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간미수가 아니라고 들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성폭력 의혹 예단

by 조병인

성균관 생도 두 명이 대낮에 길가는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그것도 성균관 내의 공자 사당인 문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성균관 생도 전원이 사흘 동안 몸을 깨끗이 하고 언행을 삼가는 재계 기간에 생긴 일이라 큰 파장이 예상되었다.


성균관에서 함께 유숙하던 진사 최한경과 생원 정신석이 성균관 옆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데 평상복 차림의 ‘앳된 여인’이 여종 두 명을 거느리고 길을 지나갔다. 한경이 그 여인을 보더니 갑자기 알몸 상태로 물을 박차고 뛰쳐나가 노상에서 여인의 옷을 벗기려 하였다.


여인이 완강하게 저항하니 여인을 따르던 두 여종이 자기 집 안주인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신석이 가세하여 여종들을 때려서 쫓아버리고 한경을 도와서 힘으로 부인을 제압하였다. 이어서 여인의 삿갓을 빼앗아서 성균관 경내로 돌아왔고, 여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허둥지둥 현장을 떠났다.


그런데 신석이 쫓아버린 두 여종이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달려가 다급하게 사태를 알렸고, 여인 집의 사내 종인 원만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밤이 이미 깊어서 유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아니하자, 원만이 성균관의 당직관을 찾아가, 자신의 신분을 홍여강의 종이라고 밝히고 찾아온 경위를 설명하며, 유생이 빼앗아간 여인의 삿갓을 돌려달라고 하였다(세종 20년 8월 1일).


원만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말한 홍여강은 관리로 재직하였을 때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태종 시절 사관으로서 공신들의 연회장에 들어갔다가 행사 요원에게 발각돼 매를 맞고 쫓겨나기도 하고, 태종이 편전에서 정사를 볼 때 몰래 뜰아래까지 들어갔다가 환관에게 들켜서 강제로 끌려 나온 적도 있었다(태종 1년 2월 20일, 4월 25일).


원만의 말을 들은 당직자가 한경과 신석을 불러서 사실 여부를 물었다. 두 사람 모두 자진해서 범행을 털어놓으면서, 둘이서 여인을 희롱한 것이 전부라고 하였다. 성희롱은 인정하면서 추행이나 강간미수는 부인한 것인데, 원만의 진술이 판단을 어렵게 만들었다.


당직관이 원만을 불러서 다시 물어보니 대답이 오락가락하였다. ‘봉변을 당한 여자가 너의 여주인이 맞느냐.’고 물으니, 사실은 주인집 유모의 딸인데 유생들을 겁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당직관이 꾀를 내어, '그 집 유모는 딸이 없지 않느냐.'라고 넘겨짚으니, 원만이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다가, 사실은 주인집의 여종이었다가 주인의 첩이 된 여자라고 하였다.


질문에 따라 대답이 바뀌는 원만의 말이 미덥지 않다고 판단한 당직관이 대질을 시켜볼 생각으로 원장에게 현장에 있었던 두 여종을 데려오게 시켰다. 원만이 대질을 피하려고 그랬는지, 두 명 모두 밖에서 일이 있어서 외출 중이라 곤란하다고 하였다.


당직관이 잠시 조사를 중단하고 고민에 빠졌는데, 소앙이라는 여인이 사헌부에 나타나 한경과 신석을 강간미수 혐의로 고소하였다. 그녀는 홍여강의 아들인 홍우명의 첩이었는데, '미투'를 호소하며 고소장을 제출한 여자가 사헌부 관원에게 피해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강간미수라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희롱만 당했다고 하여서 미심쩍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으나, 권세있는 집안의 일이라 감히 드러내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사헌부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수사결과를 토대로 두 유생의 죄와 벌을 정하여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석은 '제사의 집사로서 여인의 삿갓을 빼앗고 희롱한 죄'로 태 40대에 처하고, 한경은 '소앙을 강간하려고 위력을 행사한 죄'로 장 80대 에 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재수사를 지시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강간미수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니(所聞不至於此•소문부지어차)’ 진상을 다시 확인하여 아뢰도록 하라(세종 20년 8월 1일).


하지만 고소인을 반복해서 조사하고 추궁하여도 대답이 오락가락하여, 사헌부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실대로 상황을 아뢰니, 임금이 한경만 장 80대에 처하고 신석은 죄를 면해주게 하였다.


한경과 신석이 소앙을 성희롱한 사실을 성균관에 알린 원만도 무죄로 풀려났다. 사헌부는 원만에게 '소앙의 신분을 속여서 사람들의 귀를 어지럽힌 죄'를 적용해 형을 정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가, 임금이 윤허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공히 재주가 출중했기 때문이었는지, 성균관 측은 재계 기간에 성폭력 혐의로 사헌부의 조사를 받은 두 사람을 퇴출하지 않았다. 무죄로 풀려난 신석뿐만 아니라 강간미수로 장 80 대에 처해진 한경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6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인 1444년(세종 26)에 한경이 정기 과거인 식년시에서 합격자 33명 중 5등으로 합격하고, 신석 역시 20등(정과 10등)으로 붙었다. 한경은 서예에도 뛰어나서, 평생 명필로 이름을 날리며, 중추부 첨지사, 충청도 관찰사, 이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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