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규의 죄는 이미 용서하였다

김종서 장남의 '위계에 의한 공무방해' 묵인

by 조병인


재위 28년 무급, 전국 각지에 도둑이 날뛰어서 별시위나 갑사가 도적을 잡으면 근무일수를 더 쳐주게 하였다.다. 강도 1명당 3백을 급여하고 절도 1명당 30을 급여하였는데, 수십 명이 함께 도적 1명을 잡는다면 공로가 있고 없는 것은 논하지 않고 모두 별도(別到)를 급여하여서, 누가 도둑을 잡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간사한 무리들이 그 사람에게 부탁해 체포자 명단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도를 받았다(세종 28년 8월 16일).


그런데 3년쯤 뒤에 권문세족의 친인척들이 포도장(捕盜狀·도적체포보고서)을 조작하여 포상으로 관직을 받았다가 덜미를 잡혔다. 임금은 오랜 투병과 극심한 가뭄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데, 현직 고위 관료들의 사위와 조카 등이 슬그머니 포도장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서 포상으로 벼슬을 받은 것이다.


처음에 중앙군의 하나이던 충순위의 무관 이종경과 송학이 강도를 붙잡아 형조에 넘기고 나서 앞서 나라에서 약속한 관직을 주기를 청했다. 그런데 종경이 형조에 포도장을 내면서, 강도 검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 사람의 이름을 슬쩍 끼워 넣었다. 형조 판서 이승손의 사위 윤계흥, 이승손의 조카 이영신, 그리고 동부승지 김흔지의 사위 김여려 등이었다.


형조 정랑(정 5품)이던 김종서의 장남 김승규가 종경이 제출한 포도장에 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것을 보고 자기 동서인 윤영의 이름을 슬며시 얹어서 모두 네 명이 관직을 받았다. 사간원이 부정을 알아채고 포도장 조작의 전모를 파악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의금부에 추국 명령이 내렸다.


당시 승규는 도체찰사 황보인을 따라 함길도에 가 있어서 의금부 관리를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승규가 도착하기 전에 명나라 군대가 달단(몽골군의 후예)의 군대에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임금이 의정부 찬성이던 김종서를 평안도로 보내면서 승규의 죄를 특별사면으로 용서하여 아버지를 따라가게 하였다.


윤계흥·이영신·김여려·윤영 등 네 명은 지방에 부처되고, 이종경과 송학은 형조에 포도장을 낸 뒤에 사면이 있어서 처벌을 면했다. 그런데 포상담당관 자격으로 의금부에서 여섯 사람을 신문한 형조 좌랑(정 6품) 박공순이 파직되었다. 임금이 포도장 조작 혐의로 의금부에 넘긴 자들을 너무 혹독하게 다뤘기 때문이었다(세종 31년 8월 4일).


그뿐만 아니라 20일쯤 뒤에 제2막이 열렸다. 사헌부가, 형조 판서 이승손과 동부승지 김흔지가 자신들의 측근이 포도장 조작에 연루된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한 죄를 캐야 한다며 임금에게 수사를 승낙해주기를 청했다.


두 사람 모두 사위와 조카가 강도 검거에 조금도 관여한 바가 없으면서 포도장에 이름을 얹어서 포상으로 관직을 받은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아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세종 31년 8월 24일).


하지만 본인들이 민망해서 직책에 그대로 있기가 불편하였던지, 다음날 이승손이 임금에게 사의를 표했다. 사위와 조카가 함께 양심을 속이고 거짓을 꾸며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한 것인데, 임금이 받아주지 않아서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세종 31년 8월 25일).


사흘 뒤에 사헌부가 상소를 올려서, 형조 판서(정 2품)를 비롯하여 참판(종 2품)과 참의(정 3품) 등 형조의 지휘부와 포도장 조작에 가담한 정랑 김승규를 사법절차에 넘기기를 청했다. 승규에 대하여는, 임금이 그의 죄를 용서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승규를 법대로 엄히 처벌하기를 청하고, 형조 지휘부에 대하여는 두 가지 죄목을 제시하였다.


종경 등이 제출한 포도장의 앞쪽에는 열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뒤쪽에는 스무 명의 서명이 있는 것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일을 처리한 죄를 물어야 합니다. 아울러서 자신의 아들과 사위의 비리를 모른 척하고 직책에 그대로 머문 죄도 함께 물어야 합니다(세종 31년 8월 28일).


임금이 사헌부의 청을 따르는 대신 사헌 집의 박중손을 불러서 상소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우선 먼저, 이미 사면으로 죄를 용서한 승규의 허물을 굳이 들추는 이유를 따지더니, 아비에게 나라의 큰일을 맡기고서 그 아들을 처벌할 수가 없어서 내린 결정이라 되돌릴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미 죄를 용서한 승규를 다시 처벌하려고 하더라도 사헌부로서는 ‘임금으로서 신의를 지키시라.’라고 간하는 것이 직분에 맞을 것이라고 중손을 질책하더니, ‘형벌이 대부(大夫)에 오르지 않는다.’라는 옛말을 들려주며, 형조 당상관들을 문책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중국은 3품 이상을 귀신(貴臣·귀한 신하)이라 칭하고 조선도 당상관 이상을 귀신으로 대접해왔다. 또, 형법에 귀신은 형벌을 면해주는 조항이 있는데 대수롭지 않은 일로 대신을 처벌하는 것이 옳겠는가. 아들과 사위의 잘못을 가장에게까지 연좌할 일도 아니고, 아비로서 아들과 사위의 잘못을 말하지 않은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내가 환관이나 후궁을 특별히 용서했거나 왕자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마땅히 사헌부가 나서야 하겠지만, 이번 일은 그런 경우가 아니니 동료들에게 내 뜻을 분명히 전하도록 하라(세종 31년 8월 28일).


중손이 승복하지 아니하고, 승규를 파직하여도 그의 죄를 용서한 교지에 반하지 않을뿐더러 신의를 잃지도 않을 것이라고 반론을 펼쳤다. 또, 형조 판서와 동부승지가 사위와 조카의 포도장 조작을 알고서도 솔직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대신의 체통을 잃은 것이라며 두 사람을 좌천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중손의 성급한 성미를 꾸짖었다.


중손이 할 말이 없었던지,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임금이 아무래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지, 한 달쯤 뒤에 형조 판서를 조극관으로 바꾸고 이승손은 품계가 한 단계 낮은 대사헌(종 3품)으로 발령을 냈다(세종 31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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