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치사 연루자만 처벌하라

허위보고에 속은 의정부와 형조 역성

by 조병인

평안도 평양부의 관원들이 강도 사건을 수사하다 사람을 아홉이나 죽였다. 어린아이들의 실없는 말을 듣고 사람들을 붙잡아다 무리하게 고문을 가하다 대형 참사를 빚은 것이다. 평안도 감사이던 조뇌가 문책을 피할 생각으로, 참변을 숨기고 강제로 받아낸 진술을 토대로 억지로 죄를 엮어서 형조에 올렸는데, 이후의 검토 과정에서 아무도 평양부의 참극을 알아채지 못했다(세종 13년 5월 28일).


결국은 일이 들통 나서 의금부가 임금에게 형조와 의정부 관리들에 대한 수사를 허락해주기를 청하니, 한 달 전에(5월 16일) 사면이 되었다며 윤허하지 않았다(세종 13년 6월 9일). 이틀 뒤에 의금부 제조인 이조 판서 권진예조 판서 신상참판 심도원 등을 필두로, 위관인 대제학 하연과 좌대언 김종서까지 가세해 재차 허락을 청하니, 역시 이미 사면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의금부 제조들이 나서서, 당시의 사면은 노역 이하 죄수들을 용서한 것이고, 형조와 의정부 관리들의 직무태만은 유배형에 해당한다며 재차 허락을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무리한 고문으로 여러 사람을 죽인 평안감사 조뇌 등은 마땅히 처벌해야 하지만, 이미 결정된 문안에 따라 정상으로 처리한 형조와 의정부 관리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하였다(세종 13년 6월 11일).


다음날 의금부가 평양부 참사에 연루된 일곱 관원의 혐의를 각기 자세히 갖추어 율에 따라 차등 있게 죄를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원안대로 윤허하였다(세종 13년 6월 12일).


하루 뒤에 대사헌 신개가 상소를 올려서, 형조 판서 정흠지, 참판 박규, 참의 이숙치, 정랑 민신·박근, 좌랑 이인손·정함·이종번, 우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참찬 오승·이맹균, 사인 윤형·조서강 등도 엄히 꾸짖고 모두 관직을 거두기를 청했다(세종 13년 6월 13일).


임금이 이틀 전에 의금부 제조 권진 등의 요구를 물리칠 때와 똑같이 대응하면서, 사면 전의 일을 가지고 대신을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쐐기를 박았다. 사헌부 지평 이사증이, 사면 전에 벌어진 일이라 노역이나 장형에 처할 수 없다면 직첩이라도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을 내놨다(세종 13년 6월 13일).


사증이 2년 전에(세종 11년 3월 25일) 영흥부의 군기고 화재사건을 소환하였다. 영흥 부사가 혹독한 고문으로 범죄사실을 조작하여 방화범으로 올려 보낸 자에 대해 형조와 의정부가 사형을 구형한 것을 임금이 무죄를 밝힌 일을 거론하며, 형조와 의정부 관리들을 엄히 문책하기를 재차 청하니, 임금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영흥부 방화사건의 범인이 조작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관리들을 문책할 당시는 의정부와 형조 관리들의 죄에 경중의 차이가 있어서 형조 관리들만 문책하고 의정부 관리들은 놓아둔 것이었다. 그리고 일을 맡은 관리가 문제를 알아채기 전에 다른 관리가 먼저 알고서 바로잡아준 경우는 일을 맡은 관리를 문책할 수 없게 한 법조문이 있으니, 형조와 의정부 관리들을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세종 13년 6월 13일).


사간원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우사간 김고 등이 상소를 올려서 의정부와 형조의 직무태만을 엄히 다스리기를 재차 간곡히 청하니, 임금이 사헌부의 청을 뿌리칠 때와 똑같은 논리로 방어막을 쳤다. 우헌납 이의홉이 다시 나서서, 애먼 백성을 아홉 명이나 죽였는데도 죄를 가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매달리듯이 간청하여도 임금의 대답은 녹음기를 튼 것처럼 똑같았다(세종 13년 6월 13일).


대간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였던지 말없이 투지를 거두고 대항을 멈췄다. 그렇게 해서 형조와 의정부 관리들에 대한 문책 공방이 끝나자, 임금이 평양부의 과도한 고문에 희생된 아홉 명의 유족에게 쌀과 콩을 합하여 4석씩 내려 주고 이후 3년 동안 부역을 면해주게 하였다(세종 13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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