었다.

보통 혼자 여행 오는 손님은 객실에서 식사를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레스토랑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유정이 조금은 특이하다는 생각과 함께

메뉴판을 보고 입을 삐죽거리는 유정을 보고 안쓰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흠. 손이 많이 가는 여자네"


이윽고 재욱이 유정이 있는 테이블로 왔다.


“손님 뭐 도와드릴까요?”


유정은 놀란 눈으로 재욱을 올려다봤다.


“어! 아까 그 한국분이시네!"


유정은 재욱을 보고 대충 열심히 돈 벌기 위해 일하는 측은한 한국인 취업자?

정도로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목소리 낮춰 말했다.


"되게 열심히 사시네요..? 여기 레스토랑에서도 일하시는 거예요?”


재욱은 유정의 그런 반응을 뭔가 알 것 같았다.


“흠… 가끔요? 메뉴판 보고 한참 헤매고 있는 한국사람이 있으면?”


놀리는 듯한 재욱을 보고 유정은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아~ 네네~ 안 그래도 한참 헤매고 있었네요. 길도 헤매고 메뉴도 헤매고~ 아니 사람 놀리는 게 취미예요? “


재욱이 하.. 하고 한숨을 지었다.


"저도 제 할 일 미루고 도우러 왔거든요. 여기."


"안 도와줘도 되는데?"

유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헛.. 진짜?? 저 그럼.. 갈까요? “

재욱이 심통스런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 하나도 모르겠어요.. 힝.."

유정은 다시금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긴 죄다 일본어로 돼있고…아 심지어 영어도 없어. 그림도 없어 대체 뭘 먹어야 될지 모르겠다고요…”


재욱은 그런 유정이 웃기다는 듯 손을 올려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로 웃음이 나왔버렸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를 음음 하고 가다듬고 말했다.


"놀리는 재미가 좀 있네요(웃음)"


"뭐! 뭐요?!"


아랑곳하지 않고 재욱은 말을 이어나갔다.


"음.. 석식은 코스로 주문하시면 골고루 드실 수 있으세요. 여기, 화로 와규 코스.. 아니면.. 회 코스.. 아님 일본전골..”


재욱은 그녀가 전혀 모르는 일본어가 가득한 메뉴판의 글자들을 가리키며 최대한 천천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배가 고팠던 유정은 그의 말을 유심히 듣고 일단 주문부터 얼른 해치우고 싶었다.


“일단… 일본술! 그 뭐죠? 정종? 저 한 번도 안 먹어봤거든요. "


“아.. 네. 술부터?.. 아 그럼.. 같이 식사하기에는 이게 좋으실 거예요”


유정은 이내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네~ 그걸루 요. 뭐든지 지금은 뭐든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재욱은 유정을 보고 또 한 번 웃음이 터질 것 같다가 간신히 참았다.


“되게 단순하네. (웃음)”


재욱은 메뉴판을 들고 가서 일본직원에게 부탁했다.


“오아이상~ 메뉴는.. 이걸로.. 아.. 그리고 술은 제일 약한 도수로 주세요”


“아~알았어요 욱~ 혹시 아는 사람은 아니지? “


아오이 씨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욱에게 물었다.


“아~뇨? 아직?”

"아직? 이라니?"

“네~ 아직.. 아는 사람은 아니고.. 흠... 알고 싶은 사람?”

“에~~ 뭐야~~ 알고 싶은 사람이라니~~~”


재욱은 그렇게 말했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무심결에 본심을 들킨 것 같아 이내 낯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유정을 한번 보니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이 지어졌다.  뭘까. 이상한 감정이었지만

호기심인지 그저 한국인이 잘 오지 않는 이곳에서 만난 동포에 대한 반가움인 건지.

하지만 후자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호기심인 걸까. 도와주고 싶은 동정심인 걸까.




곧이어 유정의 앞에 화려하고 맛있어 보이는 저녁상이 차려졌다.

먹음직스러운 일본전골 위에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반숙 계란이 수줍은 듯 올려져 있고

아기자기한 작은 종지 위에 정갈한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디저트로 보이는 투명하게 비치는 딸기가 투명 유리그릇에 귀엽게 놓여 있는 걸 보고는

금세 표정이 환해졌다.


"와~ 혼자 다 먹을 수나 있을까?”


유정이 주문한 정종도 놓여 있었는데 그 아래 흰색 메모지도 함께였다.


'응? 뭐지?'


'후회 안 할 거랬죠? 행복한 저녁 되세요 - 당신의 친구 あなたのとも  재욱

추신- 말이 안 통할 땐 친구를 찾으세요^^


"오~ 센스... 쫌 친절하시네.... 

.........................

근데 언제 봤다고...친구래....누가 친구한데? "






이전 01화 첫 만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