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간의 끌림은 어쩔 수가 없다

비정상적 이성교제의 자기복제 개탄

by 조병인

[1] 이름이 어리가라는 유부녀가 평상복 차림으로 거리와 마을을 활보하며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어리가는 병조 참판(종 2품) 이춘생의 딸이자 임금을 호위하는 별시위 이진문의 아내였기에, 말을 듣는 사람마도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의금부의 조사 결과, 부사정(종 7품 무관) 이의산이 어리가를 유인하여 둘이 서로 정을 통하고, 노비 소생인 양인 허파회는 담을 사이에 두고 어리가를 꾀어서 여러 달 동안 함께 정을 통한 사실이 확인되었다(세종 15년 11월 25일).


의금부가 임금에게 세 사람 모두 법에 따라 장형을 집행한 뒤에 먼 변방으로 추방하기를 청했다. 임금이 수사기록을 살펴보더니, 어리가와 허파회만 장을 친 뒤에 먼 곳에 유배하고, 의산은 직첩만 회수해 투병 중인 부친을 간병할 수 있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세종 15년 12월 4일).


사간원이 어리가·이의산·허파회 등을 모두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면서, 어리가의 여동생을 다시 조사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녀가 정거효와 결혼하여 언니인 어리가와 한 동네에 살면서 의산의 친척인 문사라는 사내와 정을 통했는데 문사만 처벌되었다고 아뢰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의금부가 임금에게, 어리가와 의산을 각각 전라도 해남과 경상도 기장으로 추방하고, 파회는 함경도 영북진의 병영에 보내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가 내렸다(세종 15년 12월 5일). 사간원이 어리가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여기로 그녀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또, 이의산이 집에 있으면서 아비 간병에 힘쓰지 않는다며 그를 먼 곳으로 보내기를 청했다(세종 15년 12월 8일 ).


다음날 임금이 영의정 황희·좌의정 맹사성·사간 배둔·지평 이겸선 등을 호출하더니, 도승지 안숭선으로 하여금 어리가·이의산·허파회를 더 이상 벌하지 말라는 내용의 교지를 내리게 하였다.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심지어 궁궐 안에서 강상(綱常)을 어지럽힌 자도 있었으니, 그것이 어찌 법이 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는가. 우리나라 사례를 보더라도, 윤수와 이귀산의 아내가 음탕하고 문란하게 행동하다 처형되었으니, 악행을 징계하는 법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유감동·금음동·유연생 등이 잇따라 나왔으니 남녀 사이의 정욕을 어찌 법령만으로 억제할 수 있겠는가(세종 15년 12월 9일).


황희 등이 어리가와 자매 사이인 정거효의 아내를 법대로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2] 임금이 여자로서 강상을 어지럽힌 사례로 그 이름을 언급한 '윤수의 아내'는 태종을 섬기던 승지의 아내였는데, 남편의 고종 형인 홍중강과 간통한 뒤에 장님인 하천경과 잇따라 간통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처음에 윤수의 아내 조씨(제석비)가 액땜을 위해 불경을 읽게 할 생각으로 소경인 하천경을 집으로 청했다. 조씨가 천경에게 껍질 벗긴 밤을 주면서 맛을 물으니 천경이 '매우 달다.'고 대답하였다. 조씨가 '밤보다 더 맛있는 것이 있다.' 하고 천경을 유혹하여 여러 해 동안 서로 정을 통했다. 뒤에 둘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자 소문이 퍼질 것을 염려해 어린 몸종을 죽였다가 탄로가 나서 천경과 함께 참수되었다(태종 16년 2월 25일).


[3] '이귀산의 아내'는 성이 유씨였는데, 유부녀 신분으로 청춘 시절의 연인과 사랑을 나누다 발각되어 목이 베이었다(세종 5년 10월 8일). 유씨는 일찍 고아가 되어서 불교에 귀의해 절에서 승려로 지내면서 먼 여자 친척의 집을 드나들다 당시 14살이던 그 집의 아들(조서로)과 눈이 맞았다.


결국 어른들에게 연애를 들켜서 그 집을 출입하지 못하다, 뒤에 승복을 벗고, 관리이면서 성품이 자상한 이귀산과 결혼해 남편의 사랑을 듬뿍 누렸다. 그 사이 조서로가 대궐에서 임금을 모시는 지신사가 되어 귀산의 집에 종종 들르자, 유씨가 서로를 그의 조카 집으로 유인하여 서로 만났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몰래 다른 사내를 만난 것도 별 일이지만, 그녀의 연락 수법이 선수급이었다.


문자를 조금 알고 장기와 바둑의 규칙도 알았던 유씨는, "목복(木卜)의 집에서 만나 맺힌 정을 풀고 싶다."라고 종이에 적어서 은밀히 서로에게 주었다. 목복(木卜)은 朴(박) 자의 획을 좌우로 분리한 것으로, 서로의 여동생의 아들인 박동문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후로 동문의 집에서 서로와 1년이 넘도록 애욕을 불사르다 사헌부에 들켜서, 3일 동안 저잣거리에 세워졌다가 사람들 앞에서 참수되었다. 그녀와 함께 뜨거운 시간을 보낸 서로는 직책을 빼앗기고 영일(포항)에 유배되었다(세종 5년 10월 8일).


[4] 유감동·금음동과 함께 이름이 언급된 '유연생'은 전 직장(종 7품) 안영의 아내였는데, 이종 사촌 오빠인 홍양생과 몰래 정을 통하다 남편인 안영에게 현장을 들켜서, 양생과 함께 중벌을 받았다. 양생은 곤장 1백대를 맞은 뒤에 경상도 고성으로 추방되고, 연생은 여성이라 장형을 면하고 경상도 울산으로 쫓겨갔다(세종 10년 4월 11일, 21일, 윤4월 1일,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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