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의 간부(奸夫) 살해범 감형
[1] 방 안에서 자기 아내와 간통하고 방 밖으로 나온 사내를 뒤쫓아가서 살해한 남자의 죄명을 두고 형조와 승정원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다. 간통 현장에서 아내의 간부(奸夫)를 죽인 것이 아니어서 형조가 투구살인(鬪毆殺人•서로 싸우다가 상대방을 죽인 경우)으로 처리한 것을 승지들이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궁리 끝에 임금에게 도움을 구하니, 명쾌하게 판정해주었다.
자기 아내와 간통하고 달아나는 남자를 뒤쫓아가서 죽인 경우는 간통 현장을 덮쳐서 죽인 것이 아니어도 간통 현장에서 죽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투구살인범은 사면을 만나면 죽음을 면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살 길이 없으니 투구살인죄를 적용하기는 곤란하지 않겠느냐(세종 10년 윤 4월 15일).
[2] 부사정(종 7품 무관) 장자후가 죽은 이종 사촌 형님의 아내와 몰래 간통하다 발각되어, 사헌부가 임금에게 자후의 직첩을 거두고 국문을 명하기를 청했다. 임금이 듣고 나더니, "간통을 하고서 죄를 면하는 것도 옳지 않고 간통을 하지 않고 죄를 받는 것도 옳지 않으니, 간통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하고, 엄정한 수사를 지시하였다(세종 11년 6월 16일).
[3] 3년쯤 지나서 수양아들과 간통하여 아이를 밴 소근소사라는 여인이 간통죄로 체포되어, 임금이 혼란에 빠졌다. 법을 따르자면, 소근소사는 간통 현장을 들키지 않았으니 처벌할 수 없고, 간통으로 여자가 임신하였으면 여자만 처벌하도록 되어 있어 소근소사의 수양아들도 처벌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두 가지 걸림돌이 더 있었다(세종 14년 6월 18일).
첫째로, 양반의 본처가 간통을 저지른 경우는 현장을 들키지 않았어도 남녀를 처벌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데, 실제로 처벌하려면 법을 어겨야 하였다.
둘째로, 원수를 졌거나 앙심을 품은 자가 말을 지어내서 간통을 고발한 경우까지 처벌하여 법의 뜻을 벗어나게 될 우려가 있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예조 판서 신상 등이 소근소사를 엄벌에 처하기를 청했다. 법은 비록 그와 같이 되어 있어도, 소근소사가 강상을 심히 위배한 죄를 엄히 다스릴 필요가 있고, 소근소사가 매를 한 대도 맞지 않고 범행을 순순히 자백하였으니, 고민할 것 없이 중형에 처하여 타락한 풍속이 바로 서게 하자고 하였다.
임금이 결말을 유보하더니 다음날 다시 황희ㆍ맹사성ㆍ권진ㆍ허조ㆍ안순ㆍ신상 등을 대궐로 불러서 마땅한 해법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사건을 의금부에 내려서, 두 사람의 간통을 최초로 퍼뜨린 사람을 찾아내고, 두 사람이 간통하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 두 사람을 풀어주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가 내렸다(세종 14년 6월 19일).
의금부가 소근소사와 그녀의 수양아들 변득비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세 가지 이유를 내세워 임금에게 소근소사를 석방하기를 청했다.
첫째. 소근소사와 그녀의 이웃사람들과 관원들을 조사하였으나 둘이 간통하는 현장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둘째. 형률에 「간통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것이 아닌데 간통한 것으로 지목되었으면 죄를 따지지 말고, 간통으로 여자가 임신한 경우는 여자만 처벌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셋째. 가뭄이 심하여 어제 노역형 이하 죄수들을 모두 사면하셨으니, 소근소사도 풀어주시는 것이 옳겠습니다(세종 14년 6월 22일).
임금이 듣고 나더니, 소근소사의 구금을 풀어주게 하였다.
[4] 1년쯤 후에 경상도 영덕현에서 아전이 기생과 정을 통해 수령이 그 기녀를 신문하다가 매질이 지나쳐서 기녀가 죽었다(세종 15년 5월 22일). 그런데 남녀가 간통 현장을 들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간통은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소회를 밝히더니, 간통죄 처리 원칙을 수정할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반드시 남녀가 한 방에 같이 있다가 붙잡혔을 때만 간통죄를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남자가 여자를 유인하여 집 안으로 들였다가 발각된 경우는 그 의도가 명백하다고 보아도 될 것이니, 간통한 장소에서 붙잡힌 것으로 간주해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세종 15년 6월 4일).
우의정 최윤덕이, 율문에 딱 들어맞지는 않아도 남자가 여자를 집으로 유인한 것이 분명하면 간통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고 화답하니, 임금이 깊이 공감을 표했다.
[5] 2년이 더 지나서 충청도 은진에서 자기 아내와 간통한 남자를 붙잡아서 구타하고 칼로 찔러 죽인 사내가 붙잡혔다. 형조가 법대로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1등을 감하여 장 1백대를 때려서 3천 리 밖으로 내쫓게 하였다.
형조가 법대로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면서, 이후로도 자신의 처첩과 간통한 사내를 간통 현장이 아닌 곳에서 죽인 경우는 일반 살인으로 처리하게 해 주기를 청했다. 아내의 내연남을 간통 현장이 아닌 곳에서 죽인 자를 유배형에 처하면, 간사하고 포악한 무리들이 원수에게 자신의 처첩과 간통한 혐의를 씌워서 죽음으로 몰 것이라고 아뢰니, 임금이 공감을 표하면서도 은진의 살인자에 대한 감형을 거두지 않았다(세종 17년 9월 16일).
[6] 2년 더 지난 뒤에, 전라도 낙안에서 아내와 간통한 사내를 간통 현장이 아닌 곳에서 찔러 죽인 사내가 검거되자, 형조가 임금에게 법대로 참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의정부와 육조의 생각을 들어보라는 명이 내려 두루 물어보니 대답이 다양하였다. 당연히 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형이 가장 가벼운 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어, 임금에게 그대로 아뢰니, 형을 한 등급 낮추라는 명이 내렸다(세종 19년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