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수장의 사법농단 의혹 묵과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귀산의 부인 유씨가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형조 도관(都官)에 소장을 냈다. 각각 이름이 보전과 내약이라고 하는 여종 자매가 자기 집에서 도망친 종들이라며 자매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해주기를 요청한 것이다(세종 1년 6월 27일).
도관의 좌랑(정 6품)이자 방장이던 정승서가 유씨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자매를 매질로 신문하면서 규정을 어겼다. 자매의 아비인 내은이가 사헌부에 소장을 내서 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사헌부가 기각하였다. 내은이가 신문고를 울려서 임금이 그 집의 원통한 사정을 알게 되니, 형조 판서 김점과 대사헌 신상이 임금의 면전에서 책임 공방을 벌였다.
임금의 명에 의해 승서가 의금부 옥에 갇히니, 승서의 직속상관인 김점이 구명에 나섰다(세종 1년 6월 25일, 26일). 임금이 김점에게, 비록 승서가 매를 한두 대 초과하였어도 명백한 위법이 아니냐고 따지니, 김점이 얼토당토않은 말로 얼버무렸다. 임금이 듣고 나더니, 도관에서 아직 판결을 내리지 않았으면 사건을 형조에 넘기게 하였다.
의금부가 승서를 조사하여, 형조 판서가 승서에게 과도한 매질을 지시한 사실을 밝혀내 그대로 아뢰었다. 임금이, 형조가 아직 판결을 내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더니, 사건을 다시 도관에 넘기게 하였다. 이어서 승정원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알아보더니, 형조 판서 김점•대사헌 신상•사헌 지평 이안경 등 세 명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세종 1년 6월 27일).
자매의 아비인 내은이의 호소가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는데, 세 사람이 수감된 지 불과 하루 만에 의금부가 임금에게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고 보고하였다. '형조 판서의 지시가 있었다.'라고 실토한 승서의 자복은 숨기고, '형조 판서는 좌랑 승서가 형벌을 잘못 쓴 사실을 알지 못했다.'라고 아뢰었다.
또, 사헌부가 내은이의 소장을 기각한 것은 내은이가 같은 소장을 두 번 제출해서 나중 것을 '이유 없음'으로 판정한 것처럼 둘러댔으니, 의금부가 누군가의 압력에 의해 '꼬리 자르기'를 하였던 것이다(세종 1년 6월 28일).
곧바로 이어서 김점·신상·이안경이 모두 석방되어 각자의 직무에 복귀하니 대사헌 신상이 사의를 표했다. 임금이 받아주지 않았는데, 뜻밖의 반전이 생겼다. 임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의금부가 형조의 관원들을 신문한 기록을 들춰보다가, 형조의 영사인 황귀충의 신문조서에서,「판서의 지시를 받고 의금부로 승서를 찾아가 ‘형벌을 잘못 쓴 일을 숨기라.’고 전했다.」라는 대목을 발견한 것이다.
순간, 앞서 형조 판서 김점이 회의에서, ‘승서가 일이 많아서 실수로 회초리를 한두 대 더 때렸다.’라고 말한 사실을 떠올리고 귀충에게 승지를 보내 물어보니, 귀충의 대답이 그의 신문기록에 적힌 바와 같았다(세종 1년 6월 30일). 며칠 뒤에 의금부 제조이던 의정부 참찬 변계량이 김점과 신상의 죄를 아뢰니, 임금이 김점과 정승서를 대질하게 하였다(세종 1년 7월 4일).
승서가 어전에 불려 오자 김점이 승서에게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퍼붓더니, 종당에 가서는, "네 놈은 장래에 불의를 수없이 저지르다 수레에 찢겨 목숨을 잃고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라고 악담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승서는 반대질문은커녕 맹수에게 포획된 초식동물처럼 할 말을 잃고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같은 날 오후에 대사헌 신상이 다시 또 임금을 찾아가 사의를 표하니, 임금이 신상에게, "사헌부는 단지 형조에 속았을 뿐이다. 상대방이 교묘하게 속이면 성인(聖人)도 넘어갈 수밖에 없다."라고 위로해 주면서, 개의치 말고 직책에 있으라고 하였다(세종 1년 7월 4일).
그뿐만 아니라 승서에게 남형을 지시한 김점도 형조 판서 직책에 그대로 두었다(세종 1년 7월 5일). 세종실록에 보이는, "임금이 김점에게 '홍여방 등의 말을 듣고 경의 무죄를 알았다.'라고 말했다."라는 문구는, 형조 참판 홍여방이 모종의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세종 1년 7월 5일). 만약 김점의 딸이 부왕의 후궁이어서 김점의 죄를 묵과한 것이라면, 선공후사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비 자매에게 규정 이상의 매질을 가한 승서는 직첩(임명장)을 빼앗기고 장 1백대를 돈으로 갚았다. 용의자를 신문할 때의 매질은 한 차례에 30대를 넘으면 안 되고, 매를 한 번 칠 때마다 붓으로 한 획씩 긋다가 30대가 차면 그쳐야 하는데, 승서는 자매를 신문하면서 매를 두 번 때리고 한 획씩 긋게 했기 때문이었다(세종 1년 7월 5일).
그런데 임금도 김점은 놓아두고 승서만 처벌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5개월쯤 뒤인 11월 하순경 승서의 직첩을 돌려주게 하였다(세종 1년 11월 25일). 김점은 그다음 해 10월에 평안감사로 자리를 옮겼는데, 감사의 권한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뇌물을 긁어모으다 발각되어 영구히 관직에서 퇴출되었다(세종 4년 2월 10일). 부왕의 후궁이던 그의 딸(숙공궁주)도 친정으로 쫓겨 갔다.
그런데 김점이 사법부 수장인 형조 판서로서 보여준 파렴치는 김점과 노비 소송을 제기한 유씨 부인 사이에 모종의 '검은 거래’가 있었을 개연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유씨 부인 역시 김점 못지 않게 행실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앞의 21번 글 참조). 그런데도 임금은 김점을 도리어 감싼 것 같아서, 1429년(세종 11년) 3월에 서울 훈도방에서 야밤에 왜통사 이춘발이 피살된 사건과 더불어서 수사 미진에 대한 아쉬움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