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분방한 맏형의 절도 교사 은폐
태종이 승하한 직후 이천에 머물던 양녕대군이 상경하여 빈전을 지키니, 대군을 대궐에서 내보내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2년 전에 대비(원경 왕후)가 죽었을 때는 대군이 빈소에 있어도 태종의 눈과 귀가 두려워 입도 떼지 못한 사람들이, 태종이 숨을 거두자 벌떼같이 일어나 맏상제를 빈전에서 쫓아내려 한 것이다.
대간의 상소를 시작으로 의정부와 육조가 동시에 들고 일어나, 태종의 생전에 큰 죄를 지은 대군은 상주 자격이 없다며, 대군을 빈전에서 내보내라고 상소를 올렸다. 뒤에 가서는 의정부ㆍ육조ㆍ사헌부가 합동으로, 태종이 생전에 대군의 생사에 관한 문제를 자신들에게 위임하였다며, 대군을 당장 내치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임금도 이례적으로 강경하게 맞섰지만 중과부적을 느끼고 대군을 이천의 처소로 돌려보냈다. 그 뒤로 대군은 부친의 빈전을 찾지 못하다, 4개월쯤 뒤인 9월 6일에 헌릉에 재궁(梓宮ㆍ황제, 황후, 임금, 왕비의 관을 일컫던 말)을 묻기 전까지 단 한 차례 빈전에 술과 음식을 올렸다(세종 4년 6월 17일).
세종실록에 "장례일 나흘 전에 환관을 이천에 보내 대군을 오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으나, 대군이 빈전을 다녀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세종 4년 9월 2일). 그런데 태종의 국장이 있고 얼마 안 되어서 대군이 절도를 교사하여 동생인 임금을 곤경에 빠뜨렸다.
처음에 대군이 누군가로부터, 태종이 생전에 아꼈던 사냥개를 박득중이라는 사람이 기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집의 종들을 시켜서 그 개를 훔쳐오게 하였다(세종 4년 10월 22일). 이후로 그 개를 데리고 오리 사냥을 다니며 들판에서 기생을 불러서 요란하게 연회를 여는 등 온갖 낯 뜨거운 일을 다 저질렀다.
대군이 상제로서 애도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방탕을 거듭하자, 마을 주민인 임도하 등이 서울에 올라가 말을 퍼뜨렸다. 임금이 소문을 듣더니, ‘아들로서 아버지 상중에 그랬을 리가 없다.’라고 믿음을 표하면서도, 노파심에서 환관을 보내 대군에게 직접 물어보게 하였다.
대군이 하늘에 맹세하며 사냥개 절도를 부인하여 환관이 돌아와 그대로 아뢰니, 형님의 대답이 미덥지 않았던지, 의금부로 하여금 도하와 마을 주민들을 불러다 조사하게 하였다. 도하를 제외하고 모두 목격 사실을 부인하자, 의금부에서 도하에게 무고죄를 적용해 돈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였다.
도하가 어쩔 수 없이 의복을 팔아서 속전(贖錢•죄를 면하기 위해 나라에 바치는 돈. 벌금)을 바쳤는데, 임금이 미심쩍게 여기고 도하와 마을 주민들을 승정원으로 불러서 승지들을 시켜 다시 물어보니 소문이 모두 사실이었다. 임금이 깜짝 놀라서 도하로부터 받은 금액을 즉시 돌려주게 하고, 그를 조사한 기록을 모두 모아서 궐내로 들여오게 하였다. 대간이 알면 대군을 탄핵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세종 4년 윤 12월 26일).
하지만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달 남짓 지나서 사헌부 장령 이숙치 등이, 대군 집의 종들을 잡아다 대군의 불충과 불효를 밝혀서 위로는 하늘에 있는 태종의 혼령에게 아뢰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보이기를 청했다. 임금이 따르지 않아서 유야무야 되었으나, 임금의 형벌이 공평하지 않았던 본보기로 꼽을 만하다(세종 5년 2월 1일).
절도 은폐가 다가 아니었다. 대군이 이천 현령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주민들을 불러서 돌을 실어다 집을 꾸미면서 소주를 과하게 먹여 주민 한 명이 죽었다. 이천 현령 박고가 현장에 있었던 주민들을 잡아다가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니, 대군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서 박고의 무례를 엄히 다스리기를 청했다.
그런데 그 글에 ‘만약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형제 사이가 멀어질 것’이라고 겁박하는 말을 적어서, 대간이 번갈아 상소를 올려서 임금에게 대군을 죽이기를 청했다(세종 4년 11월 14일, 18일, 24일, 30일, 12/1, 12/2, 12/4). 연말을 전후해 상소가 멈춘 듯싶더니, 다음 해 1월 사헌부가 다시 또 상소를 올렸다.
대군이 종들을 시켜 박득중의 집에서 사냥개를 훔치고, 임의로 집을 꾸미다가 사람들에게 술을 많이 먹여 한 명이 죽게 한 일을 다시 소환해, 대군을 극형에 처하고 이천 수령 박고를 엄벌에 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군은 놓아두고 박고만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봉합하였다(세종 5년 1월 21일).
이후로도 대군은 욕심나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취하며 무법자처럼 살았고, 그의 자식들도 또한 거리낌 없는 삶을 살아서, 대군 가족의 엄벌을 청하는 대간의 상소가 끊일 날이 없었다. 하지만 임금은 죽는 날까지 형님과 조카들을 철통같이 지켜주었으니, 선공후사(先公後私) 원칙을 무색케 하고도 남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