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왕이 믿은 신하라 못 죽인다

부정축재 혐의로 축출된 조말생 비호

by 조병인

도성에 큰 불이 나서 사람이 많이 죽고 재산 피해도 매우 컸다. 임금은 대소 신료와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강원도 횡성으로 강무(사냥놀이를 겸한 군사훈련)를 갔는지라, 도성에 남아있던 왕비가 힘겹게 진화를 지휘하였다(세종 8년 2월 15일, 16일).


횡성에서 보고를 받고 부리나케 환궁한 임금은 재발방지 대책과 원인 수사 등을 챙기면서, 많은 수의 원로 대신을 일거에 축출하였다. 사헌부가 권신들의 비리를 속속들이 파악해 한꺼번에 탄핵해 준 덕분에 임금이 나라의 정치지형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었다.


선왕 때부터 막강한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누려온 좌의정·우의정·병조 판서·부원군 등을 비롯하여, 화려한 이력과 관록으로 각종 특권과 특혜를 누리던 권신 여러 명이 동시에 철퇴를 맞았다. 병조 판서이자 치안총수였던 조말생도 막강한 권력을 빼앗기고 충청도 회인에 부처되었다(세종 8년 3월 4일).


대관들이 큰일을 하였다고 생각한 임금은 이례적으로 사헌부 장령 이안경을 대궐로 불러서 사헌부의 공로를 치하하며, 권신들의 청탁을 들어준 형조 관원들에 대한 수사를 지시하였다(세종 8년 3월 5일).


말생의 친형이자 불교계의 거물로 개경사(開慶寺태조 이성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절)의 지주를 지낸 승려 설우도 비리 혐의로 타격을 입었다(세종 8년 9일).


임금이 대간의 기회주의를 질택하니, 권신들의 청탁을 받고 노비 소송의 판결을 미루거나 승소 판결을 내려서 노비 증서를 발급해준 도관의 법관들이 된서리를 맞았다(세종 8년 3월 14일, 15일). 그들이 권신들의 청탁을 들어줄 당시 사헌부에 대관으로 있으면서 그들의 비리를 알고도 문제를 삼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파직되었다(세종 8년 3월 20일).


그런데 임금과 대관의 밀월은 보름을 넘기지 못했다. 사헌부가 조말생의 비리 의혹을 추가로 들춰내 말생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임금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세종 8년 5월 13일). 임금은 사헌부의 요구를 따르는 대신 말생을 회인에서 황해도 평산으로 옮기고 그가 부당하게 취득한 재물을 모두 몰수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직전까지 임금의 친위대 같았던 사헌부가 갑자기 원수처럼 사나워져 무려 20일 가까이 말생의 목숨을 놓고 임금과 맞섰다.


이후로 군신 간의 힘겨루기가 오래 계속되었다. 임금은 부정축재 혐의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말생을 감싸고, 사헌부는 말생이 중죄를 범했으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우겼다. 사헌부의 대관들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리자 임금은, "태종께서 오래 신임하고 총애한 대신을 차마 죽일 수가 없다."라고 솔직하게 심경을 밝혔다(세종 8년 6월 2일).


사헌부가 말생의 또 다른 비리를 들춰서 말생을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말생의 친동생인 종생을 승정원 수장인 지신사로 앉혔다(세종 8년 9월 4일). 사헌부가 종생의 수뢰 의혹을 들춰서 두 달 만에 종생을 낙마시켰다(세종 8년 11월 22일).


7개월쯤 지나서 임금이 말생의 친형인 계생을 대사헌으로 앉혔다가 직전에 충청도 감사로 있으면서 살인사건을 잘못 처리한 사실이 드러나 보름 만에 파직하여 귀양을 보냈다(세종 9년 6월 6일, 18일, 21일). 3개월쯤 후에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말생의 유배를 풀어주니(세종 10년 윤4월 1일) 사헌부가 다시 또 말생의 새로운 비리를 들춰서 말생을 죽이라고 파상공세를 펼쳤다.


사헌부가 잠잠해지자 임금이 대사헌을 제외한 나머지 대관 다섯 명을 한꺼번에 바꾸더니, 말생의 형제들을 다시 요직에 앉혔다. 전라도 태인으로 귀야을 보냈던 조계생의 유배를 풀어서 대사헌에 복귀시키고, 비리 혐의로 파직되었던 조종생도 예조 참판으로 복귀시켰다(세종 10년 5월 22일, 7월 5일).


1년 반쯤 지나서 임금이 말생의 직첩을 돌려주니(세종 12년 4월 13일), 이번에는 사간원과 사헌부가 말생의 묵은 비리들을 다시 또 들춰내 한 달 가까이 집요하게 철회를 청했다. 임금이 오래도록 무대응으로 일관하더니, 2년쯤 뒤에 말생에게 병권을 관장하는 중추원 동지사를 제수하고(세종 14년 12월 8일), 이듬해 봄에 말생을 함길도 감사로 보냈다(세종 15년 1월 9일).


사헌부와 사간원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지만 임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생에게 중추원 판사와 예문관 대제학을 차례로 제수하고, 나라에 공이 많은 원로에게 임금이 직접 수여하는 궤장까지 내려주었다. 그 사이 관직에 나간 말생의 두 아들이 아비의 수뢰 전력 때문에 대간의 인사검증에 걸리자, 임금이 직접 나서서 풀어주었다.


그중 동생인 조근이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어 부제학 최만리가 주도한 언문창제 반대 상소에 이름을 얹었다. 이후로도 말생은 승록대부와 보국(輔國·정 1품)을 거쳐 중추원 영사가 되었다가 78살로 생을 마쳤다(세종 29년 4월 27일).


그렇다면 임금은 왜 부정축재 혐의로 정계에서 축출된 인물을 그토록 지성으로 감싸면서 그가 죽는 날까지 최고의 대우를 아끼지 않았을까?


그럴듯한 답이 될 만한 세 가지 상황을 떠올려볼 수 있다. 첫째로, 조말생의 맏며느리가 임금의 동생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있던 기간에, 자신이 총애하던 신빈 신씨와의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난 정정옹주를 조말생의 장남 조선(12살)과 혼인시켰다. 조말생을 사돈으로 삼은 것이다(세종 3년 3월 3일).


이후에 임금이 조선을 가선대부 한원군에 봉하였는데, 애석하게도 조선이 28살로 요절하여 정정옹주가 청상과부가 되었다(세종 19년 9월). 그래서 자상하고 인정 많은 오빠로서 여동생의 보호막인 시아버지 조말생을 끝까지 지켜주었을 개연성이 높다.


둘째로, 자신이 세자가 되고 임금이 되는 과정에서 조말생이 지신사와 이조 참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평생 말생에게 무거운 채무감을 느꼈을 수 있다.


셋째로, 말생은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친데다 추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말생의 그런 장점을 국가의 중요한 자산으로 여기고 말생을 감쌌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실제로 뒤에 여진족들이 나라 북쪽의 국경을 어지럽히자 조말생을 함길도 감사로 보내서 평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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