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전을 죽인 형조 판서의 외아들 선처
형조 판서 서선의 외동아들이자 좌의정 황희의 사위인 서달이 사람을 죽였다. 처음에 서달이 모친과 더불어 부친을 보러 서울에 왔다가 고향인 충청도 대흥현(예산)으로 돌아가던 길에 신창현(아산)에 이르렀다. 그 고을 아전이 예를 표하지 않고 달아나자 서달이 괘씸히 여기고 종들을 시켜서 그 아전을 잡아오게 하였다.
서달의 종들이 길을 가던 아전 한 명을 붙잡아 묶어서 앞세우고 달아난 아전의 집을 향해 가는데, 표운평이라고 하는 아전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연유를 따졌다. 서달의 종들이 건방지게 여기고 운평을 발길로 걷어차고 몽둥이로 때렸다. 다음날 운평이 숨을 거두니, 운평의 유족이 천안의 충청도 감영에 신고하였다.
충청감사 조계생이 직산현 지사 조순과 온수 현감 이수강으로 하여금 신창 현감 곽규와 함께 사건을 수사하게 하였다. 조순과 이수강이 폭행 도구와 피의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서달이 종들에게 폭행을 교사한 것으로 조서를 작성해 신창현의 관노를 시켜서 천안에 있는 충청감영에 가져가 감사에게 올리게 하였다.
의정부 찬성이던 황희가 신창현 출신인 중추부 판사 맹사성에게 운평의 유족에게 합의를 권유해주기를 부탁하였다. 사성이 마침 서울에 머물던 운평의 형(복만)을 집으로 불러서, 신창의 풍속이 부끄럽게 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타이른 뒤에, 신창 현감 곽규에게 서신을 보내 합의 주선을 부탁하였다.
서달의 아버지 서선도 신창과 온수로 곽규와 이수강을 직접 찾아가 서달이 외동인 점을 내세워 동정을 구하고, 서선의 사위이자 대흥현의 현감이던 노호도 곽규와 이수강을 직접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기도 하고, 사람을 시켜서 사정하기도 하였다.
신창의 관노비가 조서 뭉치를 가지고 찬안의 충청감영으로 출발하자 신창 현감 곽규가 노호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알려주었다. 노호가 길목을 가로막고 관노로부터 조서 뭉치를 강제로 빼앗은 뒤에, 장모의 피붙이인 신창현 교도 강윤을 시켜서 운평의 유족에게 이익을 약속하고 합의를 종용하게 하였다.
잇따라서 운평의 형 복만이 노호로부터 금품을 받고 사성과 곽규의 지시에 따라 죽은 동생의 부인을 찾아가 합의서를 쓰게 하였다. 그 합의서가 신창현을 거쳐서 온수현으로 보내지니, 이수강과 조순이 증인들을 다시 소환해 서달 대신 그 집의 종들에게 죄를 씌워서 감사에게 수사결과를 올려 보냈다.
충청감사 조계생이 직산 현감 윤환과 목천 현감 이운에게 재수사를 지시하니, 두 사람 역시 서선과 노호와 수강으로부터 청탁을 받았는지라, 앞의 보고서와 똑같이 회보를 작성하여 올렸다. 그것을 받은 도사 신기와 감사 조계생도 내용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대로 서울의 형조로 올려 보냈다.
형조 좌랑(정 6품) 안숭선이 그 문건을 받고서 7개월 동안이나 미적거리다 면밀히 살피지 않고 참판 신개에게 넘겼다. 신개 역시 자세히 살피지 않고 구금 중이던 서달을 풀어주고, 하수인에 불과한 서달의 종들을 주범으로 의정부에 보고하였다. 그것을 받은 의정부 또한 그대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수사기록이 공정하지 않고 합의서의 앞뒤가 틀리는 모순을 발견하고 의금부에 재수사를 지시하니, 사건의 전모와 더불어서 주범이 바뀐 사실이 드러났다. 먼저 서달이 의금부에 수감되고, 닷새 뒤에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형조 판서 서선 등이 동시에 의금부에 갇혔다(세종 9년 6월 12일, 17일).
하루 뒤에 황희와 맹사성이 보방으로 풀려나고 서선은 그대로 있더니, 십여 일 뒤에 형조 참판 신개와 충청감사에서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긴 조계생이 의금부에 갇혔다(세종 9년 6월 18일). 사흘에 걸친 조사에서, 다수의 최고위 관리들이 조직적으로 사건을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니, 의정부와 형조의 여러 관리와 충청도 여러 고을의 수령이 무더기로 파면되었다.
법대로 하면 서달을 사형에 처해야 하였는데, 임금이 그가 외아들인 점을 감안해 형을 유배형으로 낮춰서 돈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게 해줬다(세종 9년 6월 21일). 곧이어 형조 판서를 서선에서 노한으로 바꾸고, 황희와 맹사성을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복귀시키니, 십여 일 뒤에 강적이 나타났다.
조계생의 파직으로 대사헌 직책을 겸직하게 된 참찬 이맹균이 상소를 올려서 인사와 징계의 부당성을 지적한 것이다. 살인범 조작에 가담한 정승들을 다시 등용한 것도 옳지 않고, 사람을 죽인 자를 유배형에 처하고 돈으로 갚게 한 것도 부당하다며 재고를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세종 9년 7월 4일, 15일).
일주일 뒤에 맹균이 다시 또 상소를 올려서, 서달에 대한 관용을 거두고 먼 곳으로 추방하기를 청하니, 사흘이 지나도록 임금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세종 9년 7월 22일). 사헌 집의 김종서가 작심하고 나서서 재고를 청하니, 임금이 마지못해 서달을 경상도 고성으로 보냈다(세종 9년 7월 25일).
40일쯤 지나서 이조 판서 허조가, 서달 일행에게 피살된 운평의 아들을 엄하게 응징하고, 그의 죄를 방치한 충청감사와 인근 고을의 수령들도 문책하기를 청했다. 신창현에서 운평이 서달의 종들에게 몰매를 맞던 날 운평의 아들이 40여 기병을 거느리고 대흥현까지 서달을 추격해, 현감 노호와 함께 마루에 앉아있던 서달을 마당으로 끌어내려 화살로 서달의 발뒤꿈치를 쏘았다고 아뢰니, 모두 붙잡아서 본때를 보이게 하였다(세종 9년 9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