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실토한 자들만 추국하라

음녀 유감동과 놀아난 관원 선별처리

by 조병인

전·현직 관리 여러 명이 유감동이라는 여자와 순차로 정을 통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감동은 검한성 유귀수의 딸이자 평강 현감 최중기의 처였었는데, 중기가 무안 군수로 부임할 때 함께 따라갔다가 병을 핑계 대고 혼자 상경하여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음행을 반복하다 중기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하였다(세종 9년 8월 17일).


사헌부가 명단을 파악해 임금에게 아뢰면서 추문에 연루된 자들의 직첩을 모두 거두고 전원을 감동과 함께 사법절차에 넘기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가 내렸다(세종 9년 8월 18일). 이틀 후에 사헌부가 총제 정효문과 상호군(정 3품) 이효량을 비롯한 아홉 명을 추가로 아뢰며 모두 직첩을 거두고 수사하게 해 주기를 청했다. 임금이 효문과 효량은 직첩을 빼앗지 말고 잡아오게 하였다.


사헌 집의(종 3품) 김종서가, 효문은 감동이 자신의 숙부 정탁과 간통한 사실을 알면서도 감동과 정을 통했고, 효량은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감동과 간통한 사실을 아뢰며 두 사람을 엄벌에 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감동을 더 이상 추국하지 말게 하였다.


유감동을 더 추국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간부(奸夫)가 십 수 명이나 밝혀진 데다 재상도 포함된 정황까지 드러났으니 그만 죄를 결단해도 될 것이다. 더 추국한다 한들 그녀가 자기와 간통한 남자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겠느냐. 또, 효문은 자기 숙부가 감동과 간통한 사실을 모르고 감동과 정을 통했다고 하고, 공신의 아들인 데다 뒤에 사면이 있었으니 효문을 더 이상 추국하지 마라(세종 9년 8월 20일).


사헌부가 승복하지 아니하고, 황치신·변상동·전수생 등이 감동과 정을 통하기 전에 그녀의 정체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여부를 바른대로 말하지 않는다며 세 사람에 대한 재수사를 허락해주기를 청했다.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면서 감동은 풀어주게 하였다.


만약 세 사람이 감동의 정체를 알고서도 그녀와 정을 통했다면 감동이 세 차례나 고문을 당하도록 참고 말하지 않았겠느냐. 또, 여자가 말하지 않는데도 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니 감동을 즉시 석방하라(세종 9년 8월 20일).


며칠 뒤에 사헌부가 황치신·변상동·전수생 등을 추국한 결과를 아뢰며, 세 사람이 감동과 정을 통하기 전에 감동의 정체를 알았던 사실을 숨겼을뿐더러, 감동과 정을 통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형평을 잃으면 안 된다며, 세 사람을 더 신문하게 해 주기를 청했다.


임금이 듣고 나더니, 치신은 감동의 정체를 알고서 한나절 동안만 함께 있다가 헤어진 뒤로 다시 감동을 찾지 않았으니 신문 대상에서 제외하고, 상동과 수생만 의금부에 가두고 끝까지 죄를 추궁하되,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야 할 단서가 드러나면 다시 아뢰게 하였다(세종 9년 8월 29일).


하루 뒤에 사헌부가 감동과 정을 통한 열 명을 추가로 아뢰니, 다음날 임금이 장령 윤수미를 불러서 지침을 주었다. 열 명 가운데, 감동의 정체를 알면서 정을 통하고서 사면을 만난 사람과, 감동의 정체를 모르고 사면 후에 정을 통한 사람은 죄를 묻지 말라고 이르니, 수미가 전수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단지 감동의 진술만으로 그녀와 간부가 정을 통한 시점과 간부가 감동의 정체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여부를 가리면, 감동이 애정의 경중에 따라서 진술을 달리할 수 있으니,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려면 간부로 드러난 사람들을 모두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세종 9년 8월 30일).


임금이 듣고 나서,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은 직접 불러서 조사하고, 지방의 임지에 있는 사람은 증거에 의거해 죄를 가하라고 명을 내리니, 다음날 사헌부가 감동과 정을 통한 아홉 명을 다시 또 추가로 보고하였다(세종 9년 9월 1일, 2일).


열흘 후에 임금이 좌대언 김자에게, 감동의 죄를 법대로 결단하되, 감동을 죽이는 것으 옳은지 살리는 것이 옳은지 여부를 의정부·육조·삼군 판부사·한성부 당상(정 3품 이상)과 함께 의논해보라고 명을 내렸다. 김자가 두루 들어보니 의견이 분분하였다.


누구는 사족의 딸로서 인륜을 심하게 어지럽힌 죄를 씌워 죽여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먼 변방의 관노비로 영구히 보내야 한다고 하여, 임금에게 그대로 아뢰니, 사헌부로 하여금 법대로 죄를 정하여 아뢰게 하였다(세종 9년 9월 14일).


이틀 뒤에 사헌부가 감동과 간통한 39명의 죄를 각기 자세히 적어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런데 사헌부 임금에게 올린 보고자료에 양반집 아낙이던 감동이 희대의 음녀로 변신하게 된 사연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감동이 몸이 아파서 어딘가로 피병(避病)을 가다가 우연히 길에서 김여달과 마주쳤다. 여달이 순찰대원을 사칭하며 거칠고 억센 언동으로 감동을 위협하여 현장에서 겁탈하고서는 이후로 거리낌 없이 감동의 집을 드나들며 정욕을 채웠다. 그 뒤로 감동이 오랫동안 남편 몰래 김여달과 정을 통하고 때로는 여달과 함께 집을 들낙거리더니, 종당은 남편을 버리고 완전히 가출하여 스스로 창기라 일컬으며 서울과 지방을 넘나들며 밤낮으로 사내들과 정을 통했였다.


임금이 듣고 나더니, 몇 사람의 형을 몇 등급 낮추거나 혹은 아예 형을 면해주게 하고, 감동은 장형을 집행한 뒤에 먼 변방의 관노비로 보내 평생 풀려나지 못하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세종 9년 9월 16일).


그런데 그 뒤에 임금이 감동의 팔자가 기구하고 가엾다고 생각하였던지, 6개월 남짓 뒤에 죽은 이지의 처인 김씨의 유배를 풀어주면서, 감동의 천역을 면제하여 먼 지방에 안치하게 하였다(세종 10년 윤 4월 1일). 대사헌 최부 등이 상소를 올려서 철회를 청하니 외면하고 따르지 않았다(세종 10년 윤 4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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